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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YAMEMORY
구속사 설교_F/예수따라_마가복음

예수따라(7)_집으로

by 우루사야 2022. 1. 1.

본문. 마가복음 16장 14-20절
제목. 집으로

1. 서론
1) 예화
여러분, 2002년 하면 월드컵이 떠오르시겠지만, 그 당시 많은 공감대를 형성했던 것이 나타났던 때이기도 합니다. 바로 "집으로"라는 영화가 개봉했었습니다. 알아보니 작년이겠죠. 21년 4월에 그 영화 주연이었던 김을분 할머니께서 소천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어쨌든 그 영화의 줄거리는 평소 만남이 적어 애정이 없던 외할머니와 손자가 함께 좌충우돌하기는 하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며 점좀 애정을 쌓아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제 아들이 사회과목 공부를 하는것을 보고 있었는데, 이 영화를 보며 수업을 하더군요. 단원이름이 "가족구성원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족이라함은 "함께하는 것"이 역할이겠죠. 저도 조부모님께서 우리나라 최남단 고흥에 계시기에 일년에 2번을 뵈면 많이 뵐 정도로 정서적 교류는 물론이거니와 물리적으로 함께 한 시간도 적었습니다. 그럼에도 제게 조부모님에 대한 애정과 기억이 남아있는 곳은 순전히 부모님의 역할이었습니다. 때가되면 어김없이 안부전화를 드리십니다. 그리고 명절에 너무나도 먼 길이지만 저희 온가족은 고흥으로 머나먼 길을 당연히 떠납니다. 가족은 함께하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기때문이죠.


2) 주제
오늘 설교 제목을 "집으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 중요했던 장소로 오늘까지 포함하여 7주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집"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셔서 도착하신 곳은 "하나님 오른쪽"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곳이 예수님께 집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있는 그곳이 집이고 천국인 것이지요. 예수를 따라가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집으로, 하나님 오른편으로 갈 줄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까요? 그냥 이렇게 살아가면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무어라 말씀하시나요?
제가 "집으로" 영화를 먼저 소개해드린 이유가 있겠지요. 네. "하나님과 가족"이 되어야 "하나님이 계신 곳이 집"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따라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셔야 합니다. 내 가족이 있지 않은 곳이 어떻게 천국이 되겠습니까? 만약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면서도, 하나님이 아버지로 믿어지지 않고 느껴지지 않으신다면 내가 바라는 천국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다시 생각해보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가 계신 곳이 아닌 부귀영화를 누리는 곳이나 파라다이스를 가고 싶은 것은 아닌지 우리신앙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로 하나님이 불러주신 이유는 피조물을 아들로 삼아가는 과정입니다. 단군신화에서 동물이 인간이 되려면 쑥과 마늘을 동굴에서 40일동안 먹지요. 하지만 성경은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이고 근원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신의 아들이 될 수 있는지 말해줍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신 이 인생, 예수를 따라 "믿음의 길"을 걸어가라고 말이죠.

광야에서 아버지를 믿고 다 내려놓는 길, 믿었던 이들로부터 배척당하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계속 걷는 그 길, 아버지의 섭리를 믿고 버릴 것은 버리고 최소한의 것만 가지고 떠나는 길, 하나님의 계획대로 귀신에게 승리하며 행복한 길, 어둠과 죽음을 아버지를 향한 믿음으로 돌파하는 길, 죽음을 너머 영원한 아버지와의 삶이 있음을 고백하며 나아가는 그 길. 이 믿음의 여정, 하나님과 함께하는 순간이 있어야만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3)본문잇기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서 제자들을 만나시면서 해주신 이야기들입니다. 아버지 집 낙원을 먼저 다녀오신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우리의 맏형이 이렇게 이렇게 아버지와 믿음의 시간을 이 땅에서 보내야 한다. 그래야 집에 올 수 있다고 말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22년 우리가 어떤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하는지, 우리의 도착지가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가 가득하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믿음이 없고 완악함
오늘 본문 14절을 보니 "그 후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전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본래 단락이 9-20절까지인데 길기 때문에 제가 14절부터 잡긴했습니다만, 연계되어 있기에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토요일 안식일 후에 이른 아침에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 시신에 향품을 바르러 온 여인들도 아침일찍 갔지만 그보다 더 이른 시간에 예수님은 부활하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심을 보여주시며 예수를 따르던 자들에게 알리라고 하셔서, 마리아는 알렸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 믿지 않던 이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는데, 다른 복음서와 대조해봤을 때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두 사람이 갈 때 예수께서 그들과 동행하셔서 예수가 고난받고 부활하셔야 한다는 구약을 설명해주십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그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알렸지만 그들도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이제는 예수님께서 11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14절입니다.

14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없는 것과 완악한 것을 질타하셨습니다. 무엇에 대한 믿음이었습니까?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이었습니다. 죽는 것을 모든 사람이 다 봤습니다. 시신을 매장하는 것까지 모든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다 목격을 했습니다. 그럼 사실 믿지 못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믿지 않을 수도 있지요. 의심이 들 수도 있구요.

그런데 사실 예수님은 지금 단순히 몇몇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아서 답답해서 혼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성경이 계속해서 말했고, 예수님이 계속해서 수난을 당하는 이유와 목적을 공생애 동안 말씀해오셨는데, 그래서 실재로 예수님이 죽으시기까지 했다면, 그럼 이제는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와 목적에 의해 "부활하실 것"을 염두해 두고 있기라도 해야했고, 그래서 실재로 몇몇 사람들이 부활을 목격했다면 성경과 예수님의 살아생전의 말씀이 점점 이뤄가는 것을 눈치채고 있어야 했다는 말인 것이죠.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나사로를 살리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증거했던 마리아와 두제자를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미련을 남기고 있거나 정신착런증환자로 치부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간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을 귓등으로 들은 것이죠.


우리는 여기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믿음이 없음을 완악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완악을 다른 번역들은 완고함, 고집, 마음이 무딘 것, 마음이 굳은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것을 보여줘도 그들은 결국 "자신의 생각과 경험, 주장"만 가득하여 "하나님의 섭리와 신비"를 볼 수 없는 영적 장님이라고 질타하시는 겁니다. 혹여나 지금 우리가 이런 마음은 아닌지 돌아보아야하겠습니다. 내 삶 속에 22년도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놀라운 신비와 기적, 섭리로 우리 인생을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하나님에 대해서 마음이 닫혀있고, 말씀을 귓등으로 들으며, 고집과 완고함으로 가득차 있다면 결코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고집이라는 것은 "마음 속에 남아있는 첫인상을 재생하는 일"이라고 사전은 정의합니다. 어떤 사람, 물건, 글, 이야기의 본인이나 본작가가 "본의도"를 아무리 설명하고 말해주어도 "자신의 생각 안에서 이미 결론을 내려버린 사람"을 뜻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이미 "하늘 아버지와 부활"에 대해서 마음을 닫고 있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아무리 설명해드려도 여러분은 깨닫지 못할 겁니다. 자기자신을 우상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 아니면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존재"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나타나셔도 될 일이 아니란 것이지요.

2) 배워야 한다.
그럼 어떻게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나타나고 목격하여도 도무지 믿지 않는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실 때까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사라졌다 나타나셨다를 반복하시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신체로 반복해서 나타나 꾸짖고 가르치신 덕분에 그들은 성경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예수님의 가르침의 본의도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계속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집과 완고함을 점점 죽여야 합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라서 아버지 집으로 향해야 하겠습니다. 1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14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여기서 "꾸짖으시니"라는 표현이 등장하죠. 누가복음 26장에서는 좀 더 자세하게 예수님이 어떻게 꾸짖으시는지를 말해줍니다.

25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27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의 의미와 목적, 그것을 어떻게 삶으로 적용하며 살아내야 할지에 대해서 모세오경과 선지자의 글, 그러니까 구약을 통해 설명하고 계시는 겁니다. 다 이미 하나님이 말씀해놓으셨던 것들을 귓등으로 듣고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해버렸던 것들을 다시 새롭게 다잡아 주시는 겁니다. 내인생의 결말을 내인상과 생각으로 고정화시킨 것을 부수어야 합니다.

예수가 내 성경책 안에만 있으면 예수님은 예수님이지만, 나의 예수님은 되지 않습니다. 결국은 내가 그 분께 마음을 열고 들은 것은 듣고 깨달을 것은 깨달아야 합니다. 삶 속에서 예수님의 중요한 장소들이 왜 나에게도 중요한 것인지 배워야 합니다. 배우지 않고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우리 담임목사님께서 강조하시는 "구속사"가 정말 중요한 신학입니다. 그래서 내년 40주년을 맞이해서 담임목사님이 쓰신 구속사관련 구절과 글들을 제가 취합을 하고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날마다 묵상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우리교회는 개인성경묵상 큐티와 그에 대한 해설로 새벽강단을, 그리고 성경통독을 진행하고 있지요. 이제 3월 즈음에 가서는 성도님들이 원하는 인생의 질문에 맞는 성경책별 모임도 가지려고 합니다. 화상으로 연결해서 손쉽게 성경을 알아갈 수 있도록 말이죠.

여러분, 과연 내가 올바른 집으로 가고 있는지, 내가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그 길을 가고 있는지 무엇으로 확인하고 계십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에서 예수님에 대한 예언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제가 7가지를 말씀드린 것도 그 일환이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교회에서 제공되는 말씀 프로그램에 할 수 있는 만큼 그러나 적극적으로 참여하셔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예수따라 하나님께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되시길 소망합니다.

처음이신 분들은 매일 큐티요약 메시지를 올려드리겠습니다. 좀 더 하실 수 있는 분들은 큐팅와 새벽영상을, 좀 더 알기 원하신다면 통독을, 좀 더 원하신다면 성경공부모임으로 오셔서 예수님에 대해서 배우십시오. 집으로 가는 길 성경이 말하는 그 길이 있습니다. 엠마오 두 제자처럼 "32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우리도 서로 말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3) 예수따라 집으로 가는 길
우리가 배워야 할 사람임을 알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 부활하신 예수의 의미,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의 태도와 방향을 하나하나 알아가게 되면 저절로 "믿음"이 점점 성장하게 됩니다. 그것이 "예수와 손잡고 따라가는 삶"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느샌가 그 믿음의 길을 마쳤을 때에는 개선장군 예수 그리스도 곁에서 천국에서 환호성을 받으며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아 우리는 주님의 오른편에 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나니아 연대기를 아실 겁니다. 그 이야기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사자 아슬란으로 등장하고 사단마귀권세가 얼음공주로 등장합니다. 4남매는 아슬란과 함께 그 전쟁에 참여하게 되어 승리하였고 마침네 아슬란으로부터 왕권을 받게 됩니다. 이는 사실 작가 C.S. 루이스가 손주들에게 성경이야기를 쉽게 설명해주기 위해 만든 소설이었고, 말씀드린 부분은 우리가 천국에서 겪게 될 것들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믿음의 생활"을 통해서 우리의 고향과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우리의 믿음의 생활이 단지 깨닫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의 태도와 방향으로 나타나는지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크게 두가지를 말해줍니다. 먼저는 15-16절입니다. 사람과의 직접적인 관계의 변화입니다.

15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음이 성장할 수록 목표가 분명해집니다.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 집을 가기 위해 예수의 손을 더 꼭 붙잡고 따라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손을 더 꼭 붙잡는 사람, 확신이 있는 사람일 수록 곁에 있는 자들에게 "함께 붙잡으라"고 말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복음전파지요. 그 손을 붙잡고 가는 자는 구원이요, 그 손을 붙잡지 않는 자는 결국에는 예수가 받으신 정죄를 자신이 떠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본인의 판단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계속 가르치고 알려주게 됩니다. 예수의 손을 왜 잡아야 하는지, 우리의 인생이 마침내 스스로 결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래서 그것을 곁에서 도우시고 책임져주시는 예수가 얼마나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인지에 대해서 말이죠.

두 번째는 사람과의 간접적인 관계의 결과들입니다. 17-18절입니다.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예수의 손을 붙잡고 따라가는 자들이 예수를 잡으라고 가르치면서 동시에 겪게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축귀, 새로운 방언으로 하게 되는 기도와 예언, 뱀과 독이 있는 어려운 환경에서 해를 받지 않게 되는 고대사회처럼 현대사회에서 온갖 장애물과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보호와 은혜, 병든 자를 위한 기도와 치유"입니다. 이러한 결과들은 마가복음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이나 베드로, 야고보 서신들에서도 나타나는 것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과 혀로 상대를 죽이고 상처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 우리의 입과 혀로 그들을 위한 기도, 선포, 전파, 가르침으로 병을 낫게 하고 정신이상자가 또렷해지며, 하늘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방언을 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천국을 이 땅에서 보여주는 "현현"입니다. 즉 내가 천국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은 내가 천국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로 이단운운하기 전에, 과연 내가 천국을 증명하는 사람인가 먼저 볼 수 있어야 하겠지요. 우리는 이렇게 점점 나로 천국을 나타내면서 예수를 따라 아버지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면 천국의 삶을 사느라 애쓰고 고생한 나를 안아주시고, 우리는 눈으로 본적도 없고 안겨본 적도 없지만 그 분이 나의 아버지임을 단번에 알고 그 분 품에서 눈물을 흘리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며 우리를 위로해주시고 가장 큰 잔치를 벌여주십니다.

우리의 입과 혀는 결코 세상과 같아서는 안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손과 발도 세상이 원하는 것들을 향해서 함께 가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도 돈과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목적과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의 오늘 올해의 목표는 우리가 천국이 되는 것이고, 우리의 인생 전체의 목표는 진짜 천국으로 우리가 들어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천국과 천국이 만나 함께 천국을 이루는 것입니다. 올해의 삶 저와 여러분이 모인 이 자리, 천국의 잔치가 될 줄 믿습니다.


3. 결론
통일을 염원하는 세대간의 차이 - 세대가 흘러갈 수록 교류가 끊길 수록 통일이 어려워질 것. 한민족의 시간이 필요함. 가족이란 그런 것. 영적 가족이라면. / https://newsis.com/view/?id=NISX20211210_0001684168&cID=10809&pID=10800(참고)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으로 십자가 길을 걸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실수록 아버지와의 관계는 더 돈독해졌습니다. 갯세나메 동산에서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기로 결단하십니다. 즉 내 안에 계신 하나님뜻대로 살아갈 수록 우리는 아버지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더 명확해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은 시간을 대화를 만남을 나눠야 합니다. 명분만 가족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생애를 마치고 아버짂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후에 제자들의 삶을 보십시오.

19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20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자신안에 있는 하나님을 전하고, 그 하나님이 주시는 표적을 보여주는 천국을 표시하는 삶을 삽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아버지 집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믿으시고 올해 하나님과 함께 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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