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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 설교_F/예수따라_마가복음

예수따라(1)_광야에서의 시작

by 우루사야 2021. 12. 5.

1. 서론

1) 들어가기 

어느덧 12월이 우리 곁으로 금새 다가왔습니다. 점점 바람이 매서워져 금방이라도 하늘에서 눈이 쏟아져 소복소복 쌓일 것 같은 요즘입니다. 그래서인지 한해를 돌아보고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기 더 없이 좋은 것 같습니다. 오늘부터 시작해 12월 동안 7번의 모임 속에서 한해를 돌아보며 하나님보시기에 기쁜 내년계획을 세울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죠. 2천년전 제자들이야 예수님 뒤를 쫓아다니면 됐지만,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한 번 더 생각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신 따라오라는 의미는 뒤를 졸졸 따라오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조금 바꿔서 표현해보자면, 내 인생처럼 너희 인생도 되기를 원한다는 말씀일 겁니다. 예수님의 인생길을 예수님은 자신이 있으셨으니, 제자들에게도 또 우리에게도 따라오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우리가 예수님처럼 나사렛, 갈릴리, 사마리아 여행길, 예루살렘, 골고다를 누빌 수는 없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시작한 인생, 하나님의 약속으로 마치신 그 인생길은 따라갈 수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라는 것은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으로 시작해, 하나님의 약속으로 끝마치라는 것을 함축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열린결말이라는 표현자체가 소설이나 영화에서 쓰이는 표현입니다. 특히 영화 기생충이 열린결말로 유명합니다. 유튜브에 기생충 해석 또는 기생충 의미 등을 치면 수 많은 해석들이 나옵니다. 독자나 청중이 작품의 결말 또는 감독의 의도에 대해서 나름대로 상상하거나 추리, 해석할 수 있는 끝맺음의 형태를 열린결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인지 인생을 두고 열린결말같다, 라고들 말합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평가하다보면 이런 평가도 나오고 저런 평가도 나오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으로써, 사회인으로서, 부모로서, 자녀로서, 직장인으로서, 공동체원으로서, 활동가로서 수 많은 평가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죠. 유명 정치인이나 사상가, 사회운동가만 이런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도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올 한해에 대해서 어떤 결말을 가질 수 있을까요? 신앙인으로서의 나, 사회인으로서의 나, 직장에서의 나, 가정에서의 나, 경제인으로서의 나, 정치참여자로서의 나 등 수 많은 나의 모습에 대해서 평가가 있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생을 두고 열린결말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열린결말의 반대도 있는데 무엇일까요? 네, 닫힌 결말입니다. 결말이 너무나도 분명한 겁니다. 감독이나 작가의 뜻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지요. 성경은 인생은 닫힌결말인데, 그 내용은 "해피엔딩"이라고 말해줍니다. 

제가 12월 모임의 본문으로 마가복음을 택한 배경이 있습니다. 복음서 4개의 첫구절이나 쓰여진 의도를 보면 마태복음은 족보로 시작합니다. 유대인에게 예수가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니라는 변증을 위해서입니다. 누가복음은 "내력의 시작이라"는 표현입니다. 내력은 "보고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방인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책이었습니다. 요한은 20장에서 예수의 이적이 너무나도 많지만, 일부 7개 기적으로 예수를 설명하고자 함을 밝힙니다. 오늘 우리가 다룰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말해줍니다. 복음이라는 단어를 홀로 썼습니다. 

복음의 단어는 "승리했다는 메시지"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마라톤의 거리 42.195km. 아테네가 페르시아 대군에 맞서서 이긴 전투지였던 마라톤 평지에서 따왔습니다. 이 평지로부터 아테네까지의 거리였습니다. 고향땅에서 승리할 것인가 아니면 패배하여 온 가족이 뿔뿔히 흩어지고 나라가 망할 것인가, 그 갈림길에서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었던 그들에게 한 전령이 42.195km를 달려와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하여 이 메시지를 "유" 좋은, "앙겔리온" 소식. 좋은 소식, 승리 소식이라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메시지를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계에서 승리했다! 라는 소식을 전하는 마라톤 전령사가 되기로 했던 것이죠. 그래서 마가복음은 "승리의 소식", 해피엔딩으로 굳게 닫혀진 결말을 가진 소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 살아가면 우리에게 "닫힌 결말로서의 해피엔딩"이 분명히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따라오라고 하셨기 때문이죠. 그럼 우리는 각자 인생에서 예수님을 따라살았는지 돌아보고 내년에 잘 따르기를 생각하는 시간이 분명히 필요할 것입니다. 7주 동안 예수님의 중요한 장소였던 7장소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번째는 오늘 우리가 생각할 광야입니다. 그리고서는 고향 갈릴리, 여행길, 예루살렘성, 십자가, 무덤, 하늘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7장소를 따라가며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며 예수님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지으신 이 인생길 잘 걸어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되시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광야에서 시작하시는 이유 : 무, 내 손에 있는 것 내려놓기

우리가 기억하는 위대한 인물하면 누가 있습니까? 세종대왕, 이순신, 박지성, 김연아 등 공통점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이룬 업적에 비해 기반환경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지만, 그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뤄냈고 우리는 그 끈기와 인내를 칭송하며 존경하고 또 롤모델로 따르고자 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놀라운 경지의 것"으로 칭송받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언급드린 인물들의 업적보다는 더 원론적이고 신학적이고 근원적인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은 피조물된 우리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기에 마땅할 것입니다. 

마가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있어서 첫 장에서 계속 등장시키는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광야"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드넓은 황량한 땅에 모래와 지평선 밖에 없고 그나마 큰 바위 아래 그늘만 있는 그곳이 광야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삶을 이 광야와 밀접하게 연관지으셨고, 예수님은 그렇게 광야에서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니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는 소식을 구약선지자 이사야가 이렇게 말했다고 마가는 인용합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막1:2-3) 그리고 실재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죄사함의 회개의 세례를 주었다고 마가는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예수님도 그 광야에서 주어지는 세례를 받기 위해 요한에게 오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12절에 보니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드린 바와 같이 광야라는 곳은 "아무것도 없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없습니까? 돌, 바위, 모래, 잔가지나무들, 야생동물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곳이 아무것도 없는 곳이 됩니까? 인간에게 물리적으로 아무 도움이 되는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물리적으로 수분을 취할 수도 없고, 그늘에 들어간다 한들 뜨거운 태양열로 지열이 올라옵니다. 다행히 그늘은 서늘하지만 점점 바뀌는 태양의 방향으로 인해 그 그도 결국 소용없는 곳이 됩니다. 그럼 무엇을 의지할 수 있을까요? 네. 하늘 밖에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엘리야가 가시나무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음을 간구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렇게 광야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무", 인간으로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고, 광야에서 시작하는 하나님의 역사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와 같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창1:2a) 

하나님과 예수님은 광야에서 "복음 사역"을 시작하고자 하십니다. 혼돈스럽고 공허한 인생, 죄와 억압이 가득한 인생, 항상 불안정하고 흔들리는 감정, 이성의 끈을 항상 놓을 수 밖에 없게끔 몰아치는 세상살이문제들. 선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는 인생이라는 광야에서 삼위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시작하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2제자를 부를 실 때에도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막1:17-20)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18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19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20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생업을 내려놓고, 자신의 삶의 환경, 친족, 배경을 내려놓고 "나를 따라오라", 아무것도 없이 다 포기하는 광야로 초대하십니다. 예수님만 붙잡게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15절을 보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내가 가진 신념, 고집, 생각, 환경, 배경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곳에서 하나님이 "복음"으로 일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해를 정돈하는데 있어서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한 해동안 하나님 앞에서 내려놓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을 광야로, 또 예수님은 제자들을 광야로 초대하셨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손을 잡게끔 하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시는 하나님, 광야에서 샘물이 나게 하시고 꽃이 피게 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광야와 같은 내 인생 아무리 물을 주고 씨앗을 심어도 꽃이 피지 않는 내 인생에 하나님께서 복음의 행복, 평안, 확신, 기쁨이라는 꽃이 만발할 수 있게끔 하실 줄 믿습니다. 12월 동안 내 생각과 주장 다 내려놔보시고 하나님께 맡겨보시고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2) 광야에서 얻는 것 : 무에서 유, 하나님이 주시는 관계와 확신

복음서 대부분이 포함하고 있는 공통된 예수님의 발자취가 바로 세례와 마귀 시험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 모두 광야에서 이뤄진 사건들입니다. 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시고자 하셨던 것은 무엇일까요? 분명 이 광야의 시간을 가지고서 예수님은 복음 전파사역을 시작하십니다. 그 두 가지가 세례를 통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이었고, 두 번째가 마귀의 시험이었습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약속의 징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즉 예수님은 이 세례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예수님의 인생 모두를 책임지고 계심을 약속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11절입니다. 

10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세례요한에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 하나님이 이 땅에 임하셨고, 성부 하나님의 선언이 있었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 삼위일체 하나님의 놀라운 함께하심과 연합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확신"을 얻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세례가 우리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이유는 "하나님의 선언"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 세례에 있는 것이시죠. 그렇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선언되었습니다. 그 전에도 예수님을 사랑하셨지만, 선언함으로써 공식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세례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확신을 얻으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는 올해를 시작할 때 어떤 것으로 시작하였습니까? 내가 20년을 시작할 때 나는 어떤 근거와 확신을 가지고 한 해를 시작하였나요? 우리가 한 해 계획을 짤 때 출발점은 "나에게 모자란 것"으로 시작할 때가 많습니다. 다이어트, 저축, 담배끊기, 술 줄이기, 성경통독 하기, 새벽에배 등이 그런 연유로 시작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시작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우리의 21년으로의 부르심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확실한 근거로 시작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부정적이고 나에게 모자란 것 부재의식에서 시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확신"에서 시작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믿음", "자신감", "용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할 때 결코 무너지지 않고 포기되지 않는 목표가 될 것입니다. 15절을 볼까요? 

15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사역시작은 예수님이 원하셔서 시작하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짐"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30살에 사역을 시작하셨을까요? 본인의 판단이었을까요? 어떤 근거로 시작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큰 흐름과 인도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무언가를 두고 기도하실 때에 예스 or 노라고 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깨어있는 심령이면 분별력이 함께 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그것을 두고 기도하지 않아도, 판단력을 가지고 저절로 결정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짐을 아시고 부르심의 때를 아시고 나아가셨습니다. 때가 된 것을 아셨던 것이지요. 그러니 결코 실패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럴 때 무에서 유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광야라는 무에서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확신을 가지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광야로 나아가시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은 이 사건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12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13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40일동안 광야에 계시면서 시험을 받으시며 천사의 수종을 받으셨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 때 예수님께서는 돌이 떡으로 변하게 함으로써 배고픔을 이기게, 두 번째는 성전에서 뛰어내려 천사의 수종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불신과 불안에 대한 감정에 대한 시험을, 세번째는 마귀에게 절함으로써 모든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받으라는 영적질서에 대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을 이겨내심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의 견고함을 더 가지게 되셨습니다. 여러분, 시험은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를 훈련시키고 단련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예수를 광야에서 시험에 두사 하나님의 말씀으로 견고케 하셨습니다. 

우리는 20년을 살아가면서 고난과 위기가 찾아왔을 때 무엇으로 이겨냈습니까? 아니면 대처하려고 했습니까?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나요? 우리가 신자로서 살아가면서 최후의 무기는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약속으로 믿으며 살아가는 것, 그것으로 나의 멘탈을 유지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며, 지혜롭게 풀어나가는 것. 그것이 신자가 가지는 무기입니다. 

 

3. 결론

자포자기라는 말을 맹자가 했다고 합니다. 자포,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자, 자기 자신을 내버리는 자라고 합니다. 자포자기하는 자와는 함께 말을 할수도 없고 일할 수도 없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하나님도 그러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귀하게 작정되어 있는지, 예수 십자가로 고귀하게 대접받고 있는지,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만큼 귀한 존재인지 믿는 자에게 함께 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정욕과 안목의 기준으로 포기하고 함부로 대하며 자신의 고집과 안목으로 세상의 기준으로 학대하려는 교만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십니다.

이제 우리는 한해를 정리하는 이 시점에서 생각을 정리해볼 수 있겠습니다. 광야로 가는 그 시간, 하나님 앞에서 모두 내려놓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와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확신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무기들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실패하지 않고 또 포기하지 않게 되는 목표를 향해 22년도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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