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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_F/하나님의 윤곽_가정과 삼위일체

공동체05. 하나님의 윤곽, 가정2

by 우루사야 2022. 5. 27.
  1. 서론
  1. 예화

얼마 전에 가상화폐 중 하나인 루나코인이 몰락하면서 20만명의 피해자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가상화폐로 10조원이라는 거래량이 생길 정도까지 정부와 국회가 어떤 입법활동도 추진하지 못했기에 이번사태의 실태파악조차 아직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곧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번뿐만 아니라 항상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문물이 생겨나면 정부와 입법부가 뒷북을 쳤다고 뉴스가 나오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이런 현상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라 당연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고 싶어하는 것을 먼저 하지, 해야할 일을 먼저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자를 우리는 권리라고 말할 수 있고, 후자를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누릴 권리를 먼저 생각하지, 그 어떤 누구도 서로의 안전과 보호, 화평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을 솔선수범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나서지는 않습니다.
제가 논현동에 있는 교회에서 사역할 때였습니다. 그 지역일대에서 그래도 꽤 규모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넓은 마당에서 바자회도 열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행사를 없앴다고 하더군요. 지역주변의 상권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교회 내에서 바자회를 하니 지역상권이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주 아이들이 본당 2층에서 같이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서는 비신자 아이들을 위해서 마련한 기독교세계관토론회에 함께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아이들에게 한 순서를 같이 참여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친구들, 교회는 예수님따라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야.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거든. 우리도 사랑하러 갈까? 우리 동네에 놀이터가 딱 하나야. 금모레놀이터. 그런데 주말만 되면 청소부 아저씨도 쉬시는 날이라 항상 놀이터가 쓰레기로 넘쳐나. 우리 서로 사랑하러 같이 쓰레기 치우러 가지 않을래?" 아이들과 비닐장갑을 끼고 딱 5분 돌고 왔더니 파란큰비닐봉지 하나가 채워졌습니다. 아이들에게 권리보다 책임을 알려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2) 주제
우리는 "낮아지면 높이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가 낮아져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높이시겠다고 말이지요. 권리보다 책임감을 더 먼저 가지고 주변을 돌보게끔 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방향은 예수님으로 인간이 되게끔 하셨고, 성령님이 우리에게로 내려오게 하셨습니다. 12제자로 땅끝까지 이런 섬김의 복음과 공동체를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 밖에도 성경에 제시되는 많은 예수님의 예표가 되는 사람들 또한 자신의 권리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책임을 가지고 문제를 끌어안는 많은 신앙위인들이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나 예수님이 오신 후에나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이 세상을 끌어안기 위해 책임감을 가지고 얼마나 섬겼는지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희생의 역사의 기록이 바로 성경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교회는 그리고 신자는 권리보다 책임을 먼저 고민합니다. 예수님처럼 말이죠.

3) 본론잇기
오늘 본문에서 한 사람의 독백이 나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가정을 파괴시켰던 유다가 다시 전면에 등장합니다. 며느리 다말사건 이후에 유다가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오늘 본문 정황상 유다는 야곱가문에 복귀를 했고, 1-3째까지 장남노릇을 못하는 상황 가운데 유다는 극심한 가뭄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리더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애굽총리의 시험에 빠져 한 사람이 감옥에 갇혀야 할 상황에 유다는 자신이 인질로 잡히겠다고까지 자신을 헌신하며 가정을 지켜내려고 합니다. 모세는 창세기를 기록하면서 이 야곱가정이 어떻게 이스라엘 나라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유다의 이러한 공동체를 지키려는 헌신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네. 이 이야기는 요셉이 주인공 같지만 사실상 숨어있는 진짜 주인공은 예수님의 혈통이자 선조였던 유다였습니다. 그의 헌신을 말하고, 그래서 가정이 화목해지고, 그 가정이 천국이 되어, 마침내는 하나님 나라의 근간을 이룰 수 있었다는 구속사적인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고 우리에게 말하려는 본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가정을 지켜내 천국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저와 여러분되길 소망합니다.

2. 본문
1) 권리보다 책임
일전에 유다는 자신의 힘으로 가정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가나안 문화를 향해 형제들 중에 처음으로 떠나갔습니다. 이방인 아내를 맞이하다 못해 자신의 장남에게도 이방인 며느리를 맞이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가나안 우상숭배 문화로 가정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들의 죄악을 보지 못했고, 다말이 변장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욕망으로 가득찬 눈은 결국 하나님의 가정과 천국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 유다가 며느리와의 사건을 통해 자신의 힘으로 가정을 세우려 했던 자신이 오히려 가정을 망쳤음을 인정했고, 가정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며느리가 옳았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그후에 유다에게 어떤변화가 일어났는지 성경은 말해주지 않지만, 그는 변했습니다. 가정을 다말아먹은 자에서 가정의 수호자로 등장합니다.

먼저 30-31절입니다. "30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31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과 야곱이 그토록 사랑한 아내 라헬을 통해 낳은 아들 베냐민이 얼마나 강력한 아비의 정으로 묶여있는지 알았습니다. 아비에게 아들을 잃게 만든다는 것이 그 아비가 어떤지옥을 경험케 하는 것인지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먼저는 요셉을 노예로 팔아넘기고 야곱에게 거짓말할 때에 슬퍼하던 야곱의 모습을 그는 기억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유다도 두아들을 잃어보았습니다. 그들의 악행으로 죽은 것이지만, 유다도 아비로서 자녀가 먼저 생을 마감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아픔인지 겪었습니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요셉이라는 아들을 잃게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나머지 형제들과 함께 자신들의 권리를 찾고 싶어서 저질렀던 만행이었습니다. 요셉만 이뻐하시는 아버지를 형제들은 비난했습니다. 그 분노는 자신들의 음식을 챙겨 집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요셉을 향했고, 요셉을 죽이려다 노예로 팔아넘겼습니다. 그랬던 유다가 수십년이 지난 후, 이번에는 요셉의 친동생 베냐민을 대신해서 인질로 잡히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유다의 행동이 우리 신자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예수님의 방향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권리보다 공동체를 향한 책임감은 하나님이 축복을 부어주시기에 합당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복음이라는 것이 예수천당불신지옥으로 단순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내면은 이기심으로 가득한데 입이 신앙고백으로 가득할 순 없습니다. 복음은 내지성, 의지, 인격, 선택 전반에 흘러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원리대로 살아낼 때에, 그 삶에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와 내 삶에 만들어지는 천국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우리가 회개만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간다면 우리의 상처많은 이 가정도 하나님의 화평으로 가득할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회개하는 나의 가정생활에 임해 천국을 만들어냅니다. 유다가 그런자가 된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장남 가인이 자신의 예배를 받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분을 품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그럴 때 가인은 무어라 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하나님은 가인에게 부모가 떠났을 때 유일한 혈육으로 아벨을 주셨습니다. 형으로써의 책임을 물으셨죠. 그런데 가인은 그 책임은 거들떠 보지 않고, 자신의 예배를 받아주지 않는다면서 아벨을 죽였습니다. 자신의 권리에 대한 생각만 가득차 있었죠. 그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 가정은 어디에 있느냐?" 그리할 때 우리는 과연 가인처럼 대답할지, 아니면 유다처럼 책임지고 앞으로 나설 수 있는지 나에게 되물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잘못되었을 때 대표가 지는 책임
하나님이 주신 나의 부모, 하나님이 주신 나의 형제자매, 하나님이 주신 나의 자녀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준 가정은 어디에 있느냐?"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이며, 하나님 나라의 근간이며, 천국을 이룰 곳이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가정을 파괴했던 자에서 가정의 수호자로 바뀌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긴밀하게 묶여있는 것을 보며 자신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그것을 지켜내려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헌신이, 이러한 방향이, 하나님 나라의 근간이 되어서 야곱가정이 이스라엘 나라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 가운데 모세는 다시 한번 유다의 발언에 우리가 집중할 수 있게끔 합니다. 32-34절입니다. "32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33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34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사실 야곱가정이 흉년을 맞이하여서 애굽에 곡식을 가지러 갔을 때에 아버지 야곱에게 베냐민을 돌려보내지 못했을 때 책임 을 약속을 하는 것은 다른 형제들이 할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요셉의 시험에 걸려들어 누군가 베냐민대신 감옥에 갇혀야했습니다. 장성한 남자 11명이 있는데 왜 유다여야만 합니까?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을 범하였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디나사건을 통해서 가문 전체를 위기에 몰아세웠습니다. 하나같이 다들 장남의 자격을 잃어버린 때였습니다. 유다는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책임을 지기로 다짐을 합니다. 그래서 유다는 32절과 같이 "내가 베냐민을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라고 했습니다. 33절에서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형제를 돌려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 짐을 자신이 지기로 한 것입니다. 대표가 된 것입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공동체가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나서야 공동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댓가를 누군가는 치러야 했습니다. 아버지를 설득하고, 베냐민을 무사히 돌려보내기 위해 자신이 "평생동안 그 죄의 댓가를 치르겠다"고까지 했습니다. 총리에게는 자신이 옥에 갇히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책임이라는 것은 그것이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해야 하는 막중함을 가집니다. 대표자란 그런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볼까요?"12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마27:12) 십자가에서 인류공동체의 죄짐에 대한 책임을 지실 때에 예수님은 잠잠하셨습니다. 책임을 지는 것에 집중하셨지, 자신이 누려야 하는 권리을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죄악덩어리인 우리 인류가 잘못되었을 때에 그 죄짐을 지고 잠잠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로, 그러니까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게끔 사고가 나버린 우리의 죄를 책임져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그 결과 우리는 성령 하나님과 교통하며 교제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류의 대표자가 걸어온 길입니다.

다시 대표자 유다의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심판자로 서있는 총리아래에서 유다는 베냐민을 비롯한 자신의 형제들을 지키기 위해서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인류가 심판대에 앉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판결이 내려질까 기다리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변호인이 되어주시는 신약의 대속교리가 보여지는 장면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꿈을 주실 때에 형제들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도 자신에게 볏짚단이 숙이는 꿈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요셉을 총리로 세워 가족들을 구해준다는 것만을 계획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을 통해서 야곱의 가정이 모두 살아나고, 요셉의 시험 아래에서 야곱의 가정이 회복이되고 천국이 만들어질 것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요셉의 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은 요셉을 통해 가족의 육신을 살림과 동시에 갈갈이 찢겨졌던 야곱가정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시험이 베풀어질 것에 대한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그 대표로 유다가 그시험을 감당하며 야곱가문이 가야할 길을 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대표자란 직임이 아니라, 자리차지하는 자가 아니라, 시험을 풀어내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심으로 그이후 제자들이 마귀를 물리치게 된 것처럼 말이죠. 유다가 요셉의 시험을 희생과 헌신으로 이겨내니 그 이후에 야곱가문의 정체성이 확립되고 질서가 잡혀 마침내 한나라, 한민족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연합하여 선을 이루는 인생이 될 수 있도록 우리네 인생에 많은 개입과 섭리를 베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감당할 만한 시험을 묵묵히 기도와 말씀, 신앙으로 견디고 감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시험이 올 때에 믿음의 원리를 나의 결정과 생각에 넣어 행동으로 살아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유다는 과거의 가나안습성을 모두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시험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원리대로 결정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동체가 잘못되었을 때에 그것을 끌어안을 준비를 말이죠. 여러분이 당하는 시험은 한개인의 시험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시험당했을 때 신앙과 믿음으로 이겨낸다는 것이, 곧 여러분이 주변의 영적리더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마십시오. 소돔과 고모라는 그런 영적리더 열명이 없어 멸망했음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은 그가정과 직장, 사회, 도시의 영적 빛과 소금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마십시오.


3) 누군가는 나서야 합니다.
프랑스에는 "귀족은 의무를 진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부와 권력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는 유명한 격언이죠. 여러분이 잘 아시는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그 표현입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100년 전쟁을 치를 동안 프랑스 칼레시를 영국이 차지했을 때, 대표로 6명의 사형집행을 명했는데 그 대상자들이 판사, 시장, 부자, 귀족원로 등으로 이뤄졌습니다. 모두 그 지역의 사회와 경제, 문화를 책임지는 자들이었죠. 이에 감명한 영국왕은 처형을 사면해주었다고 하죠.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나서야 합니다. 그 누군가는 나서야 모두가 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제자라고 하십니다. 모두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남녀노소 불문합니다. 중고등학생이 학교에서 가능합니다. 회사원이 회사에서도 가능합니다. 가정에서도 가능합니다. 누군가는 나서야 합니다. 누군가 문제와 책임을 끌어안을 줄 아는 한 사람, 예수를 따라 그렇게 살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세상은 고통을 전가시키려고 하지 책임져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넉넉한 사랑으로 그 문제를 끌어안으라고, 함께 어깨를 매어주라고, 오리를 가자 할 때 십리를 가주라고 말이죠. 구하는 자에게 거절치말고 더 얹어주라고. 그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길이 좁고 험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넓은 문과 넓은 길로 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상대적으로 적어야 맞는 겁니다. 1000만 기독교인이라고 자부하던 것이 부끄럽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기독교가 절대다수가 될 수 없을 것임을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무엇을 믿고 마치 기독교가 이 땅에서 대세라도 된 것마냥 날뛰었는지 부끄럽기 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좁은 길을 걷는 자들입니다. 세상과 같이 책임을 전가하는 자들이 아니라 내 책임이 아님에도 그것을 끌어안으러 나아가야 하는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요즘 초등학교 친구들이 교회에 많이 옵니다. 그런데 누군가 한명이 이렇게 이야기하더군요. "이곳은 나의 제2의 집이야"라고 말이죠. 그 말이 참 듣기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교회에 대한 문턱이 낮아질 때까지 그 친구를 먹이고 재우고 돌보았던 시간들을 돌아보면 참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 친구는 부모님이 모두 7-8시에 퇴근하는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집에 가기를 싫어했던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저희 집에서 먹고 놀고 숙제하던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친구를 한명 더 데리고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즘 아들이 2명이 더 생겨서 참 힘들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교회를 가깝게 여긴다는 것이 나중에 하나님이 귀하게 써주실 것을 생각하니 좀 더 섬겨야겠다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이번주였습니다. 저는 중고품을 나누는 어플인 당근마켓을 애용합니다. 그런데 한 목회자분이 그 어플을 통해 쌀포대를 나누는 것을 보았습니다. 쌀이 없어 편의점만 가는 청년들, 아기를 키우는 한부모가정이나 미혼모, 거동이 불편하여 움직일 수 없는 독거노인 등. 사실 그 어플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교회 어머니"라는 책임감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대상들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누군가는 나서야 합니다. 고통을 전가하는 세상 속에서 그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고 끌어안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3.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유다의 이런 변화를 통해서 마침내 요셉은 유다와 형제들에게 자신이 어렸을 때 헤어졌던 동생이었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이 형제들은 그 자리에서 서로 얼싸안고 울기 시작합니다. 그 때에 그 유명한 요셉의 말이 등장합니다. "7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8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45)

하나님은 야곱의 복잡한 가정사에서, 형제가 형제를 죽이려 하고 외국에 팔아넘기려는 극악무도한 가정사에서, 우상숭배의 문화에 젖어 가정을 제멋대로 세우려했던 가정사 속에서도 역사하셔서 결국에는 천국을 만들어내셨습니다. 그리고서 400년 후에 이 가정을 근간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셨습니다.

여러분이 가정을 향한 그헌신이, 공동체를 향한 그 헌신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가정공동체 속에서, 여러분의 사회공동체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믿음으로 이번 한주도 예수를 따라 명예롭게 헌신하며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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