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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 설교_F/예수따라_마가복음

예수따라(3)_여행길 준비

by 우루사야 2021. 12. 18.

 

본문 : 마가복음 6장 7-13절

제목 : 예수따라(3)_여행길 준비하기

1. 서론

과유불급하면 따라오는 이야기가 우명옥이라는 자의 일화입니다. 강원도에서 진흙그릇을 만들던 그는 좋은 스승을 만나서 당대 최고의 도공이 됩니다. 그의 그릇을 기뻐하여 왕이 우삼돌에서 우명옥으로 이름을 개명시켜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샌가 향락에 빠지고 전 재산을 탕진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배에 올라타다 거친바다를 만나 모두가 몰살하고 말았지만 홀로 살아남게 된 우명옥,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며 최고의 그릇을 만들겠다고 다짐하여 "계영배"라는 잔을 만들게 됩니다. 술을 이 잔에 가득따르면 70%만 남기고, 나머지는 바닥에 흐르도록 설계가 된 잔이었습니다. 과유불급, 정도를 지나치는 것은 모자란 것보다 못하다는 사자성어와 너무나도 어울리는 일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다하며 살아가야 할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올 한해를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과유불급"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도껏의 힘을 주셨습니다. 그 이상의 일에 대해서 우리의 준비로 가득차는 것은 과유불급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자란 인생임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중요한 장소 3번째 시간입니다. 바로 여행길입니다. 고향땅에서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은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이심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두루 촌을 돌아다니시면서 잃은 양을 찾아 나서십니다."(6절) 그런 가운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두루 촌을 다니게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9절입니다.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제자들은 간단한 거리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두루 촌을 돌아다니며 숙박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신은 신지만 두벌의 옷, 또는 양식, 배낭, 돈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로지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를 통해서 해결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떠나는 길, 과유불급, 가볍게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생 이렇게 살라고 하신 말씀은 아니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무소유의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는 삶"을 말하고자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끝나는 것은 30절입니다. 그 사이에 세례요한과 헤롯왕 사이의 일화가 등장합니다. 헤롯은 자신의 인생을 인정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아내 헤로디아 사이에서 저울질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측근세력의 인정도 받으려 했습니다. 모두 가지고 싶었던 것이지요. 과유불급이었습니다. 결국에는 세례요한을 어이없이 참수시키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며 복음을 전하며 영향력을 넓히는 예수님과 제자들, 자신의 힘으로 모두의 인정을 받아내고자 했지만 결국에는 무너지고야 말았던 헤롯왕.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자란 인생"이 될 것을 말이죠.  

마가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시고서 이제 다른 지역으로 여행길을 떠나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신자의 여행길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가지고 나의 모자란 능력을 어떻게 채우며 삶을 채워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죠.
내년을 바라보며 여러분은 무엇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혹시나 과유불급과 다다익선으로 인생을 채우고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마귀에 대한 승리를 가지고 제자들에게 여행길을 떠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인생을 하나님이 어떻게 돌보시고 인도하시는지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말이죠. 22년을 준비하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을 따라가는 이 길,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길이 되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과유불급

여행하면 떠오르는 분이 계시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쓰신 유홍준 교수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하셨죠. 내가 떠나는 길에 있어서 챙겨가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단번에 말해주는 문장이라 생각됩니다. 내가 가는 그 길에 대한 목적과 의미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그 길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것들을 챙겨가느라 중요한 의미를 잃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내 인생에서 찾아야 하는 중요한 의미, 그것은 내가 아는 만큼 보이고 깨닫기 마련이겠죠. 그런데 인생길 좀더 편히 걷고 좀더 넓은 길로 가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쏟다보면 결국 내가 봐야 할 것을 못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보아야 할 것, 느껴야 할 것, 깨달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어야 보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것들을 준비하느라 이것을 놓쳐서는 안되겠습니다. 7절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 있습니다. 

7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예수님이 다른 것들을 주시기 보다 딱 하나를 집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초자연적인 힘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마치 암행어사가 왕에게 받은 권세의 징표인 마패를 가지고 부패한 사또를 잡아들이듯이, 제자들은 예수가 광야에서 사단마귀의 시험에서 승리하신 그 승리의 징표로써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권능을 얻게 된 것이지요. 게다가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붙여서 보내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의 제자로서 더러운 귀신이 떠나가고 제어가 되는 것을 서로 목격하고 또 서로 증인이 되어주게끔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깨닫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행길에 있어서 다른 것들을 준비하느라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충고를 하셨습니다. 

 

8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9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10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필요한 것들이 준비가 되어 있으니 그것들에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이 여행길에 있어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 받은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 한 가지였습니다. 이 여행을 위해서 양식, 배낭, 돈, 여벌의 옷을 챙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듯, 예수의 이름만큼 경험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과하게 챙겨서는 안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보아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느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깨달아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의 힘이었습니다. 

 

요즘 우리가 큐티말씀을 야고보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5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금 나에게 허락된 환경, 능력, 힘만큼 살아가며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러다가도 때때론 나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 야고보는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지혜"로 후히 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자람에 대해서 불안해 하지 않아도 됩니다. 모자람을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죠. 

인생이라는 여행길에 있어서 우리가 챙겨가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도착지는 분명합니다. 그 길을 떠나는데 있어서 혹시 우리가 과유불급으로 살아가다가 보아야 할 것을 못보고, 또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지는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의 행복이었습니다. 귀신에 농락당하고, 하나님과 사이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과 충만을 얻지 못하고, 혼란과 혼동 속에서만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우리네 인생을 예수님은 구하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인생길에 있어서 "예수의 힘이 주는 행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 준비해야 할까요? 얼만큼 벌어야 할까요? 얼만큼 열심히 일해야 할까요? 우리는 각자의 상황과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가 누군가의 인생을 향해 "여기까지다"라고 말해줄 수 없습니다. 결국 그것은 자기 자신만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인지 욕심인지를 말이죠. 그래서 마가는 그 대표적인 예를 그 이후에 등장하는 헤롯왕으로 들어주고 있습니다. 그는 왕이 아님에도 왕이 되길 원했던 분봉왕이었습니다. 그의 허영심은 측근들의 환심을 사기 원했고 그 결과 세례요한을 죽이고야 마는 어이없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인간의 욕심은 이렇게 어이없는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한다고 마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고난의 길을 걸었던 세례요한이 준비한 그 길, 그리고 그 길을 걷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 길을 걸으라고 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2000년이 지나도 그 길을 함께 걸으려는 우리. 우리는 과연 얼마나 준비하며 그 길을 걸어야 할까요? 분명한 것은 "우리의 허영, 근심, 걱정"으로 준비하는 과유불급의 길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요? 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 새 시대를 바라보라 

 

11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인 마을들을 돌면서 "말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그들이 말을 듣지도 않고 영접하지도 않았을 때 "한 가지 행동"을 주셨습니다.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땅에 갔다 올때면 신발에 묻어있는 이방인땅의 흙을 털어버리고 유대인의 땅으로 오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거룩하지 않은 이들의 흙을 거룩한 이들의 땅으로 들여오지 않겠다는 것이죠. 그런 풍습을 통해 예수님은 "너희가 전하는 복음을 전하지 않는 이들은 유대인일지언정, 하늘나라에서의 이방인이다. 복음을 듣지 않는 이방인들의 흙을 떨어버림으로써, 그들이 구원에서 배제될 것임을 증거로 보여주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증인과 증거"로 살아갈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들은 "새로운 나라"를 바라보는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새로운 나라입니까? 주인이 바뀐 나라였습니다. 마귀권세가 자리잡고 있던 이 땅이었지만, 예수님이 오시니 그 마귀는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권세로 본래 굴복당하던 인간이 마귀를 제어하게 된 새로운 시대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 증인으로 그 증거로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마귀권세를 이기는 인간, 예수의 권세를 가진 인간이라는 새로운 입장으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입장은 예수님이 그들의 행색에 대해서 표현하실 때에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8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9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10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이렇게 행색을 가볍게 하는 이유는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는 자의 모습"입니다. 정착하지 않는 자입니다. 새로운 나라가 도래할 것이기에 그곳을 가려는 자의 행색입니다. 이런 행색이 등장했던 성경본문이 있습니다. 바로 출애굽 때였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출12:11) 이 때가 어느때입니까? 10번째 재앙이 임하는 날 밤이었습니다. 그 날 애굽은 멸망할 것입니다. 첫번째 난 것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든 혈통이 끊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날 밤에 그들은 그들을 억눌렀던 애굽에서 나와 구원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그 행색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인류를 억누르고 있던 사단마귀 권세를 예수님이 무찌르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자들이 행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새로운 땅 가나안을 향해 여행자의 모습으로 밥을 먹었듯이, 열두제자는 천국을 향해 여행자의 모습으로 다니게끔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의 이름이 허락된 우리에게나, 종말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하는 우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볍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정착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늘 천국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10절에 보니 예수님은 한 곳에 머무르거든 그지방을 떠나기까지 그곳에만 유하게끔 하셨습니다. 이집 저집 드나들면서 더 많은 것을 채우려는 모습은 걸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들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신비와 섭리를 기대하라는 말씀이십니다. 

출애굽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있으십니까? 불기둥, 구름기둥, 바다가 갈라지는 것, 만나와 메추라기 등이 있으실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으로부터 나와 바로 가나안에 가지 않고 40년 동안 광야를 돌면서 그들이 겪은 것은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신비"를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 당시에 주셨던 하나님의 원리를 예수님은 주기도문에 차용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그냥 우리에게 내려놓으라, 믿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일용할 만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 때에 왜 그들은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지 않고 2일치를 저장했을까요? 새로운 시대, 그러니까 매일 주시는 하나님이 함께 한 시대라는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그 때 그 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보아야 할 것, 느껴야 할 것, 깨달아야 할 것"을 중히 여기라고 하셨던 겁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시대, 새로운 힘으로 사는 시대. 그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용할 양식만을 구할 수 있는 믿음의 행보를 걸을 수 있는 줄 믿습니다.

 

3) 새로운 시대와 가난

 

포모, FOMO라는 신조어가 있다고 합니다. ‘놓치는 것에 대한 공포(fear of missing out)’라는 뜻입니다. 한국에서는 충동적 주식투자 심리 등 경제 분야에 주로 쓰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누군가가 주식으로 부자가 된다고 하니 너도나도 주식을 건드려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코인, 부동산 등등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서구권에서는 대중문화권에서도 쓰인다고 합니다. 이번에 오징어게임을 미국인들이 상당히 많이 봤다고 하죠. 그래서 다들 본 드라마인데 자신이 못봄에 따라 주류문화를 놓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기에 본척하는 행태를 보이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주류에 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또는 부담감이 있습니다. 그럼 성경은 무어라 말해줄까요? 모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15:11)

언제는 비주류는 있을 것이다. 포모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분명 있을 것이다고 말이죠. 내가 경제적으로 주류이지만 사회적으로 비주류일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주류이지만 경제적으로 비주류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누군가는 비주류고 가난한 자이고 약자일 수 밖에 없다고 성경은 말해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세계는 계속해서 부유해지지만, 가난한 자는 끊이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또 인간이 가진 한계입니다. 얼마 전에 전기차 회사대표로 유명한 일론 머스크의 재산이 화두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올해에만 100조원이 넘게 재산이 증식이 되었다고 하죠. 과연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일까요? 왜 공평하게 나눠주지 않으시고, 이렇게 사람마다 다 다른 상황이다 못해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게끔 하실까요? 야고보는 이에 대해서 이런 답을 내놓습니다. 

9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약1장)

가난한 신자는 하나님이 하늘천국에서 주실 영광을 바라보라 합니다. 부한 신자는 예수님을 따라 자신이 가진 재물과 위신을 내려놓음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상주실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라 말합니다. 즉 우리는 부익부 빈익빈의 상황 속에서 숨겨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기대하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냄으로써, 그 속에서 우리가 받게 될 것을 마침내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산"에 몰입할 것이 아니라 여행길, 즉 우리가 여행에 온 목적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12-13절입니다. 

12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우리는 경제적인 것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공동체적으로 많은 분야에 있어서 이미 "주류"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주류"에게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내가 처한 현실과 상황만 보면 비주류인 것만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것 또한 하나님께서 높이실 것이라고까지 성경은 말해줍니다. 더 나아가 내가 주류인 영역이 있습니다. 특히 복음을 먼저 받은 우리가 주류입니다. 성경은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고, 타인을 위해 기도해주라"고 적극적인 주류의 입장에서 낮아지고 나누고 함께 할 것을 주문합니다. 마가는 특히 귀신축출에 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언급해주고 있는데 마지막 16장 마무리 부분에서는 이렇게까지 언급합니다.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18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우리에게 포모, 그러니까 주류에 있든 비주류에 있든 두려움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낮은 자를 높이시고, 높은 자를 낮아지게 하심으로써 각자에게 가장 알맞는 삶의 영역으로 인도하실 것을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 여행길 아니겠습니까? 낮아지면서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높아지면서 또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내 인생을 낮아지게 또 높아지게 하심을 깨달으며 예수의 권능으로 살아가며 풍요함을 누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일 겁니다. 

 

3. 결론

종교적인 이유로 45년 동안 단 한 번도 오른팔을 내리지 않은 인도 남성이 화제입니다. 6일 영국 데일리스타 등 외신들에 따르면 인도 남성 아마르 바라티 씨는 힌두교 신 시바에게 자신을 바친다며 오른팔을 45년 넘게 들고 있습니다.  바라티 씨는 과거 결혼해서 세 자녀를 둔 평범한 은행 직원이었습니다. 그러나 1973년 종교적인 깨달음을 얻은 뒤 힌두교 신에게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혼자 산에 들어가 고행을 시작했습니다.  바라티 씨는 속세의 유혹을 떨쳐 버리고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굳건히 하기 위해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고민 끝에 그는 주먹을 꽉 쥔 오른손을 하늘로 향해 든 채 생활하며 신에 대한 믿음과 감사를 표현하기로 했습니다. 아울러 전쟁을 반대하고 세계 평화를 지지하는 메시지를 전하기로 했습니다.  바라티 씨는 처음 2년은 고통 속에서 보냈지만 이후 팔의 감각을 잃어 고통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40여 년이 지난 현재 오른손의 피부와 손톱은 서로 붙었고, 어깨 뼈는 그대로 굳어 오른팔을 전혀 사용할 수 없게 됐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이 사람의 인내에 대한 경외보다는, 인간의 광기와 집착이 더 먼저 느껴졌습니다. 종교적인 깨달음 뒤에 가정을 버리고, 자신에게 과감한 조치를 취하여 45년 동안 손을 내리지 않게끔 한다는 것. 그것은 누구의 판단이었고, 또 누구의 결정이었단 말입니까? 인간의 불안과 초조는 항상 우리가 무언가를 더 해야만 한다고 부추깁니다. 더 열심히 살아내야 하고, 뒤쳐지 않기 위해 뛰어가야 하며, 신에게 인정받기 위해 나에게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이죠.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미 우리에게 예수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마귀권세를 이기셨고 그 승리의 권세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가 간단한 삶으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승리할 것을 보게 하셨고, 나누면서 사랑을 누리게 하셨으며, 낮은 나를 높이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올 한해 어떤 인생길을 걸어오셨습니까? 세상을 쫓아 달려오셨습니까? 아니면 세례요한이 준비하고 예수님이 걸으셨고 제자들을 보내셨던 "복음의 길"을 걸으셨습니까? 이제 마음을 놓으십시오. 예수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그 길에 깨달을 것들이 많습니다. 보아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너무 많이 가져가려 하지 마십시오. 예수의 승리의 길을 함께 걸으면서 나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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