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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_F/내 안에_요14장

내안에(3)너희가 내 안에_대표자 예수로 누리는 삶

by 우루사야 2023. 1. 15.

본문 : 요14장 22-24절
제목 : 나의 자리, 예수의 자리

1. 서론
1) 예화
의식주라는 말이 있지요. 본래에는 춘추전국시대 사상가들이 입고 먹는 것을 뜻하는 "의식"이라는 말이 있었고, 거기에 일본식 번역한자로 의식주라는 말이 생겼다고 하네요. 체면을 중시하는 유교문화인지라 "옷을 뜻하는 의"가 가장 맨 앞에 오게 되었는데, 북한은 1980년대부터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식의주로 바꾸 었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먹는 문제였기에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어떻게 이 순서가 바뀔까요? 아마도 모두가 주를 가장 앞에 두지 않을까 싶습니다. 완전히 거꾸로 바뀌었지요. 의와 식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수 있고 비용도 그리 크지 않지만, 가장 큰 경제력을 두어야 하는 "주거문제"만큼은 모두가 가장 앞에 두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한 언론기관에서 20-30대에게 포기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조사했더니 연애, 결혼, 출산에 이어서 "집"을 포기하겠다고 합니다. 연애, 결혼, 출산이야 안할 수는 있지만, 집은 매일 생활해야 하는 곳인데 집을 포기하는 젊은이라니, 아니 그 외의 연령대도 가장 중요한 문제를 안고 살아야 하는 시대라니 참으로 씁쓸합니다. 자리를 얻을 것을 포기하는 시대에서 우리는 어떤 신앙인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2) 주제
대부분의 성경인물들의 생활을 살펴보면 안정적 주거환경을 보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노아는 배를 지었고,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났으며, 이삭은 우물을 빼앗겨 이주다녔고, 야곱, 요셉은 타향살이를 오래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은 광야생활을 할 정도였지요. 그러다가 그나마 정착한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타락하여 결국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 75년 포로생활을 겪지요.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이스라엘은 로마 압제에 있었고, 그 이후에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에 의해 망하게 됩니다. 과연 성경은 우리의 주거에 대해 답을 해줄 입장일런지 의문스럽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가장 단도직입적인 단어로 말해주는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는 신자의 삶에 대해서 "나그네"라고 표현했습니다.(벧전1:1) 나그네 인생을 살듯, 전세살이로 평생 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가주택을 살면 비성경적인생이라는 겁니까? 땅에 뿌리박고 살 것이 아니라 하늘의 자리를 바라보며 땅에서 떠날 사람으로 살라는 말이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떠날 사람들인데, 왜 이렇게 영원히 이 땅에서 살 사람들처럼 사느냐는 것이지요. 하늘에 우리의 자리에 대한 약속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3) 본문잇기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 대표자 예수를 통해 우리의 자리가 마련되었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1-2)라는 약속, 우리의 거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도 나의 안식처가 되시는 주님의 말씀과 약속으로 은혜가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2. 본론
1) 나그네는 믿음의 눈으로 집을 향합니다.
사람이 기준이 되어주는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은 굉장히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나의 생활과 비전에 대해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버팀목이었던 것이지요. 그런 예수가 떠나간다고 제자들은 이제 무얼 믿으며,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심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너희는 내가 죽은 후에 있을 곳을 알고 따라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으로는 안보이게 되지만, 영혼의 눈으로 보면서 살아야 할 때라고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예수님은 "19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영혼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자는 제자가 아니고 세상에 속한 자이기에 못보고 못올 것이지만, 나의 제자 나의 길을 따라오는 너희는 나를 보면서 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유다가 이렇게 질문을 하게 됩니다. 22절입니다. "22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님을 배반했던 유다가 아니라 흔한 이름이었던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제자가 묻습니다. 예수라는 든든했던 힘이 사라진다고 하니 유다도 불안하기 마찬가지였겠지요.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우린 볼 수 있고, 세상사람들은 볼 수 없느냐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신앙의 잣대를 한가지 얻게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아니면 안보이십니까? 저는 안보입니다. 그럼 저도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것이 됩니까?

여기서 "나타내다, 보다"라는 것은 "눈으로 보는 가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믿음이지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예수님이 길, 진리, 생명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약속에 신뢰를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거처를 준비하러 먼저 가시는 것뿐임을 믿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며 나아가게 되지요.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관계, 믿음, 신뢰가 없는 사람은 결코 믿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련해놓으시겠다는 거처에 대한 기대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사람처럼 마련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23-24절입니다. "2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24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예수의 말을 사랑하는 자는 이 땅에서 나느네로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의 거처를 마련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예수의 말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게다가 예수의 말을 사랑하고 지키는 자에게 "우리가 함께 하리라"(성삼위일체)는 약속까지 하시며 영원한 거처로 오는 길을 함께 하겠다고까지 하십니다.

말씀을 외우고, 큐티를 매일하라! 는 신앙메뉴얼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판단, 결정, 행동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 뜻, 방향이 과연 있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통독, 큐티, 한구절 암송 무엇이든 좋습니다. 예수의 뜻을 여러분의 생각, 행동, 판단, 결정의 중심에 두십시오. 그렇게 예수를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 보일 것입니다. 그것은 더 나아가 여러분의 영원한 안식처를 보게 하여, 현재의 주거에 대한 항상 있는 불만족의 시야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눈을 떠서 지금 나의 처소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놀라운 처소"라는 것을 깨닫게 할 것입니다.


2) 대표자 안으로
이러한 영적원리를 예수님은 한 구절로 요약하셨습니다. "20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여기서 "너희가 내 안에"라는 단어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해서 우리의 거처에 대한 근심이 사라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4장을 살펴보면서 제가 계속해서 등장시키는 단어가 "근심하지말라"와 "고아"입니다. 고아는 거처에 대한 불안정성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한 곳에 뿌리를 박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녀는 땅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땅에 자신의 땅이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지금 우리 눈 앞에 예수가 보이지 않아도,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는 겁니다. 눈 앞에 신이 안보인다고 해도 괜찮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예수가 내 안에 살아계심으로써 깨달을 수 있는 "믿음"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그 말씀을 한번 살펴보죠.

예수가 인간이 됨으로써 예수는 하나님과의 연결고리를 다 잃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가 인간 중에 최초로 가장 선한 자가 됩니다. 그렇게 예수는 인류의 대표자가 됩니다. 그 대표자는 인류를 대신해 형벌을 받고 사형을 받습니다. 그런데 대표자를 성부 하나님은 살려내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이라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을 향하는 자에게 회복과 부활을 주시기 때문이죠. 그것이 하나님이 처음부터 가지신 계획이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의 보좌우편 왕좌에 앉게 됩니다. 우주의 왕으로 다스리는 자가 되지요. 그렇게 예수가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예수가 우리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가 먼저 간 그길을 걸어서 보좌 우편에 함께 있게 됩니다.

이번 중고등부 아이들과 함께 1박 2일 동안 많은 활동들을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국회의사당에 다녀온 것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주영이와 주원이가 많이 유익해하더군요. 여러분. 우리가 직접 법을 만들지 않지만, 우리는 우리의 대표자를 세워서 법을 만듭니다. 우리가 직접 정치와 행정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대표자인 대통령과 구청장, 시장을 세워 수행케 합니다. 이것이 "대의"입니다. 나를 대신할 자를 세우는 것이지요. 이렇게 대표자원리를 우리는 가장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또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적원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대표자"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쉽게 믿지 못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을 왜 다른 사람이 맡아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이죠. 그렇다면, 여러분의 투표, 대통령의 사면, 시장의 행정, 구의원들의 조례 등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세운 대통령과 그 대통령이 임명한 한국은행장의 의결로 금리를 높여서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대표자의 원리 속에서 살아가시면서, 왜 영적원리에서만큼은 이것이 불가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는 우리의 대표자가 되어주셔서 우리를 인도해주고 계십니다. 특히 예수님은 마지막 유언과 같은 오늘 본문에서 계속해서 "거처"에 대해서 말씀해주십니다.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2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3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4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새번역) 우리는 그래서 이 땅에서 내가 어떤 생활과 배경을 가지고 있든, 나의 대표자가 마련해놓으신 그 곳을 바라보며 굳건하게 살 수 있겠습니다.


3) 나의 능력
능력주의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우리나라는 보통 "자신의 능력에 비례해서 수입이 차이가 난다면 그 차이를 불공평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보통 10명의 6명 이상이 그렇게 생각한다고들 하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잘 아시는 하버드대학의 마이크 센델 교수를 비롯해서 현대의 사상가들은 이런 능력주의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능력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다 모두 자신의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별난 유전자를 이어받아 타인보다 더 우월할 수도 있고, 또는 타인보다 우월한 집안사정을 통해서도 출발점이 보통사람보다 앞서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능력에 비례해서 소득의 차이를 낸다는 것이 공평한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점을 던지는 것이지요.

어찌보면 성경은 그런 현실을 그대로 돌파합니다. 이 세상에는 공평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 차이점이 나게끔 만드시고 운영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지요. 저는 경제적으로 보자면 출발점이 너무 뒤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으로써는 왠만한 다른 목사보다 선천적으로나 후천적으로나 앞서서 출발 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목사가 되는데 있어서도 공평하지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이 세상은 어떤 관점에서든, 어떤 시야에서 보든 공평이 이뤄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각 사람에게 각각 공의롭고 공평하게 인도해주는 왕이 있습니다. 대표자가 있습니다. 각 사람을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않고, 또 그 왕을 따라 잘 걷는 자에게 함께 해주시고, 더 나아가 거처를 마련해주시는 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본문 23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예수가 마련해놓은 거처에 가기까지 우리를 내버려두는 대표자가 아니었습니다. 영으로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 안을 거처로 삼으시고 함께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예수는 "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는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함께 삼위하나님으로 여러분 안에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삼위하나님이 영으로 거처를 마련하셨고, 그렇게 함께 걷다보면 여러분 마지막길에서 하나님의 집에 예수님께서 마련해놓으신 거처에 영원한 영광과 생명을 누리게 되실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불공평한 능력주의 현실을 너머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나그네와 같이 살아가야 합니다. 이 땅에 것에 붙들려 있으면 안되겠습니다. 능력주의를 따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도 능력주의를 따르는 이 세상의 불공평함을 불평하며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삼위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3. 결론
이번에 중고등부 친구들과 함께 다양한 활동들을 했습니다. 컨셉은 "새로움"이었습니다. 못 먹었던 것들, 못 봤던 것들, 못 들었던 것들, 못 느꼈던 것들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고맙게도 여름에는 뭘할꺼냐고 묻더군요. 그리고 마지막시간이었습니다. 진로탐색하는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희의 인생은 명사로도, 동사로도 설명되지 않아. 형용사야. 의사나 회사원과 같은 명사로 설명되지 않아. 영업하다 운전하다라는 것으로도 설명되지 않아. 이런 것은 수단일뿐이지 절대 너의 평생을 포함해주지 않아. 너를 만드신 하나님의 뜻과 의도는 형용사로 표현된단다. 편안한 이사야, 듬직한 박주영, 섬세한 박주원.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만드셨는지 알자꾸나!"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고, 그 만드신 모습 그대로 함께 해주시고, 그렇게 능력주의, 물질주의, 성공주의를 넘어서는 인생을 살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 예수님은 약속해주십니다. 우리가 함께 하고 있다고, 그리고 천국에서 너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고. 그러니 나를 사랑하고 나의 말을 지키라고. 나를 믿고 있으라고 말이죠. 우리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의 자리를 마련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대표자되시는 예수님 안에서 이번 한주도 흔들리지 마시고 굳건하게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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