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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YAMEMORY
구속사 설교_F/가나안을 에덴으로_창세기(1-11장)

가나안을 에덴으로(3)_당신은 다스리는 자

by 우루사야 2022. 1. 22.

본문 : 창세기 6장 5-8절
제목 : 당신은 다스리는 자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1. 서론
1) 지난 주 잇기
우리 함께 인사합니다. 잘 오셨습니다. 다시 한번요. 샬롬, 천국을 만듭시다. 아멘. 감사드립니다. 지난 주도 천국을 만들고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도 말씀으로 이번 한주 천국을 향해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세속의 땅을 천국으로 만드는 시대의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첫주에는 아담과 하와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천국을 만들기 위해 만드신 나"라는 것을 기억하고자 했습니다. 지난 주에는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 천국은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오늘은 계속해서 천국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천국에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앞으로 우리가 어떤 포지션을 가지기에 이 땅에서 천국을 만드는 자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다스리는 자"입니다. 오늘 제목도 그래서 간단하게 "당신은 다스리는 자"라고 지어봤습니다. 저 천국에서 우리는 다스리는 자가 됩니다. 어떤 것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예화
조선왕조실록에서 가장 비운의 왕을 꼽으라면 아마도 많은 분들이 사도세자를 생각할 겁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영조는 자신의 아들이 다스릴 때를 대비하여 사도세자를 혹독하게 훈련시킨 것을 다들 아실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영조의 태도는 가장 중요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의 영향력"을 무시한채 선대와 후대간의 왕으로서의 관계만을 강조한 나머지, 사도세자가 정신적으로 이상발작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전문가들은 아마도 사도세자는 부자지간에서 채워지지 않은 정서적 문제로 인해 이러한 증상이 보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한 가지를 말씀드려봅니다. 여러분 천종호 판사 아시지요?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에 대해 전문적으로 판결을 내리는 분인데 호통판사로 유명하시죠. 부모들과 함께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들이 재판대에 왔을 때 사무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호통을 치고 부모고 자식이고 모두 혼냅니다. 게다가 자비롭게 대하지 않습니다. 혼쭐을 냅니다. 그게 그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더 유익하기 때문이겠죠. 그 판사님이 하신 인터뷰 중에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왜 청소년들이 이런 범죄를 짓는가?"에 대해서 물으니 "부모의 정서적 유대의 부재"때문이라고 답하시더군요. 많은 불량청소년들을 바라보며 부모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정서적 유대관계의 부재가 엇나간 길로 표출되어 범죄로 커진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두가지 예화를 통해서 한가지 질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녀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과하게 가지면 자녀가 사도세자처럼 되고, 덜 가지면 범죄청소년을 만드는건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러분은 원하든 원치 않던 다스리는 자, 그러니까 영향력을 줄 수 밖에 없는 자"라는 겁니다. 왕이 되어야만 영향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부모가 되어서 신경을 안쓴다고 해도 그것 자체가 영향력을 주고 있는 자라는 겁니다. 우리 자체가 "영향력을 내뿜는 다스리는 자"라는 것입니다. 


3) 주제

성경은 첫장에서부터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너무나도 간결하고 명료하게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형상, 그러니까 신이 특별히 지은 존재로서 이 땅을 다스리는 자"라고 말이죠. 여러분이 어떤 삶을 살든 여러분은 "어떤 색깔의 영향력을 내뿜으며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민주주의공화국에서는 국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죠. 그래서 대통령이 왕이 아니라 국민이 왕입니다. 국민이 자신이 다스리고자 하는 방향에 맞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지 나를 다스리는 왕을 뽑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한국기독교는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했던 것이죠. 이렇게 우리는 

알게 모르든게 내가 가정과 국가를 다스리는 자로 서있게 됩니다.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체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가정과 국가라는 땅에서 그치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해줍니다. 성경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당신은 더 초월적인 것을 다스리는 자"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요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천사도 흠모하는 인생"이라고까지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을 다스리는 자뿐만 아니라 "천국으로 만들어 다스리는 자"라는 우리의 역할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다스리는 자로 나타나시고, 우리를 다스리는 연습을 시키시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천국에서 우리의 역할이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다스리는 자로써 살아가야지, 다스림을 받는 자로써 살아가서는 결코 안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어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문제에 끌려다니지 말라고, 돈과 죽음에 매여있지 말라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십자가라는 "구속의 과정" 속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고, 사랑을 품을 수 있고, 용기와 소망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다스리는 자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결코 스스로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없습니다. 돈으로 미워하고 싸우면 싸웠지 결코 자기 손해나면서 품지 못합니다. 지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잘 굴려 부동산 부자가 될 수 있을지언정 다 죽어가 자살하기 직전의 사람을 "생기가 넘쳐나고 소망이 넘쳐나는 사람으로 인도할 지혜"를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 "초월적인 것을 다스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2. 본론
1) 땅을 다스리는 자

그런 점에서 노아의 홍수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노아의 홍수" 초반부 역할을 해주는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홍수심판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이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다스리는 자로 세운 인간이 오히려 다스림을 받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질서가 잡히길 기다리고 기다리시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이 질서를 잡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굴복당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어 다스리라고 보냈지만, 인간은 오히려 죄에게 다스림을 받았다는 겁니다.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지요. 본문을 한번 살펴볼까요?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신 것에 대해서 한탄하십니다. 그런데 6절을 보니 사람을 뭐라고 부릅니까? "땅 위에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늘 아래에 있는 사람, 물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닌 땅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12절에는 사람이 부패한 것을 "땅이 부패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13절에서는 하나님이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사람과 땅이 함께 묶여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땅의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서는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땅은 하나님의 창조원리 안에서 하나로 묶여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람이 땅을 다스리는 존재인데 사람이 타락하니 사람이 다스리는 영역 안에 있던 땅의 세계가 다 같이 타락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땅을 심판하기로 하십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가축까지 모두 심판하신다고 하십니다. 7절입니다. 

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사람만이 아니라 지면을 쓸어버리겠다고 하셨고 더 나아가 가축, 공중의 새까지 그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 가축, 공중의 새 모두 "땅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창세기 1장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다스리는 영역 모두를 "정화시킬 필요성"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한 한 가지를 명심하고 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의 "다스리는 자"로 세우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인간만의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지구의 비극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서론에서 무의식적으로 자녀에게 영향력을 펼치는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말과 행동, 결정, 판단 그것들에 대해서 진중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통치행위입니다. 다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말과 행동이 1000원짜리를 건내는 것일찌라도, 어린아이에게 대하는 것일찌라도 그것은 "통치행위"라는 겁니다. 우리의 위치에 대해서 우리는 분명히해야 합니다. 

요즘에 큐티, 성경통독, 새벽말씀영상 여러분 열심히 하고 계십니까? 그 중 하나라도 여러분이 진중하게 시작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제가 아이들을 아침에 등교 등원을 시키고 예배당으로 다시 들어옵니다. 예배당이나 책상에 앉아서 묵상과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샌가 일에 쫓겨있거나 과거에 대한 후회, 정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감, 현실에 대한 불안함, 미래에 대한 동요 등이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그것들이 내 머리를 혼돈스럽게 하고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합니다. 내가 그렇게 외치던 예수 십자가에 대한 믿음이 어디있는지 찾기 시작합니다.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나의 요동치는 모습을 한바탕 목격하고나면 저절로 외치게 됩니다. "주여 도와주소서." 
이번 주에 목회세미나를 줌으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에 대한 주제였습니다. 코로나 시대에서 어떻게 신앙공동체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죠. 그 세미나를 듣고 나서 참 허탈했습니다. 앞길이 보이지 않았거든요. 매일 성경을 보고 설교를 하는 것과 별개입니다.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두고 승부를 봐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생깁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통치행위"를 할 수 있는 겁니다. 저는 이 자양동에서 승부볼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아니고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그래서 힘들기도 합니다. 그냥 전도지들고 뿌리는게 더 편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압니다. 지금 "내가 다스려야 할 것은 나의 불안감과 욕망"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자리에 있는 겁니다. 
금요일에 있었던 조계종 승려대회를 보셨을 겁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떤 스님과 목사님의 피드백을 보게 되었습니다. 두 분 다 같은 맥락으로 말씀하시더군요. 언제 한번 약한 자를 위해서 이렇게 모여보았느냐고. 개신교가 이렇게 당하면 개신교는 다를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정말 진정한 영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는 자"입니다. 세력확장으로, 힘으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다스릴 줄 아는 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의 힘으로 이 땅을 다스려야 하는지 계속 보겠습니다. 

 

2) 물 위를 걷는 자

그럴려면 한가지 질문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홍수, 물로 땅을 심판하셨는가? 하나님은 왜 물로 다스렸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합니다.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은 혼돈하고 공허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어쨌든 "긍정적이지는 않습니다. 부정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수면, 영어성경은 water라고 번역하고 있는 이 물에 운행하고 계셨습니다. 물을 다스리고 계셨죠. 천지창조가 시작합니다. 3째날이 되니까 하나님은 물을 모으십니다. 그것을 바다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물이 모이니까 "뭍이 드러납니다. 육지가 생긴것이지요." 그것을 하나님은 땅이라 부르셨습니다. 땅을 덮고 있던 물을 모으니까 땅이 생긴 것입니다. 반대는요? 물 모은걸 다시 풀면 땅이 덮이는 겁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 홍해가 갈라진 사건이나 요단강을 건넌 사건을 기억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을 다스리는 힘을 보여주셨습니다. 물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땅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물은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는 영역입니다. 여기는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영역입니다. "신적이고 영적인 영역"인 것이지요. 그래서 땅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을 거절하니 하나님의 심판이 다른 것이 아니라 "창조순리"에 따라서 모았던 물을 다시 풀어버리시는 겁니다. 그래서 땅, 땅으로 만든 가축동물, 땅으로 만든 인간이 함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물이 갑자기 어디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순리에 따라 나타난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노아의 홍수기간이 다 끝나고 물이 빠져서 산이드러나고 나무와 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물을 모아서 뭍이 드러나듯이, 제2의 창조로써 하나님은 다시 시작하시기 위해 물을 모으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창세기의 요소 하나하나가 아무렇게나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순리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을 보실까요? 

 

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모든 사람이 홍수로 심판을 받을 때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은 방주에 태우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물 위에 있게 하셨습니다. 심판받는 땅의 것들은 모두 물 속에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물 속에 있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죄, 심판, 저주와 연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6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시32)

경건한 자는 홍수가 영향력을 못미칠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제가 아내와 연애할 때 수영장에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인간이 어찌할 수 없음) 그래서 물은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은 땅을 다스리는 자라는 것은 위에서 알겠는데, 성경을 좀 더 읽어보면 하나님이 땅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람에게 "물의 영역"도 주셨다는 겁니다. 진짜 물, 바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다스리지 못하고 하나님만이 다스리는 곳인데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영역"이 있다는 겁니다. 노아의 방주가 어디있었습니까? 홍수가 범람해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고 홍수 물 위에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메시지를 예수님도 같이 주신 것이 있습니다. 복음서를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2-33절입니다. 

22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23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24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25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26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27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28베드로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29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31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33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이 사건은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일어났습니다. 22절을 보니 오병이어 후에 사람들이 몰리니까 "예수님이 직접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제자들을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리고서는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십니다. 해가 질때까지, 그러니까 밤이 되도록 계십니다. 시간과 장소를 의도적으로 설정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어쨌든 그러다가 25절 보니 밤 사경 그러니까 새벽이 되도록 제자들을 갈릴리 호수 위에 두시고, 제자들에게 굳이 "바다 위로 걸어서" 다가오십니다. 그 때 베드로가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하며 호기롭게 다가서려고 합니다. 물 위를 걷다가 예수님께 가기 전에 바람이 세차게 부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며 빠졌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의도를 잘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 위를 걷는 훈련을 시키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러신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의 "포지션"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초자연적인, 우리가 알 수 없는, 우리가 다스릴 수 없는 영역을 다스려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떡과 물고기로 배를 채우는 육적인 문제를 해결한 후에 그 뒤에는 밤시간이 다되도록 제자들을 바다 한가운데로 보내시고 굳이 바다 위를 걸어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와 같이 예수를 따라 우리도 먹을 것을 다스리는 육적인 것을 다스리는 존재이자 초월적인 것들을 다스리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베드로에게 "왜 쓸데없이 나에게 오려하느냐"라고 질책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이에요. 반대로 생각하면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않았다면 너는 물을 걸었을 것이다. 나와 같이 물을 다스리는 자, 초자연적인 것을 다스리는 영적 세계의 왕의 존재, 아담에게 처음에 계획하셨던 하나님이 바라는 사람의 모습"을 확인했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숨어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보이는 땅뿐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영역"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할 때,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며 예배할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딸의 아버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2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

우리는 결코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스려서" 천국을 만들으라고 보내셨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인간이 타락해 땅과 함께 심판받을 자에서 "초월적인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다시 옆 사람에게 고백해봅시다. 당신은 다스리는 자입니다. 

 

 

3. 결론

지난 주에 조계종 승려대회를 비판하는 한 스님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습니다. 민주화운동 때에나 노동자나 약자들을 위한 대회가 한번도 없었으면서, 이번에 문화재출입료에 대해 비판한 한 국회의원과 정부에 대해서 항의하기 위해 모인 것이 부끄럽다는 인터뷰였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과연 수행자의 길이 맞는지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는 인터뷰였습니다. 그리고 개신교에게도 이 질문을 같이 던져봅니다. 우리는 과연 나를 잘 다스렸는가?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한다는 말이죠. 많은 종교인들이나 신앙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격언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영적원리"로 우리를 닦고 있나요?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다스리는 자라는 사실로 여러분을 다스리고 여러분의 환경을 다스리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람 모두는 "이 땅을 다스리는 존재"입니다. 게다가 구원받은 여러분은 "심판 위에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주에 태우셔서 물 위를 걷게 하십니다. 구원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이 땅을 다스리고, 물 위를 걸으며, 하나님 앞에 한 발걸음 한 발걸음 살아가십시오. 정치를 다스리시고, 가정을 다스리시고, 사회와 직장을 다스리시고, 나의 재물을 다스리시고, 나의 죄를 다스리시고, 나의 영혼을 다스리십시오. 그리할 때 여러분의 인생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신학교 학부 때 동기들을 만났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제 안에 있던 허영을 보게 되었습니다. 과거 20대때에 활발하게 사역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인도했던 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마음의 요동을 보며 참 나를 다스리지 못한다는 사실에 모임 끝나고나서 돌아오는 길에 찝찝하기가 그지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묵상해보니 "현재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현실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집에 와서 아이들에게 풍성하게 대하지 못하고 짜증을 부리는 제 자신을 회개하며 참 못난 사람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말씀을 준비하며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하고 깊은 의도와 뜻을 확인하며" 나 자신의 위치는 내가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가장 최고의 것을 주셨음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주도 여러분의 삶이 이와 같아지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나 자신의 고귀함과 하나님의 뜻의 위대함을 깨달으시며, 이번 한주도 명예로움과 넉넉함을 가지고 승리하시는 한 주 되시길 소망합니다. 

 

 

 

 

 

 

 


3.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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