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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YAMEMORY
주제설교_F/삼각관계 매듭짓기_십계명A

매듭짓기3. 나뉘는 마음, 나누는 마음

by 우루사야 2022. 6. 30.

 

 

 

본문 : 출애굽기 32장 1-10절
제목 : 나뉘는 마음, 나누는 마음

1. 서론
1) 예화
한 사람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가 개봉했었습니다. 참 대단한 분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분은 사생아였고, 2살에 고아원에 맡겨졌으며, 앵벌이를 잘해서 앵벌이 행동대장까지 지내다가 전과 3범이 되었다고 합니다. 출소하여 웨이터 일을 하다가 사기를 당해 세상을 향한 분노로 가득차 한 가게에 들어가 분신자살을 기도하다 결국 감옥에 다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안에서 고아원 아이들에 관한 책을 접하게 됩니다. 자신의 상황과 너무 닮아있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게 되었고, 한 고아에게 첫 기부를 하고 편지를 받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내 동생을 웃게해주신 아저씨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평생에 처음 듣게 됩니다. 그 이후에 7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5명의 고아들을 돕다가, 이내 배달사고를 당해 사망에 이르고 맙니다.

그런 그의 인생을 주목하게 된 윤학렬 감독은 영화로 만들고 뉴스에 나와 이렇게 말합니다. "1.5평 고시원에서 살아가는 분이셨지만 절대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300만원의 유동자금을 통해서 매일 2-3만원 소득을 얻어 가난한 아이들을 도왔습니다. 과일을 3-4개 사서 고시원에서 우울한 분들에게 나누었습니다. 책상에는 영화티켓이 수북히 있었는데 매주 2편씩 꼭 영화를 챙겨보는 분이셨습니다. 절대 가난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김우수씨의 인생에서 많은 이들이 물음표같은 세상에서 느낌표를 얻었던 이유는, "가진 것이 없어도, 대단한 사람이 아니어도, 환경이 갖춰져있지 않아도 각팍한 이세상에서 마음을 나누는 인생"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겁니다.
김우수씨와 제 자신을 두고 고민해봅니다.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무엇으로 보나 제가 그 분보다 가진 것이 많고 누리는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분의 인생은 넉넉한 인생인데, 우리네 인생은 계속 가지고 누려도 왜 이리 공허할까요? 우리는 여기저기에 마음을 두며 넓히는데만 관심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깨지고 새고 있어도 잘 모르고 관리하지도 않는듯 합니다. 그러니 채워지지가 않고 계속 비어있지요. 김우수씨의 마음이라는 그릇은 작지만 차고 넘쳐 주변으로 흘릴 수 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우상에게로 나뉘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인 다른 사람에게 나눌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나를 우상숭배하며 내가 원하는 우상들을 세우는 인생을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모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차고 넘치는, 크지 않더라도 깨지지 않고 단단하여 차고 넘쳐 주변에 흘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본문입니다. 지난 주에는 절반 중에 앞부분을 보았죠. 아론이 금과 송아지로 하나님을 자신의 생각대로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들지 말고 발견해야 합니다. 오늘은 후반부입니다. 아론이 그렇게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에게 절하고 섬기게끔 합니다. 십계명 2계명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만 골라서 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아론을 보며 나의 모습은 아닌지 살펴보며 우상숭배를 매듭짓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묶인 매듭을 풀 수 있는 저와 여러분되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질투의 하나님
제가 청년들에게 관계의 7단계를 말하곤합니다. 남과 남이 서로 책임질 정도가 있고, 연애상대가 서로에 대해서 책임질 정도가 또 다르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책임의 과정을 한단계씩 거쳐가면서 조금씩 발전하는 관계 속에서 서로의 인생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마지막에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 기도응답받았다고 결혼하려 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이와 마찬지로 하나님은 성경에서 내내 우리와 결혼한 부부의 사이로 설명하시곤 했습니다. 그만큼 가장 크고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서로 대해야 하는 관계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약 그것을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한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십계명 2계명에는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출20:5a)
하나님은 왜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하신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3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번째,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만드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는데, 그 형상 중 하나가 감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감정"이라는 것을 가지고 만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설명한 성령의 열매들을 보시면 사랑, 희락, 화평, 자비, 충성, 온유 등 모두 감정에 관한 것들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일대일이라는 관계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지길 바라고 계십니다. 1계명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일대일의 관계에서 서로 "사랑의 감정"을 누리길 바라십니다. 삼각관계로 마음이 나뉘어지면 질투하시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세번째, 그런 점에서 여기서 질투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더 집중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긍정적인 단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약속이 되어있는 사이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우리의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6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상대에게 질투하시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1,2계명에서 하나님은 다른 신을 언급하셨습니다. 사실 다른 신이나 우상은 실체가 없습니다. 우리가 귀신이라고 여기는 것들도 사실 보면 하나님을 수종들기 위한 천사가 타락하여 사단 마귀가 된 존재들입니다. 결국 다른 신이나 우상은 내가 마음을 두기 편한 상대를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럼 누구로 말미암아 질투하신다는 말입니까? 결국 우리의 마음이 나뉘어진다는 것에 질투를 느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카나가 질투인데, 이 단어의 다른 뜻으로는 열심 열정 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른 것에 열심과 열정이 넘쳐나 다른 것을 신으로 여길 때 하나님은 질투를 느끼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가 관건입니다.
제가 지난 주에 우상을 찾는 팁으로 나의 에너지, 재정, 시간을 어디에 많이 쓰고 있는지를 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안에 나의 신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죠. 여러분이 헌금을 하고 주일에 예배를 드리며 힘을 들여 지체들을 섬깁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이 신앙생활 안에 계심에 대한 믿음때문이죠. 어떤 분은 부득이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직장과 일상, 가정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기도 합니다. 어쨌든 각자가 하나님을 신으로 모시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재정과 에너지, 시간을 쓰며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나라는 우상"을 위해서 그것을 교회에서 쓰기도 합니다. 나라는 우상을 교회지체들 속에서 인정받게 하기 위해 헌금을 합니다. 교회행사에 힘을 쓰고 적극 참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라는 신을 세우기 위해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나라는 우상은 그렇게 교회, 가정, 직장, 일상, 지역사회, 인터넷 가상공간 등 어디에서나 세워질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떤 신을 모시고, 어떤 신에게 마음을 두며, 어떤 신을 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나뉘어진 마음을 질투하고 계십니다.
2) 교주가 된 아론
오늘 본문을 보면 아론의 행동이 얼마나 마음이 나뉘어진채로 행동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을 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주시며, 질투하는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론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나뉘어져 있었어요.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만들고, 자신의 관점에서 신앙을 생각하고, 자신의 기준에서 생각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금송아지"라는 괴물우상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아론은 더 강력하게 자신의 나뉘어진 마음을 표현합니다. 4-6절입니다.
그는 자신의 나뉘어진 마음을 표현하는 우상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제멋대로 그 우상을 향해 "너희의 신이다"라고 선포합니다. 아론은 그 앞에 제단을 쌓아 예배드리게 합니다. 또 그 다음날을 제멋대로 여호와를 기념하는 날로 지정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고 섬기지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론은 십계명 2계명을 전면적으로 반박하였습니다. 교주의 탄생입니다. 아론은 백성을 위해서 그랬다고 하지만, 결국 모세의 비어있는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일인자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후에 모세가 질타를 하자 아론은 "이 백성이 본래 악한 걸 알지 않나! 그들이 요청하기에 내가 금을 모아 불에 던졌더니 금송아지 형상이 나왔다네"라고 거짓핑계를 댔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아담과 하와에게 거짓말을 하고 하나님을 비난했던 사단과 아론이 얼마나 닮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해주는지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만의 우상을 세워 그 우상에 온 마음을 집중시켜 하나님께 가야 할 마음이 나뉘어지게 합니다. 우리는 나만의 종교의 교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인인 것 같지만 그 생활 안에 실체를 보면 자신이 왕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드러날 때가 언제입니까? 오늘 아론과 같이 청중이 무언가 증명해내라고 실력을 보여달라고 요청하는 결정적일 때입니다. 나라는 사람을 증명해야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지 아니면 나라는 우상을 드러내는지 여실히 드러납니다. 여기서 참신앙과 거짓신앙이 나뉘는 것이고, 진실신앙과 이단신앙으로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이단은 우리와 비슷한 것 같지만 결과가 전혀 반대입니다. 요즘 한 연예인이 성경공부영상이나 책발간을 엄청나게 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읽어보기도 하고 보기도 했습니다. 참 말 잘하더군요. 성경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장 중요한 것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됨과 지체됨이었습니다. 머리로는 예수님의 대속, 영원과 천국, 부활의 교리 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머리되심의 질서와 예수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예수님의 의롭게 하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믿는 교리"로 결론을 내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구원파적인 결론이었는데, 예수가 주시는 죄에서의 자유함이 아니라 끝까지 그 죄를 기억해내고 죄사함의 고백을 해야 한다는 요구를 임종 전의 한 성도에게 말한 부분에서 참 안타까움을 가졌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힘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교주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단도 예배를 강조합니다. 섬김을 강조합니다. 문제는 출발점입니다. 어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 예배와 섬김으로 나아왔냐는 것입니다. 이단에도 사이비에도 예배가 있고 섬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아론과 백성들도 예배를 드리고 기뻐 뛰놀며 교제를 나눕니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부패했고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질타하고 진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론은 자신을 증명하려고 여호와를 이용했습니다. 여호와를 금송아지 모양으로 만들었고, 여호와의 절기를 제멋대로 그 다음날로 삼았습니다. 자기가 만들고, 자기의 결정을 확고히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렇게 아론은 자기 자신을 세우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했던 것입니다. 혹시 이것이 나의 모습은 아닙니까? 내가 세운 나라는 인생과 나라는 우상, 그리고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해 온갖 치장으로 꾸며놓은 내 인생. 그것이 과연 진짜 나의 모습입니까? 신앙인인척, 좋은 사람인척, 성실한 현대인인척. 나의 가면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 그대로를 드러낼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3) 마음을 모아 드리는 절과 섬김
이제 결론을 맺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나뉘어지는 것을 질투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론은 그런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결과 자신의 인생을 세우기 위해 어느샌가 교주가 되어있었습니다. 자신이 세운 종교우상물에게 백성들에게 절하게끔 시킴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고 했지요. 하나님보다 위에 서려고 했던 그였습니다. 결국 아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발견하고 그 안에서 해결점을 찾았어야 했습니다.

한 때 성남의 한 대형교회 목사님이 영성일기라는 것을 유행시키셨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생각이 났을 때 그것이 예수님의 생각인지 내 생각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 결국 대답을 못하셨어요. 여러분.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가 발견하고 높여야 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배하고 절하고 섬기는 겁니다. 성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우리를 십자가로 구해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지금 가장 신비한 연합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찬양하고 예배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질문은 위험합니다. 그 앞에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이라면,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라면, 나와 한 몸이신 예수님이라면, 내 머리되시는 예수님이라면, 부활하셔서 나도 함께 부활할 것이라고 약속하신 예수님이라면…이라는 수 많은 예수님의 모습이 있는데 단순한 내 생각으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에 대해서 고민한다면 결국 내가 만든 이미지의 예수님을 통해서 내 행동을 합리화시킬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그 밖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너무나도 많은 일들을 소개해주고 있고, 우리가 어떤 하나님의 모습과 하신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높이며 예배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을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의 결과들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풍성하게 살아가며 그래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만을 예배하는 삶입니다.


3. 결론
이번 주에 여러가지 교회업무나 일반업무에 장마까지 겹쳐서 바쁘게 보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처리하는 것에 급급하게 보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순간 드는 생각이 "아, 내가 뭐하느라 이렇게 바쁘지, 너무 의미없는 시간들을 보낸 것 같아…"였습니다. 아이들이 1시간 후에 귀가를 하는데,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책도 펼쳐보고 타자도 쳐보았습니다. 그런데 마음만 급하지 결국 아무것도 못했고, 아이들고 함께 집으로 올라갔습니다. 하루를 아무것도 못했다는 생각이 많아지니 허탈했고, 그 사이에 아이들이 이런저런 요청들이 버겁게만 느껴지더군요. 이내 아이들에게 짜증을 부리는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김우수씨를 생각해봅니다. 왜 그 사람은 일면식도 없는 고시원 이웃들에게 가난한 가운데 과일을 일부러 사서 나눠주며 우울해 보이는 그들에게 마음을 나눌 수 있었는데, 저는 제 자식들에게도 곤고하고 메마른 마음으로 대했을까요?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제가 제 인생을 완성시키신 하나님을 잊어버렸나 봅니다. 성경은 분명 우리의 인생을 완전하게 예수님이 이뤄놓으셨다고 약속해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모르니 교회일 열심히 해놓고 마음이 허전해서 아이들을 구박하는 제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최고의 듀엣으로 만들어주신 하나님, 나를 완전한 인생으로 만들기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 완벽한 천국으로 가게끔 지금도 내 안에서 지혜와 용기, 소망, 기쁨을 주고 계시는 성령님. 그 분을 고백하고 그분으로 생각하고 그 분으로 말하시며 이번 한주 우상과 매듭짓고, 얼마든지 나눌 수 있는 마음으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JoNli5qVX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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