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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_F/하나님의 윤곽_가정과 삼위일체

공동체06. 하나님의 윤곽, 화해

by 우루사야 2022. 6. 3.

본문 : 창세기 45:1-8  제목 : 하나님의 윤곽, 화해
1. 서론
1) 오해와 화해
오해와 화해라는 단어에서 "해"자는 깨닫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해는 서로의 생각이 어긋나는 이해를 말합니다. 반면 화해는 서로의 생각이 맞닿아 서로를 이해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서로의 생각이 어떤 위치에 또 어떤 방식으로 있느냐에 따라서 오해가 될 수도 있고 화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 가장 오해가 많이 등장하는 곳은 어디일까요? 바로 "선거"입니다. 이번 선거에서도 수 많은 출마자들간의 오해가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오해는 선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풀지 않은 채로 두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은 자신의 권리를 먼저 찾지, 결코 책임을 가지려 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오해와 화해의 긴장은 사실 우리나라 625전쟁을 근간으로 깊이 있음을 우리는 모두 공감합니다. 그 중에 이 오해를 풀기 위해서 진실화해위원회와 신안군이 이번에 양해각서를 체결하였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좌우이념이 극렬히 대립할 당시 신안군 고이도라는 섬에서는 김씨집안과 이씨집안이 좌우이념으로 나뉘어져서 서로를 죽였던 아픈 역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인민군 점령기에는 김씨 집안사람들이, 군인과 경찰이 수복한 뒤에는 이씨 집안사람들이 서로 힘을 가지고 사형집행을 했던 것이지요. 신안군에는 이런 고이도와 같은 상황에서 희생당한 민간인이 고이도에서는 50여명, 규모가 큰 임자도에서는 2-3천명이 될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면서 사실을 드러내고 화해의 물꼬가 터지기를 바라고자 이 오해들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2) 주제
누군가는 오해의 오해를 낳습니다. 자신의 욕심과 정욕에 가득차 오해를 계속해서 낳아서 더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해를 위해 오해를 끌어안습니다. 우리는 오해와 화해 사이에서, 나는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인지 돌아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신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인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17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존재입니다. 옛 사람은 없어지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18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기와 화해시키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직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 화해의 방향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화해를 위해 이 땅에 인간이 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화해의 용기와 지혜, 소망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3) 본문잇기
오늘 본문에서 이제 드디어 야곱 가정이 어떤 화해의 해피엔딩을 가지게 되는지 모세는 기록해줍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마무리지으며 출애굽기로 가서 한 나라가 되었다고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만한 한 사람을 통해서 천국을 만들어냅니다. 수치와 갈등, 이기심, 분노, 살해위협으로 가득찼던 야곱인생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를 펼치셨고, 무늬만 가정이 아니라 진실된 가정이 될 수 있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유다의 헌신과 희생 속에서 요셉은 모든 오해가 풀리게 되었습니다. 유다가 화목의 직분을 감당하니, 요셉과 형제들은 서로 부둥켜 안으며 그간 있었던 오해가 풀리고 하나님의 가정이 되었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지금 이 시대에 오해를 벌리기만 하는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화해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 직장, 사회, 국가에 우리로부터 예수의 화해가 펼쳐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 본론
1) 오해와 화해
요셉이야기를 잠시 드릴까요. 요셉은 어릴때부터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총애를 받았습니다.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낳아준 요셉을 이뻐하며 그에게만 채색옷을 지어주기까지 했습니다. 더욱이 요셉의 꿈을 들은 후에는 그를 더 아꼈을 겁니다. 물론 야곱도 처음에 꿈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꾸짖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 꿈을 마음에 간직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런 야곱을 보며 요셉의 10명의 형들은 오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는 "그(요셉)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창37:4)고까지 말할 정도였으니, 형들이 얼마나 요셉을 오해하고 미워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이복동생 요셉을 형들은 타국 노예로 팔아넘겼고, 아버지 야곱에게는 야생동물에게 당한 것같다고 거짓말까지 하였습니다. 타국으로 팔려간 요셉은 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하나님께서 돌보셨고 마침내 고대제국 중 가장 강력했던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린요셉에게 주셨던 꿈은 요셉을 어떻게 사용하실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이죠. 그 결과 하나님은 야곱가문을 시험하는 심판대에 요셉을 앉히셨고, 야곱가문을 대표하는 유다와 형제들이 요셉에게 엎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유다가 가정을 향한 희생과 헌신을 보입니다. 특히 친동생이 아님에도 유다는 베냐민을 향해 대신 옥에 갇히겠다는 희생과 책임의 태도를 보입니다. 그 현장에서 요셉은 모든 오해를 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야곱가문을 이렇게 놀라운 신비와 섭리로 모든 오해를 풀어내시고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 순간에 대해 본문은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1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2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3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여기서 요셉의 울음은 어떤 울음이었을까요? 서글픔? 억울함?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환희의 눈물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환희의 눈물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올림픽과 같은 운동선수들의 메달수여식입니다. 수년간 땀과 눈물을 흘리며 수고한 결실을 메달로 인정받는 그 순간에 선수들은 웃으면서도 눈물을 흘립니다. 상반된 감정이 하나의 표정으로 나타나는 신비로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요셉의 눈물이 그러한 눈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도 순수하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한 탓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다가 결국 노예로 팔려갑니다. 그러다가 주인집의 집사람의 유혹을 뿌리쳤음에도 불구하고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힙니다. 그러다 놀라운 기회로 애굽이라는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줄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하게 되어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켠에는 가정과 가정을 떠나 타국에 있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의문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내 인생을 이렇게까지 인도하시는 것일까? 그러다 곡식을 구하러 온 형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엎드려있는 모습을 보면서 요셉은 시험을 주기로 생각합니다. 과연 이전처럼 갈등과 이기심, 욕심으로 가득차 자신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렸던 악한 상태인지 아니면 나의 친동생 베냐민을 친형제처럼 아껴주었는지, 노심초사하며 시험을 베풀었을 겁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그간 형들을 변화시켜주셨고, 자신의 친동생 베냐민을 대신하여 옥에 갇히겠다는 형 유다가 나타난 그 현장을 목격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간 자신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며 그 고생의 이유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왜 꿈을 주셨고, 왜 이런 고난의 인생을 살게 하셨는지 모두 알게 되는 놀라운 순간이었습니다. 더욱이 성숙해진 가정으로 복귀하게 해주시고, 더 나아가 야곱가문이 극심한 가뭄으로 멸망하지 않도록 자신을 총리로 세워주시어 하나님의 가문으로 계속 세워질 수 있도록 자신을 사용하셨다는 고백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니 환희의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지요. 우리네 인생도 마지막에는 이렇게 모든 아픔과 오해가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였다는 고백으로 가득채우며 마무리 지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화해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욕심을 내려놓게 만드시고, 변화시켜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하나가 되게끔 해주십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만져가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기심과 욕심이 내 안에서 나타난다면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오해가 화해로 변하 할 수 있도록 살아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변화시키셔서 하나로 만들어주실 때까지 하나님을 믿으며 그 시간을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요셉의 눈물을 우리도 흘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의 단을 거두듯"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 지역사회에서 화해의 복음의 눈물로 기쁨의 단을 거둘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하나님의 섭리
본문입니다. "4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5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6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7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8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은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에게 오해를 풀어주셨는지를 설명해주게 됩니다. 본문 4-7절을 보면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라는 표현이 두번이나 등장합니다. 요셉은 자신이 형들의 계략으로 팔려간 것을 원망하며 살았을까요? 형들만 아니었으면 노예생활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감옥에도 갇히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요셉의 말을 들어보면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은 길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자신을 보내셨던 것이고, 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가문이 편안하게 이 길을 걸어올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야곱가문이 이후에 고센땅을 수여받아 애굽의 보호 아래에서 번성할 수 있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요셉은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물론 형들의 죄와 잘못이지만, 하나님이 사랑하는 내 인생에 형들의 오해와 분노가 들어왔다면, 하나님께서 이유가 있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살이를 살다보면 참으로 힘들고 아픈 일들이 있습니다. 특히 가정의 아픔은 사실 우리의 능력 밖의 일같습니다. 밖에서는 모두가 괜찮은 사람같습니다. 그런데 가정사로 들어가보면 그렇게 괜찮았던 사람도 상처가 있고, 분노가 내재해있으며, 깊은 우울감이 존재했던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모두가 그러합니다. 가정이 있는 모든 사람은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뼈아픈 아픔들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힘도 주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13사람이 감당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후10:13)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인생의 고난과 시험 속에서 사랑, 지혜, 용기, 소망을 계속 주십니다. 그 시험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결실을 얻을 수 있게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요셉은 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옥에 갇힐 때에나, 유혹을 받을 때에나, 바로 앞에 섰을 때에나 하나님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없고, 지혜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이어갔습니다. 결코 자신의 시험을 분노와 정욕으로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돌보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다보니 모든 오해가 풀리는 형들과의 재회의 눈물의 현장에서 요셉은 이 모든 시험의 과정이 결국 "하나님의 시험"이었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온 자신의 믿음의 씨앗을 거두는 날이 오늘 형들과 만난 시간임을 고백하며 "해석하는 신앙"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하나님이 나를 선발대로 먼저 보내셔서 고생하였다. 그러나 미리 준비하여 온 가족이 이 가뭄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라고 해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 이렇게 오해를 하나님 안에서 화해로 해석할 수 있는 영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공동체의 아픔을 위해 먼저 기도하고, 먼저 감당하고, 먼저 끌어안는 사람입니다. 억울할 수 있지요. 힘들 수 있습니다. 답답할 수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섬김"의 자리임을 깨닫고 그걸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은 나중에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지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있어요. 왜 그런 과정이 필요했는지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가정에 그런 영적리더가 필요합니다. 교회에 그런 영적리더가 필요합니다. 이 지역사회에 그런 영적리더가 필요합니다. 이 국가에 그런 영적리더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기도를 많이 해서, 예배를 많이 드려서, 성경을 많이 읽어서가 아닙니다. "공동체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내는 자"가 가능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따라 오해들을 끌어안고, 화해로 해석해낼 수 있는, 화해의 현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진정한 영적리더가 되길 소망합니다.



3) 나의 삶의 현장에서
지난 주일에 교회 한곳에서 아이들이 놀다가 서로 오해가 생겼나봅니다. 그 아이는 어머니에게 잘못 전했고, 그 어머니는 학교에 전화하여 제가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어머니와 대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학교 선생님도 교회에 있던 모든 아이와 대화를 하고 저와도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결론은 그 어머니의 아들이 교회무리에 끼고 싶어하는데 그러지 못하여 순간 분노하여 문제를 학교선생님에게까지 퍼뜨린 것이었습니다. 학교선생님께서도 왜 그러시는지 알 수 없다고까지 말씀하실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그 오해를 풀어가는 과정을 월요일에 만나서 대화 5시간, 전화통화로 2시간 정도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저는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리더일까? 저도 대화하면서 나의 이야기도 하고 싶고, 내 주장도 하고 싶고, 내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은 어디일까? 이 지역사회에서 이 교회의 모습이 어떻게 대변되길 원하실까? 결국 그 어머니를 끌어안기로 하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아이들이 1주일간만은 교회에 찾아오지 않고 그 공간의 귀중함을 알았으면 한다는 의견을 주셨고, 저는 받아들여 어머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한주 동안 아이들이 교회에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정말 교회가 조용하더군요. 그런데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교회는 이렇게 결국 조용한 곳이 되겠구나.

그렇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수 많은 교회들이 21세기를 맞이하여 종교의 위기 속에서 문을 닫았습니다. 우리 신앙고백의 선조로 여겨지는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다수의 노회가 동성애결혼을 주례할 수 있게 하자는 조항을 처리하였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위기 속에서 한국교회 중 하나로서 우리 행복한교회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조용한 교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교회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오해와 화해가 반복이 될 지언정 계속 사람으로 북적이는 교회로 나아갈 것인가.

우리 하나님은 화해의 하나님이십니다. 화해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겠지요. 물론 교회에서 사건사고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점점 나타날 수 있도록 우리는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예배당 안에서도, 교회 1층 로비에서도, 이 예배당 현장에서도, 어떤 우리 삶의 현장에서도 오해가 득실대는 현장에서 우리는 화해의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문제를 끌어안고 나아가 마침내 결실을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섭리를 해석하며 나아갈 수 있는 영적 리더로 저와 여러분이 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요셉은 남은 5년의 기근이 있을 것이라 말하며 오해를 형들과 풀며 이곳에서 함께 살자고 제안합니다. 오해를 풀어내고, 그 오해를 해석해내며, 오해 이후에 화해의 공동체의 길을 제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한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3.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지난주에 여성중년소그룹에 참여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생각과 은혜를 나누며 정말 재미가 있었습니다. 저는 아주머니들과 맞나 봅니다. 어쨌든 그곳에서 다양한 주제들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왜 이렇게 쫓기면서 살까? 였습니다. 한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고 다른 분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 순서가 되어서 저도 나누는데, 저의 마음도 요즘 그랬거든요. 그런데 답은 나와있죠.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나의 불신앙이 문제였습니다. 그 답을 누군가 내려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이야기들 속에서 저도 편하게 이야기하고 공감해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소그룹을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에 있습니다. 소그룹은 정치를 이야기하는 곳이 아닙니다. 나라 현안이나 이슈를 말하는 곳이 아닙니다. 영혼을 다루는 곳입니다. 성경공부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과 의지를 어루만지고 돌보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오해가 아니라 화해가 있습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의로움이 있습니다. 질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을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모인 자들의 모임이고, 그것이 예수님의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남일지라도 서로의 영혼을 돌보겠다는 직장은 전쟁터가 아니라 안식처가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혈연관계라 할찌라도 영혼을 바라보지 않는 곳은 가정이 전쟁터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명예로운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명예롭게 살라고 하십니다. 유다도 요셉도 가정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책임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전체는 이것이 예수님의 삶의 방향이라고 말해줍니다. 이번 한주 여러분이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을 따라,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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