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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YAMEMORY
구속사 설교_F/가나안을 에덴으로_창세기(1-11장)

가나안을 에덴으로(6)_초연할 수 있습니까

by 우루사야 2022. 2. 12.

 

 

서론
1)
예화
제가 마케팅에 관한 책에서 내용 식당운영에 관한 노하우가 있었습니다. 손님이 주문을 하고나서 음식이 나올 동안 직원이 번정도는 손님에게 가서 "음식이 조리되고 있고 나올 것이다"라는 멘트를 하게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손님은 자신이 기다린 시간을 체감한다는 것이죠. 실제로 손님은 15분을 기다렸지만, 코멘트가 없을 때는 20분정도 기다렸다고 생각하지만 코멘트가 있을 때는 10 정도 밖에 기다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서비스업계에서는 손님이 기다림의 시간을 체감하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 놀이동산은 놀이기구를 타려고 줄서는 공간에 많은 볼거리들을 제공합니다. 식당에서는 음식이 나올 때까지 에피타이져나 간단한 차를 준비하고 음식이 나오기 전에 한번 정도 언급해줌으로써 기다림이라는 시간을 느끼지 않게끔 하려고 합니다. 

그만큼 인간에게 기다림이란 힘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다림에 대해서 노랫말을 하나 찾아보니 조용필씨의 기다리는 아픔이란 곡이 나오더군요. 첫구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고독한 가슴에 외로움을 심어주고 초라한 모습에 멍울을 지게 했다" 조용필씨의 기다리는 아픔이라는 곡의 첫구절입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에게 고독함, 외로움, 초라함을 준다는 감정을 구슬프게 줄로 함축적으로 표현한 같습니다. 

 

2) 주제 
우리는 기다림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습니다. 다른걸 하면서 기다림의 시간이 무감각하게 느껴지길 바래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기다림은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음식을 기다리든 사람을 기다리든 새로운 날을 기다리든 그 기다림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런데 성경도 그 기다림에 대해서 말합니다. 성경은 기다림의 시간을 피하지 말고 살아내라고 말해줍니다. 어떻게? 오늘 설교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내라고 말합니다. 노아의 홍수본문은 꼭 이 구절을 읽고 해석하셔야 합니다.

창 6장 : 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9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여러분 은혜는 내 자식 성공하는게 은혜가 아닙니다. 내 앞길이 열리는게 은혜가 아닙니다. 대선에서 그 사람이 떨어지는게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죽음의 심판을 넘어서게 합니다.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계셔서 내가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살게 해줍니다.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대리통치자가 되어 급이 다른 인생을 살게 합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3)
본문잇기
오늘 우리가 살펴본 본문은 노아가 방주에 상태에서 홍수심판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를 기다리는 시간을 갖습니다. 노아가 기다리는  장면 속에서 우리는 마지막 세상의 종말을 향해 살아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로 어떻게 이 시간을 살아내는지, 어떻게 초연하게 이 시간을 미동없이 살 수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오늘 시간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 모두 마지막날까지 신앙생활을 살아내느라 느껴지는 고독, 외로움, 초라함이 있을지라도 이겨내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의 그날까지 함께 나아갈 있기를 소망합니다. 

 

 

2. 본론
1) 하나님의 은혜를 입다

홍수 전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이 홍수 심판 중에도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오늘 본문 1-4절입니다. 

1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2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3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오십 후에 줄어들고4일곱째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5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1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첫번째가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가축들이 타고 있는 방주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망망대해와 같은 어려움에 있을 지라도, 아무런 추진력이 없는 배에 같은 인생일지라도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가지고 가장 적당한 역사를 베푸십니다. 노아에게 그것은 "심판을 거두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땅을 심판하고자 가장 높은 산의 봉우리보다 15규빗 높이 물이 불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적당한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심판을 거두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바람을 일으키십니다. 바람이 위에 있는 물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12절에서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 여기서 하나님의 신이 히브리어로 루하흐. 그리고 지금 살펴보는 "바람" 루하흐. 그러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물을 다스리어 물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모세는 같은 단어를 쓰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은 노아가 위에서 구원받게 하셨고, 노아가 수면 위에서 가축들의 생명을 보존함으로써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보존케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신이 천지창조를 보존한 배를 기억하사 물이 줄어들게 하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땅에 묶여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죄인된 인생인데, 은혜를 입히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는 곳에 죄인이 은혜를 입어 역사의 정 중앙에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여 물이 모이고 흩어지는 그 중앙에 인간이 당당히 서있게 하십니다. 심판받지 않고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잇는 방주를 지키는 자로 세워주십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는  4절에 보니 아라랏산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노아와 방주를 점점 띄워서 타락한 사람과 땅으로부터 분리시키셨던 하나님께서 모든 땅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심판을 끝내시고 노아와 방주를 내리시더니 방주가 땅에 머무르게끔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여호와의 신으로 여러분의 상황과 환경에 바람이 불게 하십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나누시고 구분시키시고 지켜주시게끔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정착하여 여러분이 하나님과 함께 뿌리를 내려야 그곳에 당도하게끔 하십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제가 제목을 "초연할 있습니까" 드렸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느라 갈길이 보이지 않고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신앙생활로 들어가고 하는 ,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 타인을 섬기기 위해 희생의 자리로 나아가는 세상이 멍청하다고 평가하는 자리로 가는 자를 말합니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초연할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인생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새벽을 맞이하는 가장 빠른 길은 어둠을 피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으로 새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시 해가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제가 12월에 예수님의 중요한 7장소를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기억하시나요? 가운데 하나가 골고다 언덕이었습니다. 제가 여러가지 예수님의 태도와 발언등을 말씀드리면서 "예수님은 죽음을 돌파하러 스스로 가셨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하시려고, 스스로 잡히시고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시고 자신을 위한 변호와 변론도 없이 사형장에서 피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인류와 함께 새벽을 가장 빨리 맞이하시고자, 어둠과 죽음과 무덤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많은 위인들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어둠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을 살려주실 것을 믿기에 제물로 드리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실 이스라엘을 믿기 때문에 자신을 억울하게 죽이려드는 사울을 죽일 있음에도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은 억울하게 돌로 맞아가면서도 그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기에 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초연하게 세상이 주는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갔던 그들을 기억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제가 3월이 되면 본격적으로 여러분의 현장으로 가려고 합니다. 첫번째가 성경공부입니다. 그리고 두번째가 점심 이후 소모임입니다. 여러가지 의견을 청취했습니다. 담임목사님과 함께 복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내는 신자를 키워내는 교회가 되게끔 하기 위해서 우리교회 체질을 다시 한번 바로잡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이 2 이번 기도하시면서 개인적으로 나의 신앙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의 영성을 위해서 기도하실 있길 소망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초연할 있길 소망합니다." 그럼 노아는 어땠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2) 은혜로 초연하자
비가 그치고 물이 위에 그대로 있습니다. 눈으로 봐서는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습니다. 배가 돛이 달려 바람으로 앞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노를 저을 있는 힘도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있는 것이 없습니다. 망망대해 속에서 노아가 있는 것은 고독과 비참함이 난무하는 "기다림의 시간" 살아내는 , 하나님이 주신 가축들을 돌보며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위치와 상황이 어떠한지 수도 없습니다. 자신이 있는 곳만 이렇게 비가 것인지 아닌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기다릴 밖에 없는 노아였습니다. 그는 죄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에 그는 의인이 되었고 완전한 자가 되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심판 가운데 그가 어떻게 초연함을 가지고 살아가게끔 하는지도 알려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노아는 3가지의 행동을 보여줍니다. 첫번째가 높은 고도를 날으는 까마귀를 보내는 것, 두 번째는 낮은 고도와 땅에서 생활하는 비둘기를 보내 감람나무 잎사귀를 얻은 것, 세번째는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을 때까지 보낸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다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가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앞길이 어떻게 열릴 것인지 계속 구했다는 것이 가장 주요합니다. 본문 6-12절입니다.

6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7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8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9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10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11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12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까마귀를 보냈다는 것에 대해서 비둘기는 평화고 까마귀는 흉조의 상징이고 해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혀 성경해석에 있어서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까마귀는 일본에서는 길조입니다. 성경은 문맥적, 역사적, 문법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노아가 까마귀를 보냈는가? 물이 차있으니 체격이 좋고 높이 날아 주변을 넓게 있는 까마귀를 보낸 것입니다. 7절에 보니 까마귀는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높은 수위의 심판을 감당하고 있는 노아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럼 비둘기는요? 낮은 수위의 심판의 때를 말하는 것이죠. 감람나무는요? 심판이 끝나가고 새로운 생명의 시대가 곧 보이는 때를 말하죠. 그렇게 점점 노아는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여 물이 줄어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본문은 지금 우리에게 은혜를 받은 자가 무엇을 확인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말해줍니다. 

여호수아서 - 여리고(온전한 기적), 아이성(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기브온 화친(하나님께 묻는 삶, 하나님과 동역하는 삶) 
여호수아는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을 인간적인 타협이 아니라 온전히 진멸의 심판자로써 살아냅니다. 그렇게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초연하게 사명을 감당해냅니다. 

뉴스를 보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볼 때가 많습니다. 사회적으로는 폐륜적인 일들이 넘쳐납니다. 정치적으로는 정말 너무 힘들정도로 뉴스가 비생산적인 일들로 넘칩니다. 경제적으로는 남들은 다 잘 사는것 같은 뉴스가 많은데 나만 이런 것 같습니다. 문화적인 면들을 보면 나는 살기 빠듯한데 나와 거리가 먼 유행이나 트렌드가 쉴새 없이 바뀝니다. 과연 나는 제대로 사는 것이 맞을까요? 내가 사는 이 세상이 정상은 맞을까요? 우리 주님께서는 날이 가까워질 수록 나타날 일들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며 초연하게 살아가라고 말씀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입니다.

 3예수께서 감람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 있사오리이까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5많은 사람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6난리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7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 지진 있으리니8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우리 주님은 날이 오면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런 일은 당연히 있어야 하지만 끝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노아에게도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홍수가 일어날 두려워말라고, 심판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난리가 일어나라도 두려워말라고 말이죠. 이제 시작이라고 말이죠. 초연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초연함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묻게 만듭니다. 노아는 비둘기를 계속해서 내보냈던 것이죠. 바울은 그런 점에서 도적같이 임할 날을 향해 어떻게 살라고 말했습니까? 

1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것이 없음은2주의 날이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3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4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5너희는 아들이요 아들이라 우리가 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6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노아가 하나님의 뜻을 계속 묻기 위해 새들을 내보냈던 것처럼 우리는 깨어 정신을 차려 안에 계신 성령님께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영적불감증으로 언제 세속에 휩쓸려 우리가 돈에 취해, 명예에 취해, 세상의 가치에 취해 넘어질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 하나님의 뜻을 구했던 노아였습니다. "12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노아는 다시금 비둘기를 보내고 돌아오지 않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끝났음"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돌파하러 스스로 들어가셨듯이,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달려나가듯이, 모세가 바로 앞에 나아갔듯이 우리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믿습니다. 세속의 가치와 맞서기 위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이 나를 땅에 보내신 이유, 에덴을 만들기 위해 이번 한주 어둠과 죽음과 죄악의 세상을 향해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예수의 복음과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3.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초연하다를 한자로 검색하면 뛰어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검색하니 "일없다"로 비슷한 표현이 검색되더군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는 "일없습니다." 어떤 환란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가니 일없습니다. 왜 힘든 일이 없겠습니까?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성부 하나님의 섭리가 내 인생에 흐르고 있고, 예수가 나 대신 죄를 해결해주신 그 희생의 피가 내 영혼에 흐르고 있으며, 성령 하나님께서 내 영혼과 의지,  지성, 나의 삶의 환경에 역사하고 계십니다. 운행하고 계십니다. 그걸 믿기에 그 힘든 일들 앞에서 초연하게 살아갑니다. 

이번 한주, 우리는 다시 어둠과 썩어가는 세상, 종말을 향해 가는 이 땅으로 나아갑니다. 그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내 한 몸으로 살아내시고 명예롭게 초연하게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내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5Ab3n0qW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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