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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_F/내 안에_요14장

내안에(4)_그 날에/구원을 써보세요

by 우루사야 2023. 1. 21.

본문 : 요14장 22-25절
제목 : 알고 계십니까? / 구원을 써보세요. 

1. 서론
1) 예화
잠재력이라는 힘이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속에 내재해 있는 힘입니다. 이 힘은 단번에 알 수 없습니다. 사용해보면서 알 수 있는 힘이죠. 각 스포츠종목마다 스카우터들이 있습니다. 잠재력을 가진 선수를 발굴해내기 위해 세계 곳곳 또는 초중고팀을 관찰합니다. 현장에 찾아가서 잠재력을 가진 선수들이 그 힘을 사용하는 것들을 보며, 저 선수가 지금 힘이 전부인지 아니면 발전가능성이 더 있는 잠재력이 있는지 판단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박지성 선수가 그러하죠. 외형적으로보나 출신으로나 특별해 보이지 않는 선수였습니다. 그래서 프로입단에도 실패한 나머지 대학으로 진학했지요. 그러다 올림픽대표팀과의 연습경기에 나서게 되었고, 그 현장에서 박지성 선수의 잠재력을 보게 된 올림픽국가대표 감독은 박지성 선수를 발탁합니다. 도원지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먼 길을 달려봐야 좋은 말인지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눈으로 척보고 알면 좋겠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그 길을 가보는 것이지요. 잠재력을 발휘하는 현장에서 판단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2) 주제
우리 개혁주의 신학이 구원을 말할 때에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미와 아직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약속으로 구원을 주셨음을 믿습니다. 죽어서 실재로 받을 구원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죠. 죽 아직 벋은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미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아직"이라는 것을 잊습니다.이미를 믿는 사람은 "아직"의 길을 잘 걸어야 합니다. 약속을 받고서 가만히 있다가 죽을 때 짠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미를 믿는 사람으로써, 구원을 사용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아직이라는 시간을 살아낼 힘을 가지게 됩니다. 장로교가 대부분인 한국교회가 이렇게 지탄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만 믿고서, 죽어서 받을 구원이라 믿고 아직이라는 현세를 아무렇지도 않게 비신자처럼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돈에 휘둘리고, 정직을 내다 버리며, 이웃과 원수맺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연약한 자를 돌보려 하지 않는 것. 이미 구원받았음을 믿는다면, 구원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로만 받은거니 사용을 못하는 것이죠. 구원이라는 잠재력이 없는 것이죠.
구원의 천리마가 과연 나인가,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면서, 그 머나먼 길처럼 보이는 이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나의 구원에 대해서 확인이 가능한가 우리는 구원을 사용해보아야 합니다.

3) 본문잇기
계속해서 말씀드리다시피 예수님은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 힘이 있으며, 그 정답을 우리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알려주실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복음과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직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복음, 구원을 사용해봐야 합니다. 성령님이 도와주시는 것을 경험해봐야 합니다. 그래야 이미의 길을 걸을 수 있겠습니다.


2. 본문
1) 하나님의 계획
그렇다면 우리가 "아직"의 시간을 어떻게 잘 살 수 있을지 예수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25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은 헤어지기 직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지금 함께 있으면서 하는 말들을 직접 너희가 듣지만, 나중에는 더 확실히 듣게 될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26절의 내용입니다. "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게 될 것이라고 생각나게 될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눈으로 보는 존재가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는 존재가 될 것임을 말한 것이죠.

우리의 신앙생활은 느낌이 아닙니다. 환상이 아닙니다. 환청이 아닙니다. 누구나 깨달을 수 있고 생각나게 되는 "마음에서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말씀을 읽고, 그 말씀으로 생각하는 묵상, 그 말씀으로 선언하게 되는 기도의 시간입니다. 이 세가지를 모두 할 수 있는 시간이 큐티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하시고 묵상하시고 삶에 적용해서 기도하시며 살아내셔야 합니다. 그 때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생각나게 되고 깨닫게 되고 용기와 소망을 얻게 되시기 때문입니다. 천리마가 달려봐야 알듯, 구원을 써봐야 알죠.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을 써보는 과정에 성령의 역할을 두시고 "보혜사"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보혜사라는 말이 어려운데, NIV는 카운셀러로 번역했는데, 그러니까 멘토의 역할을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구원이 이미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 알려주는 안내자의 역할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실수 중에 하나가 내가 듣고 내가 깨닫고 내가 경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도우셔서 듣고 깨닫고 경험해야 합니다. 지금도 설교를 들으시면서 나의 주관, 나의 생각, 나의 신념으로 통과시키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여러분을 돕기 위해서 마음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들으셔야 합니다. 성령하나님이란 카운셀러는 이렇게 오셨습니다.

1) 아버지께서 보내신 성령 하나님 : 보통 우리문화에서 신들림은 우리의 자아가 정복당하여 접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물아일체와 같은 사상에서나 접신에서 인간자아의 자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신과의 합일은 우리자아 그대로를 인정합니다. 성령 하나님이 오실 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그대로 가지고 오시게 됩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듯,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존중하시고 사랑하시고 감싸안으시는 아버지 멘토가 되어주십니다.

2) 예수의 이름으로 계신 성령 하나님 : 그런데 성령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청하시어 오시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제자들을 고아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함께 동행하셨듯이 성령 하나님이 함께 계심으로써 예수와 함께 있었던 때와 같이 하시겠다는 겁니다. 폭풍때, 변화산에서, 중풍병자집에서, 나병을 고치며, 이방인 집에서 등... 복음서를 읽으며 예수가 제자와 함께하듯 우리와 함께하심을 배우시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의 실재적 역할이 함께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함께 있어서 이말을 지금 하지만, 떠나게 되면 성령께서 두가지이미지처럼 함께 계셔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었고, 그 현실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인 것입니다.
이미 약속받은 구원은 성령과 함께 하는 현실 속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아직 이뤄지지 않은 구원이 오늘 여러분 삶 속에서 이뤄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2) 우리의 반응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실재적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줍니까? "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 모든 -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가면 성령 하나님께서 제자들 마음 가운데 임하셔서 모든 것을 알려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이 떠나셔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잊을 일이 없다는 것이겠지요. 바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3년여 시간 동안 성령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 때 바울은 자신이 알고 있던 구약이 새로 짜여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잠깐 만난 예수가 성령으로 임하여 바울에게 모든 것을 새롭게 알려주셨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임하시면 모든 것들응 깨닫게 됩니다. 과거의 나의 상처 곁에 하나님이 계셨고, 나의 아픔의 시간에 예수가 등에 엎고 계셨고, 나의 트라우마에 성령님이 나를 붙들고 계셨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변화가 있습니다. (카슨박사는 사도들에게 직접적인 계시로서 "모든 가르침"이 있을 것임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른 의미로 적용될 수 있겠습니다.)

(2) 가르치고 생각나게 해주시는 것 - 그렇다면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알려주신다는 겁니까? 그 선이 있습니다. 몰아일체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자아와 자유, 의지 등을 존중해주십니다. 그래서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 기도하시는 분들에 대해서 존중합니다만, 더 성숙하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각을 주시고, 가르처 깨우침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에 순종하고 결단함으로 실천하게끔 하십니다. 그것이 더 성숙하고 성장한 자의 모습이겠지요. 한 아이가 부모님의 말대로 움직인다면 어떻게 성숙한 성인이 되겠습니까? 움직이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법을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것이지요. 성령님은 우리 곁에서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생각나게 해주심으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 점점 더 어른스럽게 하나님의 뜻대로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십니다. 걸음마때부터 인생의 가장 중대한 결정에 이르기까지 가르쳐주십니다.

이런 삶에 대해서 예수님은 27절에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27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은 평안을 주시는데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것은 근심이 사라지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근심의 환경이 있건 없건, "평안하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끼친다"는 유산을 남기다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두고 떠나가 그 힘을 네가 쓸 수 있게 하겠다, 잠재력을 주고 가겠다는 말씀이신 것이죠.
문제를 돌파할 수 있는 것을 가르쳐주시고, 역경을 넘어설 수 있는 생각이 나게끔 해주십니다. 즉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주심으로써 우리가 평안을 누리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국을 만드시는 방법이 이러합니다. 우리의 죄를 없다 셈치고 천국을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서 문제를 감당하게끔 하시며, 우리도 죄가 가득한 인생을 살게끔 하십니다. 문제를 없애지 않으시고, 뚫고 가게 하십니다. 성령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심으로 우리는 문제 앞에서도 평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시려면 제대로 하셔야 합니다. 어설프게 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이 약속을 믿으셔야 합니다. 이 약속을 믿고 내 안에 성령 하나님과 살아봐야 합니다. 그래서 가르쳐주시는 것을 배우고, 생각나게 해주시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내 인생이 내 어줍잖은 능력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 인도되어 가는 구나를 경험하셔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천국을 만들어가시는 인생이 되길 소망합니다.
과연 여러분의 잠재력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잠재력으로 이루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여러분 안에 구원이 있고, 그 구원을 깨닫고 그것이 꽃이 피도록 성령 하나님이 돕고 계시다고 말이죠. 이것이 여러분의 잠재력입니다.


3) 허리, 새신자를 가르칠 수 있는 것
제가 지금 1년째 설교사역과 주일학교 사역을 함께 도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비신자 아이들 사역까지 하면 사실상 몸이 세개라도 남아나지 않고 머리가 네개라도 남아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신기한 것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힘들을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금방 부흥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동역할 사역자들과 평신도가 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건 제 욕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몸과 머리가 두세개가 되는 일상을 살게 하셨습니다. 때론 이런 일상이 힘들고 지치고 내려놓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을 계속 살게 하셨습니다. 이 일상이 그런데 또 막상 눈에 띄지 않습니다. 티가 많이 안납니다. 그럼에도 해야 합니다. 속부터 차근차근 하나하나 먼지를 털고, 물건을 정리하고, 질서를 잡고, 실력을 하나씩 키워야 합니다. 그럼 어느샌가 저도 교회도 힘이 장성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저부터 성령 하나님이 가르쳐주시고 깨닫게 하시는 시간을 살고자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가 됩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고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그 중 하나가 평신도 사역입니다. 교회는 결코 목회자가 중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느 조직이든 허리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경제도 중산층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축구도 미드필더, 야구도 중간타선이 든든해줘야 합니다. 군대도 최전방을 돕는 보급부대가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교회에서 허리는 바로 평신도 리더입니다. 예수를 믿어보고 싶은데 어떻게 믿는 것인지 모르는 이에게 이렇게 믿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리더입니다. 그럼 여러분에게 여쭙겠습니다. 예수는 어떻게 믿는 겁니까?
사실 지금 1월 첫째주부터 지금까지 4주 동안 진행해온 것이 새신자반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우리 행복한교회는 요한복음 14장 20절에서의 예수님의 약속을 실행에 옮기는 교회이고, 여러분은 새신자에게 예수믿는 법을 이 구절로 설명해주시면 됩니다. 그 날에는 예수가 내 안에 계십니다. 또 예수가 하나님 안에 있어 부전자전으로 하나님을 우리가 알게 해주십니다. 또 우리가 예수 안에 있음으로 예수가 대표자로 열어놓으신 혜택을 모두 누리게 됩니다. 그 날에 이런 것들이 이뤄질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사랑하는 자는 이 말씀을 믿고 지키고 순종합니다. 그래서 저절로 천국의 삶, 다스리는 자의 삶, 예수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게 장성해집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새신자를 붙들고 신앙생활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뛰어드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새신자에게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설명하고 설득하는 성령의 사역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교회가 성장하는 길입니다. (세속화-성령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3. 결론
잠재력에 대해서 서두에 말씀드렸었습니다. 잠재력에 대해서 가장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마도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일 것입니다. 남들처럼 성공하고 싶고, 잘나가고 싶고, 근심걱정 좀 덜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나마 잠재력이 나에게 있어 미래에 그렇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이라도 삼고 싶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무너지는 나의 모습을 매번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갑니다. 아무 힘도 없는 나라는 사람 앞에서 말이죠. 신앙이 밥먹여주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또 다른 잠재력이 없나 살펴봅니다. 그러나 바닥에 내가 더이상 끄집어낼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더 아래로 내려가라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지하실보다 더 아래로, 더 깊게, 더 깊숙히 들어오라고 말합니다. 그 속에 하나님이 심겨두신 구원이 있다고,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그것을 알려주고 깨닫게 하시려고 기다리고 계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말씀해주십니다.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이것으로 평안하라"고 말이죠.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잠재력이 있습니다. 평안함으로 확인하며 기다릴 줄 아는 우리의 삶이 되길, 그 평안을 우리 주변에 끼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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