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AYAMEMORY
주제설교_F/삼각관계 매듭짓기_십계명A

매듭짓기05. 살아있는 이름, 예수 그리스도

by 우루사야 2022. 7. 16.

본문 : 사도행전 4장 1-10절
제목 : 살아있는 이름, 예수 그리스도


1. 서론
1) 예화
요즘 토레스라는 자동차가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비슷한 크기의 현대의 스포티지라는 차량이 새로 나왔을 때 사전예약이 2만5천대가 안되었는데 토레스는 훌쩍 뛰어넘어 3만대를 예약을 받게 되었죠. 그런데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이 있습니다. 토레스라는 차량을 만든 회사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쌍용입니다. 이 회사가 지금 여기저기 외국회사들에게 팔렸다가 버려졌다가를 반복하던 회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다른 회사에게 팔리기 직전이기에, 인기가 좋은 차를 만들어내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는 것이죠.
한편으로 이름만 들어도 안정감을 느끼는 회사가 있기 마련입니다. 저희 가정이 이제 결혼한지 10년이 넘으니 가전들이 말썽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아끼고 잘 써서 지금까지 가전들을 잘 바꾸지 않고 지금까지 오고 있는데, 가장 많이 쓰는 가전이라서 그런지 세탁기가 신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탁기를 알아보려고 유튜브 후기들도 찾아보고 비교도 하면서 이것저것 따져 보았습니다. 결국에는 삼성으로 좁혀지더군요. 그간 사용해온 신뢰감때문인지 큰 변화없이 쓰던 메이커를 택했습니다. 물론 저는 엘지를 말했지만, 안방마님말에 순종했습니다.
더 진지하게는 쓰시는 은행, 투표하는 정당, 선호하는 티비채널 등이 결국 여러분의 이름이 됩니다. 지금 우리는 윤석렬정부라는 이름 안에 있고, 더 크게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윤석렬정부가 결정하는 혜택을 누리고, 대한민국이 주는 혜택을 누립니다. 만약 그 이름들이 잘못하면 우리는 혜택이 아니라 손해를 보게 되겠지요. 요즘 스리랑카가 난리입니다. 대통령의 경제정책의 실패로 물가가 오르고 화폐가치가 매우 떨어져 모든 생필품이 2배가 넘게 되었고, 결국 전기를 공급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지요. 



2) 주제
우리는 어떤 이름 안에 살고 있고, 그 이름 안에서 우리의 생활이 결정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나의 삶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고, 내가 주도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국 어떤 이름 안에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미세하게는 성별이나 가정이 그러할 것이고, 크게는 사회와 국가를 통해서 우리의 삶의 여건이 결정이 됩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하고 가장 큰 영역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이라는 영역입니다. 생각, 의지, 영혼, 감정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마음이 어떤 이름 안에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잠언 4:23은 "무엇보다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력이 여기에서 난다"라고 말합니다. 네 마음을 어떤 이름 안에 둘건지 심사숙고해야한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한 후에 육신은 올리시고, 영혼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실 수 있도록 예수의 영,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내 마음에 예수와 같이 살면서 느끼는 감정, 생각되어지는 생각, 의논하며 같이 내리는 결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 감정, 의지가 예수라는 영혼의 대통령이 주고 있는 생명과 동기부여, 기쁨을 받아 살아가라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식기도에만 예수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과 중요한 판단에서 예수의 법, 예수의 혜택, 예수의 보호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본문
우리는 지난 주에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의 3계명을 살펴보며 하나님은 하신 일로 기억해야함을 나누었습니다. 그중 가장 큰일이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고 영광임을 기억하며 오늘 이 말씀을 숙고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1-3절 / 현실적인 불신앙
1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2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3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지금 이시기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이 육신이 아니라 영혼으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 마음에 계신 직후였습니다. 제자들은 이전까지 예수님이 왕이 될 줄 알았지만 죽으셨고 도망다녔습니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영으로 오시니 그들은 마음에 용기와 지혜, 기쁨을 얻었고 다시 모여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그런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이 예배당에 들어갈 때였습니다. 예배당이 컸기 때문에 들어가는 문이 많았는데 그 중에 가장 아름답게 꾸며졌기에 아름다운 문이라고 불렸던 미문으로 들어가던 찰나였습니다. 거기에는 선천적으로 하반신마비를 가진 사람이 정기적으로 거기서 구걸을 하고 있었고,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구걸을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이 사람도 유대인이었습니다. 종교의 중심지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성전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아름답게 꾸며져서 사람들이 몰리는 그곳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떤 이름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까? 2절을 다시 보실까요? "2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누가는 이 사람에 대해서 묘사하기를 나면서 못걸으며 평생을 산 사람이라며 과거의 한계 그대로 사는 사람으로 말합니다. 더욱이 두번째로 그나마 타인들이 자신의 하반신역할을 해주고 자신 스스로는 상반신만 쓰는 현재를 살아가는 자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구걸하기 위해 미문에 앉아 자신의 미래를 구걸로 살아가고자 하는 자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과거에 갇혀, 현재에 갇혀, 암울한 미래에 갇혀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공간이 어디였습니까? 하나님이 계신 성전 앞이었습니다. 신앙인이 가장 많이 몰려오는 미문 앞이었습니다. 기도가 넘쳐나는 곳, 찬양이 넘쳐나는 곳, 교제가 넘쳐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앉은뱅이에게는 상관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어쩔 수 없지"는 생각, 감정, 포기의지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신앙인데, 내가 다니게 된 교회가 이런 상황이니까, 내 환경이 이러니까라는 "어쩔 수 없지" 신앙이 우리의 신앙상태는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제자들도 사실 처음에 그런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다들 도망쳤지요. 어쩔 수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어요. 망할 줄 알았는데 천만 다행이지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겠다는 거 아닙니까? 다시 이전처럼 예수님이 죽었을 때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어쩔 수 없지요.
우리의 신앙같아요. 힘들어요. 그러다가 주일예배에 와서 가끔 은혜를 받습니다. 기쁜데, 다시 은혜가 사라집니다. 그럼 다시 힘든 상태로 돌아가요. 그럴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지"하고 마는 것입니다. 누구의 이름에 있는 겁니까? 어쩔 수 없지라고 한계를 지어버리는 나라는 우상 이름 아래에 있습니다. 아름다운 미문 앞에 앉아있는 앉은뱅이처럼, 좋은 시설과 좋은 교회, 좋은 음향 앞, 그것이 아니라도 예수이름 앞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나 자신이라는 우상"이라는 이름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2) 4-7절 / 비현실적인 신앙!
제가 누린 축복 중에 하나가 여러교회를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초소형 교회, 개척교회, 100년된 교회, 초대형교회, 중형교회이면서 침체된 교회 등 많은 교회를 접했습니다. 여기서 깨달은 것 한가지는 모두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든 힘들고 어렵고 사람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 중간중간 굉장히 저절로 사역이 되고, 저절로 전도가 되고, 저절로 목회가 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중고등부 사역을 할 때였는데 50명이 100명이 6개월만에 되던 때였습니다. 전임자가 너무나도 힘들게 사역했던 부서였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고민해보았습니다. 답은 정해져있습니다. 순수하게 예수님을 믿었던 그 아이들이었습니다. 한 친구가 전도축제날 교회에 데려오고 싶은 친구를 한달동안 이야기해서 마침내 같이 오기로 되었는데, 그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이 친구가 갑자기 아파서 일어날 수가 없는데, 자기가 꼭 이 친구를 교회에 데려가야 한다고 떼를 쓰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친구에게 "하나님이 너의 마음 다 아신다 괜찮다. 하나님이 이 친구 책임지고 계신다."라고 말해줬던 기억이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십대들의 순수한 의지와 결단이 저는 부흥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교회는 힘듭니다. 어쩔 수 없지를 뛰어넘어 순수한 신앙이 살아남는 것입니다. 본문 5-7절을 읽어볼까요?

4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5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6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7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베드로와 요한은 줄 것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특히 그들은 "은과 금"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에 다른 것을 섞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아론은 하나님이라는 이미지에 소와 금으로 덧붙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렇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럼 이 사람들은 어떤 이미지로 자신들이 믿는 신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요?
사실 이 사람들들도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딘. 그런데 예수님이 영이 그들의 마음에 오신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21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24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33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2장)

이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 이름은 성부 하나님께 받아 높은 권한을 받은 성자 하나님이 내려주신 성령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24절에 보니 그 하나님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지"라는 생각으로 여러분이 계시다면 여러분의 신은 아론의 우상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사망에 도저히 매여있을 수 없는, 살아움직이고, 우리를 생동력있게, 동기부여가 가득하게, 주변을 평온하게, 힘있게 하는 이름이 있다"고 말이죠. 예수의 영이 여러분 가운데 살아있음을 인정하십시오.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어쩔 수 없다는 의식과 사고방식,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여러분의 우상숭배, 여러분의 힘없고 움직일 수 없고 아무 역사도 할 수 없는 피해의식으로 가득찬 우상은 여러분의 인생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습니다. 그냥 여러분의 힘으로 살다가 여러분이 택하는 가장 좋은 지옥의 자리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예수의 이름을 거절하고, 성령 하나님의 연합을 거절하는 자의 결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이름, 예수가 살아낸 그 이름, 성령이 지금 우리 안에서 증거하고 있는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3) 8-10절 / 새생명의 신앙
십계명 3계명을 이 시점에서 좀 더 살펴보아야하겠습니다. "7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거꾸로 하면 여호와의 이름을 똑바로 부르라. 여호와의 이름을 똑바로 부르는 자에게 복을 주리라. 그런데 이 말이 어디서 비슷하게 들리지 않았습니까? 베드로가 위에서 한 말 아닙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이 임하리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것이 생명력을 준다고 십계명은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의 이름을 가둬놓고 식사기도 주문처럼 외우면 딱 그정도로만 쓰는 것을 넘어서서 "용서받지 못하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기도제목에만 국한시켜놓고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의 이름을 신의 이름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죠. 

그럼 예수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현대의 이름을 택하면 현대차를 사는 것이고, KBS 이름으로 산다면 뉴스를 그 채널만 보겠지요. 우리의 생각과 감정, 사고방식이 그것들이 제공하는 것만큼에서만 누리는 겁니다. 예수의 이름을 성경이 제시해준만큼 산다는 것은 예수가 한 일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 예수가 하신 일, 성령이 하신 일을 기억하며 그 이름으로 사는 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가 무엇을 했습니까? 예수가 병을 치유했습니다.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죄사함을 명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아나게 했습니다. 죄사함을 위해 십자가에서 처벌을 받으셨습니다. 무덤에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 예수가 영으로 우리 안에서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살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이름이 제공해주는 놀라운 혜택으로 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천사들도 너무나도 바라고 흠모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수종드는 종이지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것은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놀라운 축복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가 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 예수가 내 안에 있으니 그것을 행하실 줄을 믿고, 그 예수가 약속한 말씀들이 내 안에서 이뤄질 것을 믿는, 그 이름으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나은 앉은뱅이의 모습을 보십시오. 8-10절입니다. 

8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9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10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믿어 일어났던 그 앉은뱅이는 걷고 뛰며 찬양하고 찬송합니다. 그 주변인들이 놀라워합니다. 모두 어쩔 수 없는 인생이라고 여겼던 그 인생이 한계를 뛰어넘어 살아있고 생명력 넘치는 인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그 이름으로 여러분의 삶이 사랑이 넘쳐나고 용서와 화해와 평안과 화평, 용기, 지혜, 축복이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3. 결론
솔제니친이라는 러시아의 소설가가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인생의 첫 25년은 인간다운 삶을 산다. 그 다음 25년은 말처럼 일을 한다. 그 다음 25년은 마음만 있고 몸이 안따르니 소리만 내는 개와 같다. 그리고 나머지 인생은 누군가의 구경거리가 되는 원숭이와 같다. 이것은 노년에 대한 비하이기 보다는, 인생의 고달픔과 무거운 짐, 한계가 가득한지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네 인생은 우리의 이름으로는, 나의 이름으로는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인 것 같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사십시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십시오. 예수가 하신 일을 따라 가십시오. 예수가 이뤄놓으신 일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이 말, 개, 원숭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놀라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곳이, 여러분이 기도하는 곳곳이, 여러분이 위로하는 곳곳이 천국이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한낱 사라져버릴 이름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이 가는 곳곳마다 이뤄질 새생명, 위로, 사랑, 천국, 교회가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 추가설명
예수님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고 말씀하시며 "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안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나중에 돌아오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거역하면 언제든 용서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 말과 십계명 3계명을 함께 보십시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자는 죄없다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용서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성령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을 동등하게 볼 수 있습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거절하는 것은 용서해줄래야 용서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결정과 판단에 있어서 여러분이 예수 잘 모르니까 안믿어! 라고 말하다가 회개하면 받아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예수님이 어떤 이름인지, 어떻게 역사해오셨는지 다 알면서도 거절하여 결국 나라는 우상을 섬기는 것은 결국 용서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것이야말로 결국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니까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