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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 설교_F/예수따라_마가복음

예수따라(4)_예루살렘 초입에서

by 우루사야 2021. 12. 21.

본문 : 마가복음 11 1-11
제목 : 예수따라(4)_예루살렘 초입에서

1. 서론

1) 예화

(영상)

여러분이 아시는 벤허였습니다.  영화에서 주인공 벤허는 지주 아들에서 노예로 전락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아리우스 장군과 전쟁에서 승리함에 따라 엄청난 개선행렬 중앙에 서게 됩니다. 개선장군이 것이지요. 결과 귀족신분까지 얻게 되는 영광을 누립니다. 그가 한 것은 전쟁에서 승리했다기보다는 아리우스 장군의 도움이 된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장군을 따라가다보니 어느샌가 로마 정중앙에 개선장군 곁에서 영광을 받으며 입성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합니다. 예수를 따라 가다보면 우리는 어느샌가 벤허가 되어 있는 우리를 보게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겪게 해주시는 놀라운 경험입니다. 아리우스 곁에서 승리에 함께 했던 벤허처럼, 우리는 예수님 곁에서 함께 승리의 개선행렬에 참여하게 것입니다. 예수따라 가는 길이 그러합니다. 오늘은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눠보고자 합니다. 

2) 주제 
예수님을 따라가다보면 광야에서 모든 걸 버려두고 내 중심이 무엇인지 봐야 할 때도 있습니다. 어떨 때에는 구비진 길을 걸으며 힘든 고난의 길에 반드시 주님의 뜻에 길이 있을 것임을 믿으며 하루하루를 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어느 날에는 준비물을 최소화하며 떠나는 여행길처럼,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기 위해 우리의 인생짐들을 내려놓고 비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승리를 우리에게 주시는 그 날이 올 줄 믿습니다. 예수 믿는 삶인데 어떻게 항상 바닥만 있겠습니까? 올라갈 때도 있지요. 그러나 우리가 광야와 구비진 길과 가진 것을 내려놓는 시간들을 보내오다 보면 영광을 받고 승리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어느샌가 겸손과 온유함으로 그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한 사람은 성숙해져 가나봅니다. 
예수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승리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중요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들이 그렇고, 또 내일 살펴볼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그러합니다. 이렇게 예수를 따라사는 삶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은혜를 받고, 어느샌가 구원을 확신하게 되고, 언제부턴가 성령님이 내 안에 살아계심으로 평온함을 갖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은 예수를 따라 중요한 장소 4번째 시간 '예루살렘 초입’입니다. 나도 모르게 예수를 따라 가다보니 "승리의 행렬 정중앙"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3) 본문잇기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아기예수로 보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왕으로 보고 있지만, 예수의 이 세상에 오심은 "우주의 왕"이 오심인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진짜 성탄절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겠죠.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어서 함께 했을 뿐인데, 우리가 누리게 되는 영광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주변 행렬에 있는 사람들도 그러했지만, 특히 오늘 본문에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특히 그러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우리도 장차 우리가 어떤 영광을 받게 될런지 도저히 지금 우리의 머리로는 알 수 없지만, 나를 먼저 사랑해주신 예수님, 사랑하러 이 땅에 와주신 예수님을 따르다보면 우리를 부흥케 승리케 해주실 주님이심을 믿으며 따라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 
구약은 계속해서 예수가 왕으로 오실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신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가 로마군을 향해 독립전쟁을 일으킬 것으로 많이들 오해했습니다. 제자들도 전쟁 후에 수립하게 정부에서 자리를 차지하려고도 했었지요. 그러나 예수가 예루살렘을 입성하는 모습은 독립전쟁을 하려는 이의 모습으로써는 초라한 입성식을 치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1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을 보내시며2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예수님 시대 이전에 나귀는 왕족의 동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말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나귀는 이상 왕족의 동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예언하셨던 내용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획과 예언대로 움직이십니다. 내용은 스가랴 9:9입니다. 

 

9시온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은 정복하거나 독립시키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는 군주거나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겸손의 , 인류의 왕이지만 인류의 죄를 감당하고 희생하시기 위해 땅에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족의 동물이지만 유행이 지나 짐이나 옮기는 동물로 하대받던 나귀, 그럼에도 누구도 타지 않고 지켜졌던 나귀새끼에 타심으로써 겸손한 왕으로 땅에 오셨습니다. 아리우스와 벤허같은 전쟁영웅을 반기듯, 예수님을 반기는 이들이 있었으니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러 몰려든 이스라엘 나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명성을 듣기도 했을 것이며, 나아가 얼마 베다니에서 있었던 나사로의 부활사건을 직접 보거나 듣고 몰려들었을 겁니다. 마가는 군중의 가지 행동을 전해줍니다. 7-8절입니다. 

 

7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많은 사람들 자기들의 겉옷을, 다른 이들은 들에서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먼저는 겉옷을 예수님을 위해 나귀 위나 바닥에 펼칩니다. 고대근동에서 겉옷은 가장 소지품 중에 하나였습니다. 일교차가 탓에 겉옷이 없을 때에 곤경에 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종종 겉옷을 담보로 잡거나 또는 타인의 겉옷을 하루를 넘겨 가지고 있지 말고 돌려줄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그런 겉옷을 예수님을 위해 펼친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진심어린 마음을 표현하는 것일 겁니다.
두번째는 들에서 나뭇가지를 길에 펴는 것이었습니다. 종려나무는 기쁨과 승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종려나무 학명에 "불사조"의미를 내포할 정도로 죽지 않는 나무로 유명합니다. 결코 패배하지 않는 , 승리의 왕으로 예수님을 맞이하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을 옅볼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외치는 소리가 의미심장합니다. 9-10절입니다. 

 

9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이 외치며 말하는 소리는 "호산나"였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소서, 우리를 구해주소서라는 의미로 있습니다. 그들을 자유롭게 하고 구해주는 이를 뭐라 표현합니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 그러니까 예수님을 "독립군의 수장 또는 탁월한 스승이나 사상가" 보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가장 탁월한 왕이었던 다윗의 맥을 잇는 ""으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자리를 마련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언을 성취하게끔 인도하셨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은 굳이 이런 행사를 마련하신 것일까요? 우리에게 "" 필요해서입니다. 왕이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의 안위와 행복을 마련하고 보호해주는 존재입니다. 적이 물리쳐주며, 우리가 빈곤할 구제해주는 우리의 보호막이자 우산 역할을 해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냥 입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환호를 받으시며 "왕의 입성" 세레머니"를 하심으로써 이 땅에 "진짜 왕"이 나타났다는 것을, 이 세계의 통치체계가 사단마귀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완전 바뀌었음을 하나님은 선언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현대에는 군주체제가 없거나 있어도 일본과 같이 명분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번 대선을 치르면서 경험하듯이 대통령을 거의 "신급"으로 기대하거나 만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인류 개인의 인생을 책임지는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을 세상에 선포하셨듯이, 이번에는 "인류의 "으로 세상에 선포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에 우리는 어떤 이를 왕으로 만들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유명 정치인, 경제인, 사상가, 연예인, 상담가 등 내가 의지하는 많은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구상의 "통치방식"을 바꾸는 왕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합니다. 



성탄절입니다. 어떤 날로 우리는 날을 보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땅에 왕으로 오시되, 겸손의 왕으로 오시기 위해 아기로 태어나셨고, 예루살렘이 아니라 작은 위성도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게다가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동방박사에게 유향과 몰략과 황금을 받으셨지만, 그것은 아기 예수를 죽이려는 헤롯을 피하기 위해 애굽 타향살이에 소진하고 말았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장 북방땅 갈릴리 나사렛 촌에 들어가셔서 그곳에서 인간의 삶을 시작하십니다. 그렇게 예수는 땅에 낮아지러 오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겸손하지만 모든 것을 책임져주시는 왕이 되어주시기 위해서 말이죠. 예수님이 지금 우리 심령에 성령으로 함께 계십니다. 그분을 귀히 여길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2) 벤허처럼, 함께 이들 

그런데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의 입성식에 얼떨결에 함께 이들이 있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지, 겉옷을 깔던지 말이죠. 그리고 중에서도 나귀를 바친 이들의 사건이 기록이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건은 복음서 4편에 모두 수록되어 있을만큼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만큼 사건은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이 있는 중요한 사건이었고, 사건에 함께 이들은 참으로 소중하게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이들이라고 말할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따랐을 뿐입니다. 찬양했을 뿐입니다. 헌신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중에 보니 "하나님 나라의 귀한 재료"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대한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진심과 정성을 바라십니다. 우리는 중에 나귀를 예수님께 드린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2-3절입니다.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3만일 누가 너희에게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마치 이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이미 계획이 짜여진 것과 같은 어투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느 특정한 장소로 가면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이 나귀를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일이 실재로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구속사는 우리가 도저히 깨달을 없고 예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천국은 지금도 땅에서 만들어지고 있고, 마침내 완성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의 손길" 재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귀처럼 말이죠.

얼마 전에 장로님께서 교회 재정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들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교회 난방이 필요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찰나였는데, 장로님 고백이 "하나님이 만큼 준비시켜주시더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맞게 주시더라. 그러니 있음 하자!" 귀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헌금이나 우리의 헌신이 다른 큰교회나 방송에서 나오는 간증만큼 내세울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 하나하나를 보고 계시고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어 하나님 나라의 재료로 쓰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6절입니다. 

 

4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거리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5거기 있는 사람 어떤 이들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6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첩보 영화나 스파이 영화를 보면 어떤 계획이 차질을 빚어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영화는 긴장상태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계획에 없던 상황을 노련한 기술로 해쳐나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속사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기에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물흐르듯이 진행이 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예수님이 시키는대로 순종하며 갔던 제자들이나, 나귀를 지키고 있었던 이들이나 말이죠.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 가장 평온한 장면이 만들어집니다. 

예수 따라가는 삶이 바로 이러합니다.  어느샌가 준비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꼭 맞춰진, 나에게 너무나도 잘 맞는, 내 몸을 가장 잘 아는 어머니가 골라준 옷처럼, 내 기질을 잘 아는 아버지의 충고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하시려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겁니다. 우리는 예수를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가 사신 그 길, 예수가 걸어간 그 발자국을 바라보며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샌가 여러분은 예수님의 개선행렬 정중앙에서 함께 영광을 받고 계실 겁니다. 그 길을 먼저 걸어갔던 바울선배는 후배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7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그러니까 예수 발자국을 따라 예수님이 나타나실 그 목적지까지 따라가는 자에게는 이런 면류관, 그 벤허의 한 장면과 같은 영광과 환호와 기쁨, 환희가 가득찬 그 순간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많은 사람의 인정과 박수를 받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받아야 할 때는 저 천국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희생과 섬김의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마치 그 길이 끝이 없어 보입니다. 요즘 초등학생들에게까지 퍼진 노래가 있는데 가사말을 한번 읊어드리겠습니다. 

내가 힘들 때마다
이 노래가 찾아와
세상이 둥근 것처럼 우리
인생은 회전목마
우린 계속 달려가
언제쯤 끝날지 잘 몰라
빙빙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빙빙 돌아온 우리의 시간처럼
인생은 회전목마

이렇게 계속 반복되고 한없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해가 지나가고 인생이 계속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게 참 인생을 힘들게 합니다. 어느샌가 왜 살아가야 하는지 목적 자체를 잃게 만드니까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입성식을 계획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는 왕이다, 예수 안에 승리가 있다" 우리 함께 외쳐볼까요. 예수는 왕, 예수 안에 승리.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갈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지금은 예수가 왕이라는 사실을, 예수를 따르기만 하면 믿기만 하면 전심을 다해 함께하기만 하면 우리에게 면류관을 주실 것임을 말이죠. 이런 복음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3.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암행어사 아시죠. 암행어사 이야기를 보면, 암행어사가 마을에 들어가면 행색을 평범하게 합니다. 보통사람처럼 하여 이곳저곳을 돌아봅니다. 마을에 대한 이야기, 고을 수령에 대한 평가 등을 듣습니다. 그러다가 순간 암행어사가 되어 마패를 높이 들고 나타납니다. 어느샌가 암행어사의 수행원들이 몽둥이를 들고 사또가 있는 거처를 급습하여 그들을 안마당에 무릎을 꿇게 하고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암행어사는 마을에 새시대가 되었음을 알립니다. 우리가 아직 읽지 않은 11절을 읽어볼까요. 

 

11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 나가시니라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고 선포되었지만, 당장에 일을 행하시지 않으십니다. 둘러보고 가십니다. 그러시고는 12제자를 데리고 예루살렘이 아니라 근처 마을 베다니로 가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 방문때에 성전을 엎으시면서 "도적의 소굴에서 기도하는 집"으로 바꾸게끔 하십니다. 이것은 예언적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아기로 태어나셔서 한 번 엎으시고 하늘로 가셨습니다. 그 때는 겸손의 왕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다시금 이 땅에 오실 겁니다.  2 성탄절이 되겠지요. 주님은 더이상 겸손의 왕이 아니라 변장한 암행어사가 아니라 사모관대를 쓰고 청색포를 입은 것처럼, "만왕의 , 심판자의 , 우리를 영광의 승자로 세워주실 " 진짜 모습으로 오실 겁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이 "백마를 타고 충신과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 그렇게 오실 날을 기대하고 고대하며, 제2의 성탄절이 올 때까지 주님이 쓰시고자 하는 나의 것을 내어드려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 그의 나라를 준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2년을 앞두고 성탄절을 맞이했습니다. 22년을 향해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예수를 따라 왕의 행렬에 우리 행복한교회가 함께 하길 소망합니다. 지금은 어렵고 힘들지만, 마침내 승리하게 하시고 우리의 삶과 헌신을 하나님의 나라의 재료로 사용하실 것을 믿으며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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