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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 설교_F/가나안을 에덴으로_창세기(1-11장)

가나안을 에덴으로(4)_넘어서는 은혜

by 우루사야 2022. 1. 29.

본문 : 창세기 7 11-16
제목 : 넘어서는 은혜

1. 서론
1) 예화 "돈룩업" 영화
여러분이 아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배우가 2 만에 복귀작으로 찍은 "돈룩업"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천체물리학자로 하늘을 관찰하는 이로 등장합니다. 거대한 혜성이 6개월 후에 지구에 충돌해 모두가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백악관을 비롯해 정치계, 경제계, 방송계, 연예계, SNS 까지 사실을 말합니다. 하지만 모두 사실에 마땅한 대처보다는 은폐하거나 왜곡하려 합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혜성이 지구에 충돌해 멸망당할 "이라는 사실은 모두 잊은채 멸망에 다다르게 됩니다.
. 위를 그러니까 하늘을 쳐다보지마. 다시 말해 고리타분한 문제 생각하지말고, 아래를 . 지금 순간을 만끽해!  라는 세상주류를 풍자한 영화입니다. 그간 환경운동에 앞장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행보를 보면 영화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 생각해볼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메시지는 성경에서도 자주 등장하곤 합니다. 특히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 노아의 방주와 홍수 사건은 더욱 그러하지요. 창세기 전반부가 1-11장인데 4장이나 사건에 집중하는 것을 보면 노아의 홍수가 의미하는 "심판의 "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있겠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잠들어 버린 신부로 표현하시기도 하셨고, 바울은 "도둑같이 임하는 심판날"이라는 유명한 표현을 했습니다. 모두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은 채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지적해줍니다.  

2)주제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게 해주는 충고에 대해서 유의깊게 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마지막 , 도둑같이 임하는 , 심판날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혜성과 같이 우리의 힘으로는 어떻게 없는 날을 어떻게 하면 넘어갈 있는지, 넘어설 있는지를 너무나도 자세하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 메시지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셨습니다. 심판을 받아 누군가는 천국에 가고 누군가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의 . 날이 가까워옵니다. 모든 것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판단하시는 날이 가까워옵니다. 누군가는 땅을 지옥으로 만들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땅을 천국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땅에 오셔서 지옥을 만든 가라지들은 모두 불태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알곡으로 천국을 만든 이들과 함께 땅을 처음에 계획하셨던 에덴이자 하나님의 왕국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된다는 겁니까? 도대체 알곡은 어떻게 만드는 겁니까? 지난 주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셨던 "믿음이 적은 자여"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셨던 "죄를 다스리라" 말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죄를 다스리며 초월적인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기적을 만들어내는 초월적인 , 마치 위를 걷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를 받는 것에 만족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 자체가 믿음으로 오병이어를 베푸는 존재로 초월적인 존재로 살아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출애굽 1세대가 홍해를 건너고, 출애굽 2세대가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예수님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는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위를 걷는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곁에는 아담때로부터 마지막 날까지 복음으로 살아낸 자들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게 것입니다.

12하늘로부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11)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은 인간을 땅에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위를 걷는 존재, 위에서 자유한 존재, 심판을 넘어서는 존재,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진멸당하지 않고 거룩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만드셨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3) 본문잇기
그런 점에서 오늘은 노아의 홍수사건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노아를 어떻게 물을 걸어 심판을 넘어서서 초월적인 존재로 세워주시는지를 살펴보며, 우리에게 그런 계획이 있으신 하나님을 깨닫고 우리도 믿음으로 살아갈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먼저 11-12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2. 본론
1) 심판의

11노아가 육백 되던 둘째 열이렛날이라 날에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12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지난 주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인간은 땅만을 다스릴 뿐이지, 하늘에서 비를 내리는 것이나 물을 땅으로 모으는 것은 인간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땅에서도 인간이 어찌할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본래 계획은 인간을 초월적인 존재로 세워 땅을 다스리는 존재로 세우려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땅에서 범죄하기 시작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가인의 살해. 이런 죄들은 더욱 퍼져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지으심을 한탄하시기까지"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심판하시기에 이르릅니다.
다행히도 하나님은 "용서" 통해 택한 사람들을 " 위를 걷는 , 하나님이 다스리는 물에 오르는 " 만들어주시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심판은 부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택하심을 믿는 자들에게는 긍정적이다 못해 오히려 기다리고 고대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특히 노아가 그런 은혜를 입었습니다

6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 근심하시고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9이것이 노아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모든 사람이 한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서 노아는 의인이 되고, 당대에 완전한 자가 되어,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노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던 겁니다. 여러분. 코로나의 위기, 여러가지 문제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믿습니다. 

 

본문으로 돌아오면 11절에 보니 노아는 600살이 되던 해로부터 이야기가 시작이 됩니다. 이번 년도가 중요한 것은 아담의 족보에서 찾을 있습니다. 노아의 증조 할아버지는 에녹으로 365년을 살다가 하늘로 승천했습니다. 그런데 노아만 당대 완전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에녹이 먼저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에녹은 그러면서 자신의 아들 그러니까 노아의 할아버지의 이름을 ", 가시"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노아에게 말했겠죠. 그런 것인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써 세상이 어떤 심판을 당할지를 증손자 노아에게도 말씀해주셨을 겁니다. 어쨌든 그렇게 므두셀라가 죽던 해가 노아가 600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홍수 심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을 계속 바라보고 계시고 판단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정산하실 것입니다. 심판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번에 물을 쏟아내지 않으십니다. 40일동안 내리게 하십니다. 그리고 물들이 나타나는 것을 모세는 "하늘의 창문, 그리고 깊음의 샘물들이 터졌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비가 내리는 것이 없었으므로 모세는 "하늘에 구멍이 나듯 비가 내렸다"라고 표현한 것이겠죠. 그런데 깊음의 샘물들이 터졌다에서 터졌다라는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바카"라고 부르는 동사인데 의미가 "무언가로부터 벗어나다"라고 해석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놓임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40일동안 심판을 베푸신 것이지요. 그럼 하나님께 붙잡힘바 물부터 살펴볼까요? 창세기 1장입니다.

6하나님이 이르시되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9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은 둘째날에 하늘을 만드셔서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으로 나누어 놓으신 것이지요. 그런데 노아 600 때에 하늘에 창문이 생기어 물들이 쏟아지고, 땅의 샘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합니다. 하늘의 창문이니 하늘에 있는 물이 아니라 하늘 외에 다른 곳에서부터 오는 물이었습니다. 아래 깊은 샘물들이 터져나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9절을 보니 "천하의 " 그러니까 하늘 아래에 있는 , 궁창 아래의 물인 것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실 하늘을 통해서 갈라놓으신 물들로 심판하신 것이지, 바다가 단순히 넘쳐서 일부 지역을 침하시킨 것으로 없다는 겁니다. 


2) 심판의 이유
이렇게 노아의 홍수는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러했습니까? 6장입니다. "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4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6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람의 딸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없으나 어쨌든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고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용사, 고대에 명성이 있는 "라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신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차있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들어와 지식을 낳았으니"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결혼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찌된 이유로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세상에 악한 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명성은 얻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탄하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자신을 겸허하게 돌아볼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심판까지 내리신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과의 타협과 결함으로 인해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바벨탑의 선조들의 모습, 하나님이 높이시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인간의 타락함에 대해서 한탄하시는 아니십니까?
이번에 젊은 이들 사이에서 굉장히 회자가 여성 인플루언서가 있었습니다. 분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입에서 회자가 되었냐면 그대로 금수저 집안이었고 괜찮은 학력에 남성을 대할 가지는 도도함, 자신감이었습니다. 남녀 구분할 없이 많은 이들이 사람처럼 되고 싶어했었기 때문에 공중파 방송이 아니라 티비 다시보기와 같은 매체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전국적으로 인기가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금수저 집안이 아니라는 증언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부유한 집안이 아니라는 정황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밖에도 분이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드러냈던 명품소품들이 가짜라는 사실로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과연 사람만의 문제인가? 사람이 이렇게 이유에는 그를 따르는, 명성이 있는 사람, 높아지고 싶은 욕구, 다른 사람들로부터 용사라고 불리우고 싶어하는 우리의 무의식적인 기류가 사건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노아 시대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인간은 스스로 높아지고 싶어하는 욕구로 가득합니다. 그것으로 살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유명해지는 것은 우리와 동떨어진 이야기로 치부할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강신주 교수가 이런 강연을 했더군요. "인간은 미숙아로 태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박상제 집사님께서 얼마 전에 송아지 사진을 보내주시기도 하셨는데, 여러분 송아지가 태어나면 어떻습니까? 바로 일어서서 엄마젖소의 젖을 찾아 먹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엄마가 가져다 대줘야 그나마 빨아들이는 본능으로 자신의 생존본능을 찾아갑니다. 인간은 그렇게 12개월 동안 엄마품속에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속에서 젖만 먹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반응을 보고 배우며 엄마의 가치관을 함께 습득한다고, 그러면서 독립할 때까지 아이는 엄마 속에서, 엄마 손을 붙잡고, 엄마와 함께 있으면서 엄마의 가치관을 통해 인정욕구를 해결하는 미숙아로 지내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미숙아이기에 "어떤 부모에게서 어떤 영향력을 받을 것인가" 매우 중요하다라는 겁니다. 엄마가 인정욕구에 시달리는 존재라면 아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없는 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실수하는 의사소통 중에 하나가 "~~하면 ~~해줄께"라는 의사소통입니다. 아이가 ~~ 해야 하는 이유와 가치에 대해서 납득이 가도록 설명해주고 스스로 깨달음을 통해서 움직이게끔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손쉬운 육아를 위해 자신이 받아온 그대로 필터링 없이 아이의 인정욕구를 사용하는 것이지요. 부모로부터 건강한 인정욕구를 해결한 사람은 결코 아이에게 그렇게 요구하지 않겠죠.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미숙아입니다. 부족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용사가 되려고 하는가? 우리는 세상에서 눈에 띄고 싶어 하는가? 인정을 받아야 하는가? 저는 그런 점에서 교회의 존립에서도 문제를 짚고 넘어가보고자 합니다. 교회는 존재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서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실체가 없습니다. 비춰주는 것이 목적입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끔 하는 것이 빛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보이고 예수님을 알아가게 되고 성령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끔 해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지, 우리가 보이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소금은 말할 것도 없지요? 음식재료가 메인이지 소금이 메인이 없습니다. 나아가 소금이 역할을 하지 못하면 버려져 밟힐 것이라 예수님은 말씀하셨죠.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세상이 봐야 것을 보여주는 역할이지, 결코 우리가 드러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들이 검은 옷을 입는 이유가 그것이지요. 악기의 소리와 멜로디에 청중이 집중할 있도록 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교향곡이 세상에 퍼져나갈 있도록 하는 통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것을 잊는 순간 우리도 버려져 밟힐 밖에 없는, 땅과 함께 심판당하는 먼지뿐인 자들임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심판은 택함없는 자들에게는 재앙이지만, 택한 자들에게는 초월의 시간이 됩니다. 

 

3) 구원의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13-16절로 이어집니다.

13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 ,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며느리가 방주로 들어갔고14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종류대로, 모든 가축이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종류대로, 모든 새가 종류대로15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16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노아와 가족들이 방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짐승들이 종류대로 쌍을 이뤄 노아에게로 나아와 방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서는 "여호와"께서 문을 닫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 몇몇가지를 있습니다. 이 손길로 노아는 드디어 심판을 넘어서서 물 위를 걷는 자가 됩니다. 오병이어를 넘어서서 오병이어를 베푸는, 인류의 시초이자 동물들을 구원해내는 자로 서게 됩니다. 

(1) 방주 - 종류대로의 회복
14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가 그 종류대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마련시키십니다. 여기서 방주는 사실 배라고 말하기가 힘듭니다. 사각형의 박스라고 말하는 것이 쉽겠습니다. 박스 형태로 나무상자입니다. 하나님은 배에 역청이라는 것을 발라 방수가 되게끔 하셨습니다. 물을 차단할 있는, 그러니까 심판을 넘어갈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신 것이지요. 창세기 1:2절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신다는 표현을 지난 주에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쥐고 있던 하늘 위와 아래의 물을 놓으심으로써 세상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방주를 마련하셔서 위에 있게 하서 "물을 넘어서는 " 노아를 세워주신 것이지요.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서 심판을 받을 밖에 없는 인정욕구로 가득한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심판으로부터 보호해주십니다. 우리의 영혼까지 방수시켜주시는 예수의 보호 아래서 우리는 심판을 넉넉히 넘어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이지요. 

(2) 동물들 - 생명의 기운의 통로가 됨
15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번째로 동물들이 방주로 들어오게 됩니다. 여기에는 육식동물도 있고 초식 동물도 있을 겁니다. 아무리 각각 방을 만들어주었다고 해도 이들의 본능을 어찌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게다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은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며 다스렸던 아담의 모습을 노아에게서 찾아보게 됩니다. 방주라는 공간에서 노아는 본래 아담의 첫모습을 회복하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부활체로 시공간을 뛰어넘으셔서 우리에게 찾아오셨듯이, 우리는 본래의 모습을 찾게 것입니다. 이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존재의 모습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스리는 자로서의 우리의 모습을 포함합니다. 

(3) 문을 닫아주시는 하나님 - 내 인생의 기적
16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마지막으로 16절에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표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과 초자연적인 손길을 동시에 느낄 있습니다. 방수가 되어야 하는 방주인데 동물들이 드나드는 문이니 문으로 지어진 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닫으시고, 방수 마무리까지 해주심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이런 하나님의 손길로 노아는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넘어서서 위에 오르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지옥을 만들고 있는 자들 사이에서 "천국" 만들어 가는 초월적인 자들임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보고 기도를 하는 이유는 나의 성공, 안락, 평안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천국" 만들어가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명성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가정, 직장, 이웃, 교회에게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노아가 되어야합니다. 방주가 되어야합니다. 

 

3.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번 한주 어떤 삶을 계획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진중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돈을 향해서도 아니고, 명예를 향해서도 아니고, 욕망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천국을 곳곳에 만드시고자,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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