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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_G/칼럼

염려를 어떻게 할까?

by 우루사야 2022. 6. 8.

6월 7일 맥체인 성경읽기 

신명기 11장, 시편95-96편, 이사야 39장, 요한계시장 / 개역개정

휴일을 맞이해 아이들과 수영장을 다녀왔다. 그러다 아이 얼굴을 봤다. 모자를 쓰고 목에 조여져있었다. 그 안으로 마스크가 귀에 걸쳐져 있었다. 그리고서야 그 위로 물안경을 쓸 수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아래에는 구명조끼가 입혀져 있었고, 수영장용 신발이 또 신겨져 있었다. 날씨가 좀 더 더웠으면, 아마도 얼굴에는 썬크림 범벅이었을 것이라. 그 광경을 보며 드는 생각이 '뭐가 이리도 많냐'였다. 내 자식이라 내가 챙겨서 해준 것이지만 참 챙길 것도 많았다. 과학이 발전이 됨에 따라 내가 알게 되는 사실도 많아졌다. 그리고 함께 늘어난 것이 염려인듯하다. 알게 된 사실로 함께 염려가 따라오니 나의 자녀의 몸에 걸쳐진 것이 저렇게 많겠지. 30년 전 내가 수영장에서 놀 때, 아니 50년 전 우리 부모님세대가 개울가에서 놀 때를 생각해보면 참 육아가 더 힘들어지는 듯하다.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신명기 1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너희자녀가 보지 못한 이적"이라고 말씀하시며 눈으로 직접 이적들을 본 세대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10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11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1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애굽에는 나일강이라는 큰 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밭에 물을 대기 위해서는 수로작업이 필수였다. 더욱이 장마철이 되면 물이 범람하기 때문에 도랑을 어떻게 파느냐가 풍년이라는 성패의 중요한 요소였다. 이것은 어느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물이 많아도 걱정 물이 적어도 걱정이다. 그래서 밭을 강 가까이 두기는 하지만, 강물이 넘처날 것을 대비하는 장치들을 두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새로 주시는 땅은 전혀 다른 차원의 땅이다.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다.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어 물을 산과 골짜기가 저장해준다. 물을 내기도 하고, 물을 담아두기도 한다. 그것을 모세는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다"고 표현하였다. 그렇기에 반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길 시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다.(16) 인생은 있어도 염려 없어도 염려이다. 염려의 인생이다. 왜일까? 스스로 해결책을 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스로 계셨던 하나님만이 가능하신 일이다. 그래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붙어있어야 해결책을 얻을 수 있다. 먼지, 흙, 땅의 것으로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은 결국 수면 위에서 운행하셨던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스림을 받는다. 물과 성령으로 통치를 받음으로써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늘이 땅을 덮어 모든 것이 끝나고 심판받는 날까지 염려없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한 곳에서 정착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자녀를 위한 최고의 길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모세는 권면해준다. "21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의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과 같으리라"

요즘 우리나라의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보면 반만년 역사 속에서 이런 시기가 있었는가 싶을 정도이다. 물론 2천년 주기설을 말하는 이들은 2천년 전 고려가 무역의 중심이었다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한된 지역 한에서의 영향력이었다. 지금 저 남미에서부터 울려퍼지는 "코리아"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비교가 불가하다. 그런데 나는 다음 구절에서 또 다시 염려함이 생겼다. 

23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차지할 것인즉24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의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서해까지라

한국의 위상이 과연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100년 전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외치며 이 나라 이 민족의 위기 속에서도 교회와 신앙을 지켜온 선대들을 생각해본다. 지금 우리는 어느 길로 가야 할까? 세계 곳곳에서 한국인이 밟는 곳마다 칭송이 이어진다. 어느샌가 우리나라가 추월하지 못할 것 같았던 선진국들보다 경제규모나 국방력이 높아진 때가 되었다. 23절의 전제조건은 18-20절까지 "하나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를 흡수하는 땅으로 바뀌기도 하고, 강대국들을 몰아내는 국방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녀가 대대손손 한 곳에 정착하여 평안을 누리게 하기도 한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염려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무색해진다.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이적을 모두 확인한 출애굽의 세대들의 문제는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9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10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시95) 성경은 그런 이들을 향해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고 말한다. 마음부터가 틀려먹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마음부터 닫아놓고 있으니, 아무리 말씀과 이적을 주어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을 계속해서 시험하려고 하는 것이다. 염려는 결국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져다 쓰는 것"이다. 나를 지키기 위해,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를 세우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5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13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시96) 결국 나는 어디를 바라보며 염려하고 의지할 것인가에 대해서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위인으로 칭하던 히스기야를 보라.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을 두고 계속 해서 하는 말이 무엇인가? "내 궁전, 내 창고"였다. 자신을 높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사신은 히스기야의 병세때문에 왔다. 히스기야가 말했어야 했던 것은 하나님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것을 어떻게 하셨는가? "6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7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히스기야에게 말씀과 이적이 주어져도, 자신을 높이려 하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그의 것을 다 가지고 가셨던 것이다. 맨 몸만 남게 하셨다. 그 몸을 살려주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히스기야였다. 결국 그는 인정한다. 드라마바이블에서는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낭독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통탄의 신앙고백이었으리라. "8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자녀들이 다 포로로 앞으로 잡혀갈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하는 말이 감격스러울 순 없지 않은가. 그렇다. 결국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보호해주기 위해 베푸신 이적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표자로 오셨다. 요나의 기적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심정이 담겨져 있는 부활의 기적을 베푸셨다. 그 예수는 우리의 염려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그 분을 따르는 것 외에는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 그 분은 스스로를 인자라고 칭하셨다. 신이 아니라, 왕이 아니라, 머리 둘 곳이 없는 인자라고 하셨다. 우리는 그 분을 따라야 한다. 그 분의 말씀을 청종해야 한다. 그 분을 따라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겠다. 그것이 염려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길이리라. 

위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마침내는 마지막날이 올 것이다. 그 때 사람의 얼굴을 한 자들이 심판할 것이다. 모든 것을 갉아먹고 해칠 수 있는 자들이 심판날에 나타날 것이다. 계시록에는 그들이 "얼굴은 사람과 같았"다고 말해준다.(계9:7) 그들은 하나님의 도장이 찍히지 않은 자들만 해치라는 지시를 받았다.(4) 이 염려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염려를 받아들일 것인가. 오늘 나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작은 염려를 주님께 드려보자. 그러면 위로와 사랑의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심이 염려를 덮을 것이다. 물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덮는 것이다. 계시록을 보자. 

4메뚜기떼는 땅의 모든 풀과 나무는 해치지 말고 다만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들만 해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7그 메뚜기떼의 모양은 전쟁 준비를 한 말들 같고 머리에는 금관 같은 것을 썼으며 얼굴은 사람과 같았습니다.(계9장)

종말의 때까지 우리는 인자와 같이 머리 둘 곳이 없는 자를 따르느라 세상의 염려는 항상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람의 얼굴을 한 심판의 사자들이 또 몰려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없는 자들에게만 다가선다. 전쟁에 지금이라도 뛰어 들어가려는 모습을 하고 세상을 다니겠지만,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가정들의 평온함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어떤 종류의 염려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 되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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