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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 설교_F/예수따라_마가복음

예수따라(6)_무덤을 관통하라!

by 우루사야 2021. 12. 29.

본문 : 마가복음 15:42-46
제목 : 예수따라(6)_무덤을 관통하라!

믿음의 기다림은 죽음을 관통하는 것
쳇바퀴 돌듯 사는 22년이 아니길


1) 들어가기
새해 동녘에서부터 해는 떠옵니다.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는 태양을 보며 사람들은 환호를 합니다. 추웠던 기온이 점차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어둠 속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바람을 맞고 서 있으면 기온보다 더 추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해가 떠오른 뒤에는 기온의 차이가 별 그닥 많이 차이나지 않지만, 따뜻합니다. 그리고 가슴이 벅찹니다. 저 큰 태양이 하늘 위로 올라가듯이, 내 인생도 새해에는 저렇게 밝아지기를 높이 떠오르기를 바래봅니다.

2) 예화 및 주제
왜 우리는 이 시간에 모인 것일까요? 왜 우리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정초부터 보는 것일까요? 이것에 대해 혹자는 샤머니즘적이라고 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더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어둠 가운데 빛을 기다리는 인간의 본능. 그렇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매일 겪는 것이 어둠 가운데 태양빛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새로운 날과 새로운 삶이 시작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왔기에, 한 해가 지고 새로운 해가 시작될 때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어찌보면 인간의 본능이고, 이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피조물인 태양빛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우리영혼의 영원한 빛되시는 하나님께로 예배하러 이 시간에 모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항상 어둠 가운데 빛을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어둠 가운데 우리는 활동이 제약되지만, 빛이 있는 곳에서는 왕성한 활동이 있고, 안정이 있고, 평안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빛을 기다립니다. 빛을 기대합니다. 빛을 고대합니다. 우리 영혼의 빛되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간 우리 가운데 함께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빛으로 우리의 22년이 빛나길 소망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은 예수님께 중요했던 6번째 장소, 어두웠던 무덤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그 암흑과 죽음의 무덤에서 부활의 빛으로 나아오셨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무덤에서 어떻게 빛을 기다리셨을까요? 오늘밤 예수님이 잡히시어 죽으시던 그 날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22년 어떤 암흑이 우릴 기다리더라도 예수따라 빛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 시간에 예수따라 빛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2. 본론
1) 예수님 이야기
주님은 목요일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잡하실 것을 예상하고 계셨지요. 잡히신 후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간 밤에 몰래 예수님을 심문하고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다음날 금요일 아침에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기면서, 반협박을 합니다. 이 자에 대해서 사형을 구형하지 않으면, 민란을 일으킬 것처럼 말이죠. 결국 빌라도는 사형집행을 명령합니다. 한 무리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부질없는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전 세계사에서 가장 길고도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던 로마제국이 임명한 총독으로부터의 공식적인 사형집행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온갖 수난과 고문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외치시며 눈을 감으셨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이었던 아리마대 요셉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심문 당시까지만 해도 예수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샌가 그의 심령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님을 향해 가장 큰 제국 로마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다면, 십자가 아래에서는 유대교의 수장격인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장면인 것이죠. 아직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빌라도에게 당돌하게 들어가 예수의 시신을 인계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서 그는 다른 이들에 비해서 고급지게 준비했던 가족동굴무덤을 예수님을 위해서 내어드립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다른 사람의 죽음과 그 깊이와 너비와 의미가 다르기에 타셨던 나귀나 사용하셨던 무덤 모두 아무도 쓰지 않았던 것을 통해서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 중 단연 가장 신비로운 것은 예수의 나심이 동정녀 마리아로부터였던 것을 기억해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예수의 한발걸음 한발걸음은 준비하셨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무덤에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되고 금요일 밤이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인 토요일 하루가 지나갑니다. 인류는 자신의 창조자였고, 인도자였고, 만군의 왕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왕을 스스로 죽였습니다. 너무나도 미련하고 안타까운 사건이었습니다. 안식일이었지만 인류의 마지막 우산이었던 예수를 잃은 안식일은 참혹하기 그지 없는, 고아가 보내는 불안한 하루였습니다. 게다가 지성소 커텐은 찢어져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던 곳이라고 여겼던 그곳은 도둑이 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안식일 토요일이 또 지납니다. 이재 다음날, 일요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과 달리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여인들은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예수님의 무덤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향유를 몸에 바르는 전통을 위해 가면서도 고민이 많습니다. 보통 동굴무덤은 각지고 네모난 덜 깎인 돌들이 막고 있지만, 아리마대 요셉이 준 무덤은 부자집 무덤이라 무덤을 가리는 돌이 동그래서 잘 굴려질 것입니다. 허나 여인들이 하기에는 너무나도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용기있는 남정네 하나 없이 그녀들은 돌굴릴 걱정을 안고서도, 예수님의 시신이 있는 그 곳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녀들의 걱정은 한 순간에 사라집니다. 누군가 돌을 굴려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 큰 걱정이 다가옵니다. 누군가 예수님을 훔쳐간 것 같습니다. 헐레벌떡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감싸안았던 세마포만 남겨져있습니다. 그리고서 근처에서 흰옷입은 한 청년이 말해줍니다. "그 분이 누우셨던 자리를 보십시오. 그 분은 살아나셨습니다. 여러분, 제자들에게 말해주십시오. 예수님과 첫만남이 있던 그곳, 갈릴리에 가면 그 분을 만날 수 있다고." 그리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하여 제자들에게 차례대로 나타나시며 그들과 함께 먹으시고 대화하시고 마지막 유언을 남기시고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그리고 예수님을 보필하던 곁에 선 천사들이 말해줍니다. "이렇게 하늘로 올라가신 것처럼, 본 그대로 오실 것입니다"라고 말이죠.


그 후로 2000년 동안 살아서나 죽어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 분의 오심을 기다리며 그 빛을 볼 날을 고대하며 "어두운 이 세상 속에서 믿음이라는 촛불"을 들고 세상을 밝히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어서 주님을 보나 살아서 주님의 다시오심을 통해 주님을 보나 어쨌든 그 빛된 날을 기다립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매년 매해 매월 매일 그 분이 오실 때까지 대신 함께 해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몇몇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 가운데 마가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만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이 표현에는 두 가지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표면적으로는 "라마사박다니"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여러분, 지옥은 다른 곳이 아닙니다. 지옥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지옥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기에 어디든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더이상 구원과 함께 하심에 대한 소망을 허락하지 않는 완전한 단절의 그곳이 지옥이지요.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지옥을 가지고 가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소망이 없고 허망함과 공허가 가득한 그 상태를 우리 대신에 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해를 가리시사 그 땅을 암흑으로 만드셨습니다.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가 너희를 대신하여 암흑과 같은 지옥의 상태, 나와 단절되어 어둠의 상태로 들어갔도다"라고 말이죠. 하나님의 심정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엘리 엘리", 그러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다른 분이 아니라 "나의 영혼을 책임지실, 지금은 하나님과 단절되지만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신비로운 하나님의 능력으로 결국에는 나의 영혼을 어떻게든 책임지실 하나님"이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분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를 위해서 끝까지 사랑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억울하지만 잠잠하셨습니다. 원수의 질타속에서도 묵묵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 상에서도 고통을 덜어 줄 포도주도 마다하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면 만 하루동안 살아있다가 지쳐 죽지만, 예수님은 6시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죽으러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고, 잡히러 겟세마네동산으로 들어가셨고, 사형을 당하기 위해서 변호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아들,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를 만든 예수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하나님과의 단절의 상태로 들어가셨습니다. 낮아지고 낮아지고 또 낮아지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어둡고 더 어둡고 더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놀랍고 섬세한 섭리가 나타날 때입니다. 하나님의 대한 믿음은 배반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뤄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인류를 빛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으시고 다음날 낙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낙원에서 십자가상에서 회개했던 강도와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열매이자 부활체의 대표가 되신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성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몸과 영혼이 부활체가 되어 시공간을 초월하는 육신으로 만들어주셨고, 예수님은 부활하시어서 제자들에게 살아난 몸을 보이셨습니다.  


사복음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시간간격의 흐름을 가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10년이 1-2장만에 흘러갑니다. 그러다가 중반부에 다다르면 3년의 시간의 행적이 조금씩 나누어서 씌여졌습니다. 그리고서 마지막 한 주일동안을 가장 세세하게 모두 기록합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죽음과 다시 부활하신 사건은 예수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가 큰 사건이었습니다. 가장 깊은 어둠에서 가장 밝은 빛으로 나간 첫번째 인간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인간에게 소망이 생겼습니다. 가능성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죽음을 너머설 수 있는 그 어떤 바이러스 신약개발보다 더 귀한 소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둠에서 빛으로 어떻게 가셨습니까? "하나님을 믿음으로 따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라가는 그 길에는 환란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둠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내 손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의 시간에 그 분의 타이밍에 그 분의 방법대로 이뤄질 것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2) 죽음을 관통하자

예수의 기다림은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서 핸드폰을 보며 시간을 떼우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이 기다림은 "죽음을 관통하는 기다림"이었습니다. 인간이기에 죽음을 피할 수 없고 또 직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간을 매 순간 매 순간 격렬히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따라 빛으로 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생애 마지막 날에 빛으로 가는 믿음을 가지고 부활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42-43절입니다.

42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43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마가는 아리마대 요셉을 등장시키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간 사람,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 이렇게 빌라도에게 당돌하게 들어간 한 사람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고서도 빌라도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장에서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을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말하며 예수를 향해 유대인의 왕이라고 칭합니다. 로마황제의 임명을 받은 총독의 입에서 "유대인의 왕"이 고백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빌라도에게 당돌했던 두 사람, 예수 그리스도와 아리마대 요셉이었습니다. 그 둘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첫번째 필요했던 것은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기리를 원하는 그들은 죽음의 위협으로 들어갔습니다. 죽음을 관통하러 들어갔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이 세상 최고의 권력으로부터 유대인의 왕이라 불리웠고, 유대교 공의회원이었던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와 백부장으로부터 예수님의 시신을 넘겨받습니다. 44-46절입니다. 


44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45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46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여러분, 새벽을 만나고자 하는 자는 어둠으로 더 들어갑니다. 어둠이 싫어 계속 도망치는 한 그는 계속 그 어둠에 쫓기게 됩니다. 오히려 어둠을 관통하여 동쪽으로 나아가다보면 결국 해가 뜨는 빛나는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와 아리마대 요셉은 죽음을 관통하고 들어갔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죽어야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짐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잡히시던 날 밤에 잡히시고자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리마대 요셉은 공의회 회원이었습니다. 부자가 가지는 동굴무덤, 게다가 잘 깎은 둥그런 문역할을 해주는 큰 바위를 가질 만큼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상류층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로마총독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합니다. 이스라엘 고대사회의 특성상 종교와 정치가 밀접하게 있는데, 그의 행동은 자신의 입지 모두를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헌신은 마치 죽음으로 향해 뛰어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를 장사지냅니다. 후대에 마가가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아리마대 요셉을 향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덧붙인 것을 보면 그는 그 이후에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는 자신의 입지를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어둠에 들어가기 싫어 더 서쪽으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관통하기 위해 동쪽으로, 마침내 그 날이 올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더 들어가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둠을 이기고 빛으로 가는 법은 "어둠을 관통하는 것, 죽음을 관통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무서워 죽음을 피해가는 인생이 아니라, 죽음을 관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다시 살리실 줄 믿으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을 믿음으로 독생자를 바쳤습니다. 죽음을 향해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십니다. 이 역설의 신비가 바로 "죽음을 관통해 빛으로 나아가는 법"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죽음으로 나아가십시오.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암흑의 시대는 아마 외세의 침략 속에서 보냈던 시간이었을 것이고, 아직도 그 시대의 생존자가 살아있는 근세때의 사건이 우리에게 가장 와닿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 때 36년 동안 쓰여진 시가 아직도 많이 읽히곤 합니다. 그 가운데 윤동주 시인의 시가 많이들 사랑하는데 한 편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다들 잘 아시는 서시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시를 두고 국문학에서는 예수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끝까지 사랑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윤동주는 자신에게 대입시켜 쓴 시라고들 해석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지만, 현실에서의 자신의 삶은 자신을 부끄럽게 합니다. 이파리를 흔들정도의 바람에도 그는 괴로워합니다. 일제치하 속에 있는 조국의 현실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조국과 자신의 처지, 너무나 약해 약한 바람결에도 민족은 아파해하고 괴로워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가 십자가 상에서 핍박하는 자들을 용서하고 강도를 낙원으로 인도하시고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할 정도로 끝없는 사랑을 위해 죽음의 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신 것처럼, 자신도 작게 빛나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어둠 속에서도 빛을 향해 나아가겠노라 사랑하겠노라 노래합니다. 그 빛, 그 사랑은 바로 "예수와 같은 사랑"이었습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임에도, 원수같은 것들임에도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사명과 숙명이 무엇인지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주어진 길, 하나님이 주셨고 예수가 먼저 가신 그 길"을 걸어가겠노라고, 별이 뜬 그 암흑 속에서도 노래하며 걷겠노라고, 바람이 부는 이 밤에도 예수를 따라 사랑의 길을 걷겠노라 노래합니다.




3.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제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새해를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죽음을 피해, 죽어가는 것을 막아서기 위해 살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암흑을 너머 하나님이 주실 새 날, 새 해, 새 시대를 향해 나아가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아리마대 요셉이, 윤동주가 살아왔던 그 믿음의 삶, 죽음을 관통하여 빛으로 생명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을 믿으며 걸어가는 삶. 그 삶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올 한해,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혹시 낮에만 내가 원하는 환경에서만 사랑하고자 함은 아닐런지요. 예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원수를 사랑하고 내 상황과 어려움이 닥친 밤과 흑암이 뒤덮인 그 때에도 사랑하는 것이 나의 숨쉬는 것만큼이나 소중한 예수의 길임을 기억하시며 오늘 함께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기도하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되시길 소망합니다.

22년 올해가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일지 더 어려운 미래일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말해줍니다. 예수따라 가는 그 길은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미래라고. 죽음을 관통하고 사랑하는 22년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말씀을 생각하며 이 시간 잠시 묵상의 기도의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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