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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_F/갈라디아서_다른 복음은 없나니

갈 5:13-18

by 우루사야 2023. 1. 17.

13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4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오늘도 성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율법에 대한 강론이 마쳐져가고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약속과 율법을 모두 가진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실생활 적용으로 말하고자 합니다. 율법을 가진 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약속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 두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율법에 더 매여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희미하게 보여주셨고, 율법을 통해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 극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율법교사들은 율법을 더 강조하여 성도들을 정죄하는데에만 썼습니다. 현대는 어떨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명확하게 보여주셨고, 율법은 극복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죄는 말하지 않고 사랑만 말하며 방종하게 하는 이단교파들까지 생겨나거나, 기성교회들이 죄를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생겼습니다. 결국 사람이 중심이 되어서 사람이 듣고 싶은대로, 또 우월적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심판 모두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는 "종"의 자리였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인"의 자리에서 율법을 다스리고, 양심을 다스리고,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엄청난 변화를 겪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을 살펴보지요. 13절입니다. 

13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 무엇도 우리에게 명령하지 못합니다.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내 안에 예수가 있으니 그 누가 우리를 향해 정죄하고 심판을 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그 자유얻음을 가지고 방종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죄가 정죄하지 않습니다. 아니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내버려두거나, 우리 스스로를 스스로 자책의 수렁텅이로 몰아넣습니다. 자유를 주었지만,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안에 계신 예수를 양심의 기준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가 사랑하시며 인생을 사셨듯이, 우리는 사랑의 양심으로 채워져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적극적인 표현으로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한 것이지요. 14-15절입니다. 

14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15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의 양심에서 초급수준인 율법은 끝났습니다. 내가 그정도로 양심이 거룩해져서가 아닙니다. 내 안에 예수가 계셔주심으로써 우리의 수준이 율법을 넘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멀리하면 우리는 우리 본래의 수준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우리 마음의 중심, 양심에 모셔야 합니다. 그럼 예수는 어떤 양심이기에 우리 수준을 높이실 수 있는 겁니까? 
바울은 모든 율법의 요구사항은 "사랑하는 것"으로 종결된다고 말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었으니까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었죠. 사랑하는 사람에게 율법은 단지 과정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율법은 이미 풀어버린 문제와 같습니다. 예수는 율법의 답, 자기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함을 살아내셨습니다. 율법의 정답이죠. 그 정답이 우리 안에 있으니, 우리의 양심은 이미 율법을 풀어버린 양심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를 멀리한다는 것은, 사랑하지 못하는 양심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15절과 같이 "서로 물고 먹어 피차 멸망하게 되기까지" 갈 수 있음을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물고 먹어 피차 멸망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많이 봐왔습니다.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 우리는 스스로 멸망하게 됩니다. 회개의 기회가 있는 살아생전에 우리는 다시 사랑하러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듯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이뤄져야 하겠습니다. 예수의 양심이 교회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바울은 예수의 양심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16-18절과 같이 소개해줍니다.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성령과 육체의 욕심을 상대화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라는 양심을 붙드는 것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고, 예수라는 양심을 포기하는 것이 결국 나라는 죄인의 양심을 주장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육체의 욕심, 나의 욕심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는 서로 빛과 어둠입니다. 빛이 빛날수록 어둠은 사라집니다. 반대로 어둠이 짙어진다는 것은 빛이 사라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서로 대적하는 사이"입니다. 나의 죄성은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항상 건드립니다. 우리 안에 예수의 양심에서 떠나게끔 말이죠. 여러분이 성령을 따라 예수의 양심을 따라 살고자 하여도, 여러분이 자꾸 여러분의 죄성에 틈을 준다는 것은 "방을 밝히고 싶은데, 불키러 가기 싫은 게으른뱅이"라고 할 수 밖에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달란트를 줬음에도 땅에 묻어버린 종을 향해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부르셨던 것이지요. 이에 바울은 이런 권면을 우리에게 줍니다. 

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우리 양심에 예수를 둔다면, 성령 하나님이 인도해주시고 힘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 힘으로 우리는 율법의 수준을 넘어서게 됩니다. 율법 아래에 있게 되지 않습니다. 방에 불이 환해질 것입니다. 그 방에 손님들이 찾아오고, 풍성해지고, 기쁨이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과 지성, 양심 안에 예수의 사랑하심을 두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했던 예수, 이웃을 위해 희생했던 예수를 두십시오. 여러분의 풍성한 삶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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