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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YAMEMORY
구속사 설교_F/가나안을 에덴으로_창세기(1-11장)

가나안을 에덴으로(2)_천국을 만드는 예배

by 우루사야 2022. 1. 14.

 

 

1. 서론 
1) 지난 주 잇기
샬롬, 우리 한번 인사해볼까요? 잘 오셨습니다. 다시 한번 인사해볼까요? 천국을 만드세요. 이번 한주도 여러분의 삶이 천국이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의 삶이 천국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천국들로 하나님은 천국을 완성하십니다! 이번 한주 저와 여러분의 삶,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뜻이 살아움직이는 천국"을 만드는데 있어서 우리의 모든 것이 쓰임받기를 결단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2) 예화 
지난 한 주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저는 두 사람이 기억이 납니다. 일전에 제가 소개해드린 오일영 배우가 있습니다. 이번에 그 어렵다던 골든글러브 최우수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러니 많은 인터뷰가 쏟아졌죠. 그런데 많이들 거절받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참여하고 있는 연극에 집중하기 위함"이라고 하더군요. 그 분의 삶의 태도가 엿보입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이 그 분이 존경하는 인간상이 있다고 합니다. 놀면 뭐하니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더군요. "우리 사회가 1등 아니면 안 될 것처럼 흘러갈 때가 있다. 그런데 2등은 1등에게 졌지만, 3등에게 이긴 거다. 모두가 승자다.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승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애쓰면서 내공을 가지고 어떤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사람이 승자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한 사건을 더 접하면서 아마 이 사람이 오일영 배우가 그토록 원하던 "경지에 다다른 자"가 아니었겠는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심정민 소령, 공군 전투기조종사"였습니다. 여러분도 뉴스에서 접해서 아시는 바와 같이 고인은 추락하는 가운데서 관제탑과 두 차례나 교신을 주고받으며 "탈출을 선언한 상태"였음에도 끝내 탈출하지 않았습니다. 전투기가 주택이 있는 마을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죠. 결국 심 소령은 민가를 피하기 위해 탈출을 시도하지 않고 조종간을 붙들고 있다가 결국에는 야산에 추락하며, 한 마을을 살리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에 대해서 생각한 한 주 였습니다. 80세 가까운 노인이 되어서도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 세속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자"와 30세가 되지 않았음에도 "군인으로서 최고의 경지에 다다른 자"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삶에 대한 진중함"이 느껴졌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함을 가지고 있는 자를 바라보며 살아간 한 주는 저에게 "나의 삶의 무게는 어떠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해주었습니다. 

3) 주제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나는 나의 삶을 얼마나 중요하게 진중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과연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삶으로 어떤 것을 이루고자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한낱 너무나도 가볍고 사치스러운 것인가 아니면 가치와 명예로 다른 이들이 바라보기에 "삶의 깊이와 진중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태도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자유분방할 수도 있고 보수적이며 무거운 태도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결과들에 있어서 인생은 단 한번뿐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일회적이지 않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오영수 배우와 심정민 소령의 인생을 통해서 많은 이들이 동기부여를 얻기도 하고 생명을 얻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계실까요? 자유분방하게 살든, 보수적으로 살든 그것은 개개인의 취향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인간 모두를 지으신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 인간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결과도 가볍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서 "천국"을 만들고자 하십니다. 여러분에게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인생에 대해서 진중함을 가지라"고 말이죠.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삶을 너무나도 가벼운 목적으로만 둘 때가 있습니다. 본능적이고 욕구적인 것을 향해서만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과연 내 인생의 목적과 가치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를 읽다보면,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인 출애굽 2세대들에게 "너희의 부모 1세대와 같이 눈 앞에 하나님의 기적인 불기둥과 구름기둥, 홍해, 만나와 메추라기 같은 기적이 보이는데도 지금 당장 배고프고 힘들고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손쉽게 던져버리지 말아라"라고 말하는듯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그들은 너무나도 가벼웠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천국을 만들기 원하십니다. 가장 최고의 것이죠. 최고의 영원한 삶, 천국의 삶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지금 이곳 여기서 만들어가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인생의 진중함을 가지고 나의 영역에 있어서 무언가를 마스터해내는 실력, 올바로 잡아가는 조직과 체계, 공의와 정의로 세워진느 질서, 이웃과에 있어서 사랑과 인자와 인내, 국방에 있어서의 최고의 경계, 경제계에 있어서의 지혜로움" 이 모든 가치들을 통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통해 천국을 만들어가고자 하십니다. 

4) 본문잇기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의 자녀 "가인과 아벨"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인생의 진중함을 어떻게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가나안 땅을 천국 에덴으로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는 곧 우리에게도 적용 될 수 있습니다. 세속을 살아가는 우리, 온갖 영향력들 속에서 정신을 못차리게 하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인생의 진중함을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천국을 만들어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가르쳐줍니다. 특히 "예배"라는 것을 기점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해주는 오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에게 은혜가 가득하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스토리 - 인격을 보시는 하나님
 
본문 1-2절부터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하나님의 첫사람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가 관계를 통해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아들 가인입니다. 신이 인간을 만들어서 아담이 태어났다면, 이제는 피조물이 피조물을 낳은 첫 사람이 "가인"입니다. 가인이야말로 의미가 있는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지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에도 하나님은 기회를 주시어 "여자의 후손, 그러니까 하와의 후손을 통해 뱀의 머리를 깨뜨리고 죄를 정복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하와는 아마도 가인을 낳음으로써 그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나봅니다. 그래서 1절에 보니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를 어원으로 들여다보면 하나님께 비중을 두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가인은 자라서 농사하는 자가 되었고, 가인의 동생이 태어나는데 이름이 아벨이었습니다. 그는 양을 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3-5절로 이어집니다. 첫 단어가 "세월이 지난 후에"는 "어떤 한 시기가 마쳐진 후에"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추수할 즈음, 양이 다른 양을 낳았을 때 즈음, '무언가 결과물이 나왔을 때 즈음'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가인은 농사꾼이었습니다. 그의 아비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나와 하나님의 명령과 같이 "땅에서 땀을 흘리는 수고를 하여 소산을 얻는 자"
가 되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가인은 아버지와 같이 농사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키운 농산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아벨도 양을 치면서 나은 "첫 새끼"를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둘 다 받아주셨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차별을 두셨습니다.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던 겁니다. 그러니 가인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 2세대들에게 창세기 이야기를 할아버지가 손주들에게 들려주는 것같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아담과 하와처럼 그들의 자녀도 죄를 짓기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자꾸 모세는 죄의 이야기를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2월까지 모세오경을 살펴볼 것인데 본문은 창세기 1-11장 원시역사라고 불리우는 본문을 중점으로 볼 것입니다. 11장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벨탑 사건"입니다. 하늘에 가까워지기 위해 사람들이 연합하여 탑을 높게 쌓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흩으셔서 탑을 쌓지 못하게 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창세기 1-11장은 1장을 빼놓고는, 모두가 죄의 퍼짐, 죄의 전달, 죄의 전파의 반복입니다. 모세는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 말해줌으로써, 인생을 어떻게 진중하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시야"를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죄를 짓는 자입니다. 천상 죄인인 것이지요. 아담의 죄로부터 시작하여 세상에 퍼져버린 죄, 그것은 우리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인생을 진중하게" 살아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벨의 제사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모세는 "가인에게 집중"합니다. 5절 하반절을 보니 "가인이 몸시 분하여 안색이 번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왜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는지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인의 제사는 왜 받지 않으셨는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인의 제사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모세가 2장부터 11장까지 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이야기가 나오는 4장도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죠. 그 죄때문에 가인의 제사가 받아지지 않은 것이겠지요. 그럼 과연 가인의 죄가 무엇이었길래 하나님께서 제사까지 받지 않으신 것인지 봅시다. 6절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이렇게 반문하십니다 .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마치 "네가 무엇을 잘했다고 그렇게 인상을 쓰고 억울해 하느냐"고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네가 잘못 해놓고 왜 나에게 와서 이러느냐"라고 하시는 것이죠. 7a절은 더 자세히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7a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을 들지 못하겠느냐" 여기서 "선을 행하면"은 다른 번역들에서는 "네가 옳게 마음을 먹었다면, 좋게 마음을 먹고 있었다면"이라고 해석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가인아, 네가 좋은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아놓고, 나보고 제사를 받으라고 하면 내가 받겠느냐? 그 마음을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그래놓고 왜 너의 얼굴은 오만상 찌푸리고 있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지금 가인이 드린 제사상에 대해서 문제 삼으시는 것이 아니라 제사 드리기 전부터의 "가인의 마음과 태도"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인은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진중함"이 없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했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박윤선 박사님은 "인격"이라고 표현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대하는 인격이 이렇게 엉망인데 어떻게 받을 수 있냐는 하나님의 말씀이셨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의 자세에 대해서 이렇게 직언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23그러므로 예물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24예물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장) 일상에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섬기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태복음 5-7장 산상수훈의 한 축을 감당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통일성"을 중요시 여기십니다. 때문에 가인에게도 똑같은 "올바르고 선한 마음"에서 시작한 제사가 아니라 "선하지 못하고 좋지 못한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에 대해서 하나님은 지적하시는 것이지요. 우리는 가인의 상황이나 예수님의 예시나 모두 "예배의 현장"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배 때에 우리의 인격은 다른 사람은 눈치 채지 못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더 적나라하게 보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순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 나아올 때에 간편한 마음가짐으로 나아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것임을 깨닫고, 내 심령 가운데 하나님께서 예배 가운데 무엇을 깨닫게 하시고 무엇을 느끼게 하시는지 집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예배 때에 경고하시면서 가인에게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7b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옳은 마음을 먹고 있지 않으면 죄가 문에서 웅크리고 기다리다가 문 밖으로 나오면 너를 삼킬 것처럼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너는 지금 조절해야 한다. 네가 어떤 마음을 먹고 가지고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컨트롤해야 한다. 죄에 넘어지지 않게 "하나님과 삶에 대한 진중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해주시는 것이지요. 여기서 가인은 하나님과의 진중한 관계, 자기 자신을 다스리며 하나님과 회복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기회를 붙잡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기 중심이라는 가벼움을 택합니다." 
하나님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결국에는 일을 저지르는 것이죠. 8절입니다 .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가인은 아벨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들에 같이 있게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가인이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고 했던 것이죠. 아무도 없는, 은밀한 그곳에 일부러 불러낸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적하셨던 "옳은 마음과 인격"을 향한 기회는 저버립니다. 그의 마음과 감정, 생각이 말하는 그대로를 행동에 옮기고자 합니다.  그것도 의도적으로 말이죠. 아무도 없는 들로 동생을 이끌어 내어 동생을 죽이고야 맙니다. 가인의 인격,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전 인격이 어떠했길래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지 않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진중함이 없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대한 진중함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생각과 감정"만을 최우선시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감정과 생각은 어떠합니까?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 때 다르고, 밥먹고 오리발이고,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 자체가 이렇게 변화무쌍합니다. 그것을 붙들고 사는 인생은 너무나도 가벼울 수 밖에 없습니다. 일관성, 영원, 덕, 의로움, 선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있다 하더라도 그 깊이가 너무 얕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일관성이 있으며, 더 영원하며, 더 덕스럽고, 더 의로우며, 더 선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가인에게 그것은 아버지 아담이나 어머니 하와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는 들었어야 했습니다. 

 

2) 중심구절 - 죄를 다스리라

그런 점에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라도 받아야 합니다. 모세는 가인은 듣지 못했지만, 그 말씀을 출애굽 2세대들에게 전해주듯이, 우리는 여기서 가인과 같이 되지 않기 위해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7절입니다.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기회가 있다고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죄를 다스리라, 그리하면 회복할 수 있다!"고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질타이자 경고를 해주셨던 겁니다. "죄를 다스릴 수 있는 용서의 기회"를 말이죠. 이 기회가 얼마나 진중하고 귀한 것인지 가인은 몰라서 그 기회를 차버렸지만, 우리는 이것을 진중하게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제가 결혼 전에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해서 부모가 되어서 제1의 책임자가 되어보니 알겠더군요. 자식으로 부모 밑에서 살 때에는 청소나 설겆이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 말은 "저질러 놓은 것에 대한 진중함"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런데 부모가 되었습니다. 부모가 된 것은 자녀를 가졌다라기보다는, 집에서 일어나는 "저질러 놓아진 것들"에 대해서 누군가 대신 해줄 사람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되더군요. 결국에는 내가 치워야 하고, 내가 정리해야 하고, 내가 처리해야 하는 것이 부모가 되는 것이더군요. 이렇게 부모가 되니, 밖에 나가서 삶이 변했습니다. 특히 화장실과 쓰레기통 앞에서 입니다. 일을 볼 때도 더러워지지 않게 최대한 합니다. 손을 씻을 때에도 물이 사방에 튀거나 거품이 튀지 않게 합니다. 쓰레기통에 무언가를 버릴 때에도 뾰족한 것을 버릴 때에는 치우시는 분이 찔리지 않게 부러뜨려서 말아놓거나 휴지나 종이로 감싸서 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화장실 청소를 해봤으니까, 쓰레기를 비워봤으니까 말이죠. 힘든 일을 겪어본 사람은 힘든 사정을 제일 잘 아니까요. 그런데 화장실 청소도 안해보고 쓰레기통도 안비워 본 사람은 그러지 않습니다. 막 쓰고 막 버리죠. 그 어려움을 모르니까요. 그래서 저는 "집안일"하면서 인격이 성장한 것 같습니다. 아내가 이러더군요. "내가 하기 싫은 건 그 사람도 하기 싫어 한다. 그러니 내가 하자." 참 인격이 깊은 말 아닙니까? 

인격이라는 것이 어떻게 성장하는가? 그것은 타인의 심정을 이해할 때 성장합니다. 인격이 덜 성숙한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소리, 자신의 감정, 자신의 주장만 하지요. 가인이 그러했던 겁니다. 아벨을 바라보면서 왜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는지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아버지 아담을 보면서 왜 에덴에서 쫓겨 나왔는지 자기에게도 대입해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죄가 웅크리고 너에게 다가오고 있다.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진중함을 가지고 말이죠.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할 입장에서 오히려 얼굴을 붉히고 있습니다. 자신이 나쁜 마음과 불결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은 모르실 것처럼 행동해놓고, 그 잘못을 바라보며 뉘우치기 보다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니까 말이죠. 그래서 그의 귀에는 하나님의 한번 더 기회를 주시는 그 소리조차 잔소리로 들렸나 봅니다.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동생을 죽였으니까 말이죠. 

죄를 다스리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충고를 듣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즉 "회개할 수 있는 의지"인 것이지요.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이 첫 복음말씀 사역하셨을 때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우리는 날마다 천국이 완성될 날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삶을 천국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그 첫 발걸음은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내가 죄로 여전히 방치해두고 있는 관계, 재정, 태도, 언행, 가정, 사업, 생각 등을 고쳐나가야 합니다. 천국으로 만들어 놓고 있어야 합니다. 완성된 천국을 만드실 예수가 다시 오실 때, 그 재료로 쓰실 우리의 인생을 준비해야 합니다. 천국이 아닌 것, 하나님의 말씀과 통치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것들은 모두 다 불태워지고 사라지고 쪼개지고 밟힐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인생에 대한 진중함을 가지고 "영원의 날, 마지막 날, 천국"이라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욕심과 성취욕, 명예, 허영을 바라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가인과 같이 죄를 다스리지 못해서는 안되겠습니다. 회개하며 죄를 다스리며 천국을 만들어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되길 소망합니다. 



3) 삶의 태도 - 일주일의 진중함

제가 서두에 하나님은 가인의 인격을 받지 않으신 것이지 정성이 부족했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인, 사람인, 격 마을 가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음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도 급이 있다는 의미겠죠. 상류층의 사람, 중류층의 사람, 하류층의 사람. 그럼 그 기준은 무엇일까요? 소득, 업종, 사회적 명성? 여러분 "사람"입니다. 인입니다. 사람에 따라 나누어지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을 다르게 대하셨습니다. 인격이 달랐기 때문이에요. 
인격은 그럼 어떻게 나뉘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른 사람이 보는 "나"가 아닙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볼 때의 기준을 가지고 나의 등급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라고들 하지요. 이게 맞는 겁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볼 때 먼저 보이는 기준이 바로 나의 인격입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통해서 "죄를 다스리는, 영혼을 바라보는 눈"을 가인에게 요구하셨던 겁니다. 영혼을 바라보는 인격을 갖추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라는 것이었죠. 

저는 그런 점에서 우리문화가 "사람"이라는 존재를 얼마나 가볍게 여기고 있는지에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얼마 전 국회에서 보건복지부 주관으로 포럼이 열렸는데, 우리나라 낙태율이 일반출생아의 3배에 이른다고 보고가 되었습니다. 즉 우리나라에서 수정되어 임신이 된 아기 100% 중에 75%는 낙태가 되고, 나머지 25%만이 태어난다는 결과였습니다. 조금 더 살펴볼까요? 여러분, 우리 다음세대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문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유튜브입니다. 특히 여기서 많은 어른들의 문화가 어린친구들에게 노출되는데 그 중에 제가 가장 심각하게 여기는 것이 "성문화"입니다. 야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더 나아가 "내가 기준이 되어 성을 전환하는 것"과 "동성애에 대한 호감"이 그러합니다. 이제 이것은 사실 "반감문화"라기보다는 하나의 존중되어져야 할 "문화"로 젊은이들에게는 인식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대를 외치자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할 때 가질 수 있는 진중함이나 중요도가 과거에 비해 많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들과 함께 나타나는 것이 간통죄의 폐지, 안락사를 통한 생명경시, 가정의 형태의 다양화 등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만약 기독교가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진지함과 진중함"에 대한 문화를 가지고 있고 더 나아가 그런 하나님다운 인격적인 가치가 교회에 있었다면 과연 이 세대가 이렇게 급변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교회가 지금이라도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복음을 살아내셔야 합니다. 말씀을 살아내셔야 합니다. 내 삶이 천국으로 변하는 것을 경험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교회에서 여러분이 말하시고 간증하시고 선언하셔야 합니다. 영혼을 바라볼 줄 아는 인격을 가지고 다른 이들에게 내가 가진 천국을 전하는 것.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 공의, 정의, 선함이 드러나는 천국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영원한 천국을 그 사람의 인생을 통해 엿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진중하고 가치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올해로 우리교회가 4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참 뜻깊은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교회가 50주년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10년 후 우리교회의 모습을 생각해보길 소망합니다. 우리 예배당이 바뀐 모습말구요. 우리 교회에 신자들이 들어와 예배를 드립니다. 감격에 찬 예배를 드립니다.  그 속에서 비신자들이 찾아와 함께 하나님을 만나길 간구합니다. 문제와 역경에 지쳐 찾아온 우리의 지인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예배를 드린 후에 함께 교제하면서 "어떻게 나의 삶이 천국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신자간의 심도 깊은 대화가 오갑니다. 근거없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생활과 기도생활, 교회예배생활을 통해서 점점 나의 삶이 천국으로 변해가는 것을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대화들이 오갑니다. 그렇게 소그룹은 끈끈해집니다. 그러면서 다음 한주가 살아간 후에 다음 주에 볼 때에는 함께 천국을 맛보고 오기를 함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며 헤어집니다. 
그런 "힘이 있는 소그룹"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자양2동을 넘어섭니다. 서울을 넘어섭니다. 우리나라를 넘어섭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기 위해서 아직 예수의 복음, 천국을 살아내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교회가 힘을 씁니다. 그렇게 우리교회가 믿음의 기둥, 마지막 시대의 대안이 되어가는 모습을 저는 꿈을 꿉니다. 아니 하나님이 시작하신 이 교회 하나님이 성취하실 줄 믿습니다! 그 첫발걸음, 저와 여러분이 말씀 앞에서 회개하며, 한 사람의 영혼을 귀하게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3. 결론
결론을 맺어보고자 합니다. 박노해 시인이 이런 시구를 썼습니다. "어찌할 수 없음 투성인 우리 인생에서 내가 어찌할 수 있고 어찌해야만 하는 것은 내 마음 하나이다" 세상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답답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며 열불이 나기도 하다가도 모든 걸 내동댕이 치고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박노해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내 마음만큼은 내가 어찌 할 수도 있고 또 어찌해야만 하게끔 하는 것도 나라는 사실을 되새겨 봅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했나요. 내가 내 마음을 내버려두고 내 삶을 진정성 없이 살 수도 있지만, 반대로 내 몸과 마음을 닦음으로서 가정을 올바르게 하고, 나라를 가르칠 수 있으며,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는 유교 "대학"의 격언이죠. 어찌 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나로부터, 내 인생에 대한 진중함으로부터" 시작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 마음만큼은 어찌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통해 얼마나 큰 역사를 이뤄내실지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인생 함부로 단정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천국을 만드는 그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들을 펼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을 진중함으로 만드시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진중함을 여러분에게도 요구하십니다. 그 어떤 목적보다도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만큼의 진중함"을 가지시고 이번 한주도 여러분의 삶 곳곳을 천국으로 만들어가시길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dXqHbnhwC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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