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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_F/사사기_다시 주시는 은혜

사사기 21:16-25

by 우루사야 2022. 11. 29.

16회중의 장로들이 이르되 베냐민의 여인이 다 멸절되었으니 이제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얻게 할까 하고

17또 이르되 베냐민 중 도망하여 살아 남은 자에게 마땅히 기업이 있어야 하리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짐이 없으리라

18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 하니라

19또 이르되 보라 벧엘 북쪽 르보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쪽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도다 하고

20베냐민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포도원에 숨어

21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하나를 붙들어 가지고 자기의 아내로 삼아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22만일 그의 아버지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시비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하건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의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하매

23베냐민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춤추는 여자들 중에서 자기들의 숫자대로 붙들어 아내로 삼아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성읍들을 건축하고 거기에 거주하였더라

24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곳에서 각기 자기의 지파,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갔으니 곧 각기 그 곳에서 나와서 자기의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25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오늘도 다시 은혜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로 사사기서를 마치게 됩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그간 이스라엘의 영적타락에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습니다. 악함 가운데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각 지파가 레위인을 돌보지 못함을 우리는 사사기 마지막 2사건에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마지막 사건에서 이스라엘 총회가 얼마나 무기력한 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왕이 없으므로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스스로 자멸이었습니다. 요셉이 시험할 때 막내 베냐민을 어떻게 대하는지 볼 때, 각 형들이 서로 희생하며 아끼는 것을 보며 용서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뤄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의 타락과 자멸이라는 결과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실수를 일으킨 이스라엘 총회가 어떻게든 막아내보려고 하지만, 죄악을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막지 못합니다. 손을 댈때마다 오히려 상황이 악화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사기서를 다 읽은 저자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그 다음책인 사무엘서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무엘과 다윗, 솔로몬을 기대하게끔 합니다. 오늘 그런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제멋대로 실수를 만회해보려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16-18절입니다. 

16회중의 장로들이 이르되 베냐민의 여인이 다 멸절되었으니 이제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얻게 할까 하고17또 이르되 베냐민 중 도망하여 살아 남은 자에게 마땅히 기업이 있어야 하리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짐이 없으리라18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 하니라

불량배들을 옹호하면서 하나님의 총회를 무시했던 베냐민지파를 이스라엘 11지파가 모여서 심판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두 가지 맹세,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 또한 심판할 것이라는 것, 두번째는 베냐민 지파에게는 시집을 보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가지 모두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 아닌, 이스라엘이 제멋대로 만든 규칙이었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한 "악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그것이 잘못된 맹세라는 것을 알게 된 이스라엘 총회는 이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답을 기다리기보다 또는 말씀 속에서 헛된 맹세에 대한 잘못을 시인하며 속죄제를 드리기보다, 자신들 머릿속에서 생각해내는 방책을 냅니다. 첫번째가 야베스 길르앗을 쳐서 거기서 처녀들을 데려오는 것이었습니다. 600명밖에 남지 않은 베냐민 지파 남자들과 연결지어주는데 200명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이들은 또 다른 실수를 만들어내려 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기다릴 줄 아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용기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기도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과 기쁨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내 선택과 결정을 잠시 보류해두고 하나님이 인도해주시는 시간을 살아내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믿음이요 우리의 간증의 시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믿음이 없으니, 눈 앞에 보이는 것에 이리저리 끌려다닙니다. 내가 어떻게든 만회해보려고 합니다. 평생 그렇게 내 힘으로 살아온 인생일수록 하나님께 드리지 못합니다. 내 손안에 쥐고 흔들어야 직성이 풀리기에, 결코 기다리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하나님 곁으로 가기 전에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기도하며 말씀을 읽으며 시간을 살아내며 하나님을 기다릴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그 시간을 살아내지 못하는, 미성숙하고 무질서한 상태로 다른 방책을 내게 됩니다. 19-21절입니다. 

19또 이르되 보라 벧엘 북쪽 르보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쪽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도다 하고20베냐민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포도원에 숨어21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하나를 붙들어 가지고 자기의 아내로 삼아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그들이 내놓은 방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절기를 지키러 나온 처녀들을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보쌈이라는 고대결혼문화가 이스라엘에 있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어쨌든 이것이 허용가능했으니 이런 아이디어를 내놓았겠지요. 게다가 22절에서 이들은 보쌈당한 가문에게 대답할 답까지 준비하는 치밀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22만일 그의 아버지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시비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하건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의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하매

여기서 대답이 무엇입니까? 보쌈당한 여인들이 자신들의 가문을 탓할 때 피할 길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직접한 것이 아니라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스스로 한 일이기에 너희에게는 탓이 없다고 말하라고까지 하는 겁니다. 이것을 두고 이런 속담이 생각납니다. "눈가리고 아웅거리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수를 덮기 위해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립니다. 베냐민 지파가 없어지지 않기 위해서 야베스 길르앗을 칩니다.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러 나오는 여인들을 보쌈해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스라엘 총회는 명분을 이리저리 내놓으면서 자신들에게는 죄가 없으면서도,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중재안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사사기 저자는 이것을 기록해주면서 읽는 독자들에게 말해줍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머리를 쓰지만, 이것이 사사기 마지막 사건에 기록될 만큼 이스라엘의 총체적인 영적무질서와 타락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말이죠. 

여러분, 우리 신앙이 명분만 있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는 그런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속이 꽉 차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있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한해, 이번 주를 돌아보실까요? 여러분 인생에서 하나님은 살아계셨습니까? 어디 계십니까? 분명 성경은 하나님이 임마누엘로, 여러분과 함께 하기 위해서 역사해오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 직장, 이웃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고 계십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지금 이스라엘의 총체적인 영적무질서와 타락과 별반 다를게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신앙을 두고 로마서 2장에서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될 것이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인이라는 증표를 몸 밖에만 받을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과 생각과 내면에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명분이 아니라 우리의 실생활에 하나님의 임마누엘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 23-25절입니다. 

23베냐민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춤추는 여자들 중에서 자기들의 숫자대로 붙들어 아내로 삼아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성읍들을 건축하고 거기에 거주하였더라24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곳에서 각기 자기의 지파,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갔으니 곧 각기 그 곳에서 나와서 자기의 기업으로 돌아갔더라25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렇게 베냐민 지파와의 내전이 마무리지어집니다. 엉망진창으로 끝맺게 됩니다. 이 베냐민 지파 속에서 누가 태어납니까? 이스라엘이 사사정치제도에서 왕정제도로 바뀌게 되는데, 그러면서 첫 왕 사울이 태어나게 됩니다. 내전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600명의 베냐민 지파 남자들,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억지로 끌려온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 사울이 태어나게 됩니다. 일은 마무리되었지만, 영적타락이라는 배경은 그대로 후손들에게 물려주고야 마는 것이지요. 이 속에서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왕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대표적인 왕으로 우리는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사기 마지막 2사건에서 단지파가 후손들에게 물려준 땅을 기억해봅니다. 그리고 오늘 베냐민 지파가 물려준 사건을 기억해봅니다. 이 두지파는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물려주고야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가지 가르침이 더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죄가 죄를 낳고, 사망에 이르게 하는 역사를 반복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그런 존재입니다. 스스로 결코 죄악을 컨트롤 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속에서 일하십니다. 그 속에서 소망을 만들어내십니다. 그 속에서 죄를 끊어낼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베풀 구원자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은 구원자 예수를 닮은 사람들을 다시 한번 보내시면서 이스라엘을 이끌어오셨던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네 인생에 분명한 구원자가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사사요, 말씀을 알려줄 선지자요, 우리를 지킬 왕이 되어주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얄팍한 지혜가 아니라 우리의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계시고 나를 위해 미리 역사하고 인생을 인도하고 계심을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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