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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_F/주일설교

눅 17:11-19 after 추수감사절

by 우루사야 2021. 11. 27.

본문 : 누가복음 17 11-19    

제목 : 믿는만큼, 감사하는 만큼

 

1. 서론

1) 들어가기 

오늘 자리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가득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은 지난 추수감사절에 이어서 애프터 감사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감사할 것에 감사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서 살펴보며 우리는 추수감사절이 끝난 시점에 감사를 하는 자인지 살펴보겠습니다.

 

2) 예화 

국제시에나사진전이 있습니다. 여기서 올해의 사진으로 뽑힌 사진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진에 등장하는 부자는 내전으로 한참을 고생하고 있는 시리아와 터키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사진 속의 아이아빠는 시장거리에서 폭탄테러로 오른쪽 다리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에는 없지만 아이 엄마는 시리아 내전 당시 신경가스를 흡입해 신경발작을 겪은 약물을 복용하게 되었는데, 당시 임신 중인지라 약물복용에 따른 선청정 질환을 아이에게 물려줄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속에서 베어 나오는 느낌은 어떻습니까? 평온과 행복,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듯합니다. 테러로 다리가 사라져도 살아가는 , 내전을 겪는 나라 상황에서 가스를 흡입하여 발작을 일으키게 되어도 생명을 낳고자 하는 의지. 5 아이의 이름은 무스타파인데, 아이는 자라면서 무엇을 배울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갈 있다는 삶의 의지를 배우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진을 찍은 작가는 제목으로 "hardship or life"라고 지었습니다. 삶의 역경 또는 삶의 곤란함이라고 했는데, 저는 사진을 보고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삶의 충만, 강력한 생명력" 가족은 환경만큼 행복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생명력만큼 행복하고자 했습니다. 우리의 삶을 잠시 생각해볼까요. 

 

3) 주제 

우리는 살아가다보면 많은 상황과 어려움, 곤란함, 하드십을 겪기 마련입니다. 위에서 살펴 사진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사는 삶의 주변에는 우리를 절망케 하거나 실족하게, 또는 근심케 하고 고민하게 하는 것들이 가득합니다. 오늘 하루 행복하다가도 내일되면 행복은 금새 사라지곤 합니다. 어찌보면 인생은 행복의 찰나를 살기 위해 오늘도 근심과 염려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럼에도 사람의 생명력은 항상 솟아납니다. 오늘도 살아가게끔, 오늘도 발걸음 걸어가게끔 합니다. 그럼 우리는 우리가 가진 생명력만큼 살아내고 있나요, 아니면 환경이 주는 만큼만 행복하고 있나요.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생명력만큼 행복할 있도록 말이죠. 오늘 절망에 빠져 눈을 감고 잠에 든다 할지라도 내일이 되면 생각과 마음이 정리가 되고, 지쳤던 육신이 힘을 얻어 다시금 일어날 있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을 바라보며 살아갈 있게 됩니다. 내가 무언가 소망이 있어서도 아니고, 삶에 희망과 목적이 가득차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의 반복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회복할 있게끔 만드심으로써 하루하루를 살아낼 있도록 하셨습니다.

 

4) 본문잇기

오늘 본문 중에 18-19절을 읽어봅시다. "18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사람을 축복하시며, 그에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 외에 다른 유대인 9명은 육신의 구원만 얻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멸시받던 신앙혼혈족 사마리아인 문둥병자는 육신의 나음도 그리고 영혼의 구원의 확신도 얻을 있게 되었습니다. 

 

믿는 만큼, 감사한 만큼 얻을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시간을 통해서, 그리고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연말 동안 7번의 모임 속에서 우리가 한해를 돌아보며 "고난 속에서 역사하셨던 하나님" 믿음으로써, 분을 불러봄으로써, 그분 앞에 인생을 내려놓음으로써 우리가 더욱 많은 구원의 역사, 구원의 확신, 은혜의 역사를 받을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2. 본문

1) 처음 얻은 구원

오늘 본문 11-12절을 먼저 볼까요?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누가복음 9장부터 19장까지는 예수님의 전도여행으로 생각하시면됩니다. 9 전까지는 예수님의 고향 갈릴리에서의 사역이었고 19 이후는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이었다면, 사이는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사역을 하시는데 누가는 사역여행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인자가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 잃어버린 중에서는 유대인이 경멸했던 병자, 세리 삭개오, 장애인 등과 같이 사회적으로 "저주받은 자이거나 죄를 지어 지옥에 "라고 생각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곳곳을 돌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신 자격으로 가는 것이지 너희가 이뤄내고 생각한 세상논리로의 자격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직접 사역을 하시면서 말하고자 하셨습니다. 중에 예수님은 마을에 들어가셔서 "나병환자 " 만나셨고 그들을 고치기로 하셨습니다. 

 

특히 나병환자는 당시에 "전염균"처럼 여겨졌습니다. 율법에도 그들은 고향과 가족에게서 떨어져서 격리되어 나병환자들끼리 모여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12절에서 예수님을 부를 때에도 그들은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무어라 말합니까?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여기서 "선생님"이라는 표현은 특이한 표현입니다. 보통 랍비여, 주님이시여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그들은 선생님이여라고 부릅니다. 만난적은 없지만 무언가 자신들의 현실에서 돌파구를 찾아줄 같은 자를 향한 호칭일 것입니다. 헬라어로 쓰인 특이한 선생님 표현은 관계가 있는 이들이 쓰는 단어인데, 초면의 문둥병자가 쓰는 것이기에 이에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의 부름과 의지함을 보시고 14절과 같이 이적을 행해주십니다.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본래 문둥병자는 율법에 격리되어 있다가도, 병이 낫게 되면 가족들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먼저 제사장에게 가서 병이 나았음을 확인을 받고 가족에게로 돌아갈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10명의 문둥병자에게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적을 행할 것이니 너희가 가는 길에 나을 것이다, 라는 명령이신 것이지요. 그리고 실재로 그들은 가는 도중에 깨끗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10명의 문둥병자는 모두 예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도 빠짐없이 나음을 얻을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부르심에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에 성찬을 하며 애찬을 함께 나누며 풍성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지 생각해보아야 문제가 있습니다. 감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지를 말이지요. 우리는 분명 구원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묻겠습니다. 지금도 여러분은 구원의 감격이 있으십니까? 지금 하나님과 함께 하고 계십니까?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17-18절입니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병이 나앗을 때에, 기도제목이 성취되었을 , 문제가 해결되었을 나는 누구를 기억합니까? 아니면 변화된 현실에만 바라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 아홉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들은 감사하지 못했을까요? 현실의 문제를 위해 기도를 하지만 하나님보다 문제가 컸기 때문입니다. 상황과 인식이 하나님보다 컸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이란 우상을 비교시키시는 것이고, 중심에 "감사했느냐"라는 우리의 실천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2) 현재의 믿음과 감사

오늘 본문에서 보면 10명중에 주신 것에 감사하며 실천에 옮긴 이는 한명이었다고 누가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15-16절입니다. 

 

15 중의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0명중 사람이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멈춰서서 다시 오던 길을 걷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제사장에게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명은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누가는 1명에 대해서 세부적인 설명을 덧붙여줍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사마리아인은 순수혈통 유대인이 아닌 혼혈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 순수혈통 사람들에게 구원에서 탈락된 족속이라고 여김을 받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잃은 자를 구하러 곳에 오셨고, 그래서 누가는 예수님의 의도에 맞게 사람이 예수님께 돌아온 자라고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의 아래에 엎드리어" 있습니다. 전에 그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12절에 보니 "멀리 서서" 예수님을 부르던 자였습니다. 9명의 유대인은 그나마 순수혈통이라 앞서 불렀을 것이고, 사람은 사마리아인이고 예수님과 혈통이 달라 아마 뒷편에서 어떻게 같이 묶여 없을까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도 같이 나음을 받게 것입니다. 생각지도 못했고 상상하지도 못했고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지요. 예수님이 허락하신 문둥병의 치유는 그의 몸의 치유 뿐만 아니라 정서의 치유까지 이뤄졌고, 유대 순수혈통의 선생이었던 예수님 바로 앞까지 가게끔 했습니다. 그렇게 그의 마음은 "담대함"까지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다시 한번 다른 구원까지 말씀해주십니다. 19절입니다.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그를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자격과 조건, 실천한 내용이 아니라 "믿음" 말씀하십니다. 혈통이나 선행이 아닌 "예수님을 믿고자 했던 믿음"으로만, "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언해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것을 생각해볼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의 첫만남을 기억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강력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만났고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도 분을 만나고 있고 감사할 있느냐"라는 질문에 답변할 있겠는가입니다. 답변에서 우리에게 기준이 되어줄 있는 것이 16절의 사마리아인 문둥병자의 행동입니다. 

 

16예수의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사마리아인이야 말로 복잡한 자의식을 가질 밖에 없습니다. 유대인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피가 섞인 유대인이기에 율법과 성전에 대한 갈망,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유대인 예수님께 가까이 가고는 싶지만, 없었던 자였습니다. 게다가 거기에 문둥병이라는 복잡한 상황에 처한 것이 사마리아인 문둥병자였던 것입니다. 사실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그야말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했던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한가지를 묻게 만듭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인가?" 

 

그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했던 그러나 가까이 없었던 정말 안타까운 자의식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치유를 받았을 , 감사할 있었습니다. 우리의 감사가 현재 이어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받기 전에 우리의 상태" 기억하는 아닐까요? 사마리아 문둥병자가 감사할 있었던 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신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감사는 놀라운 것을 가지고 오게 했습니다. 그의 영혼의 구원까지 허락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행동이 얼마나 영향력을 가진지 알지 못했던 자입니다. 자신의 낮춤과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지 알지 못하고 다만 감사했을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나를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과 믿음은 우리의 현실과 내세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3) 애프터 추수감사절, 나는 감사하고 있는가?

오늘을 제외하면 12 한달이 남게 되었습니다. 시간 동안 우리가 7 정도 모일텐데 7번의 시간 동안 다른 무엇보다도 "한해를 정리" 있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7 동안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따라가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성경은 7가지의 인생의 원리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훈련시키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언가를 맡기시고, 부흥케 하십니다. 때론 우리가 시험에 당하여 기다림의 시간을 가지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승리에 우리가 동참했음을 확인하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라 7가지의 원리들을 살펴보며 우리의 한해가 예수님의 발걸음과 얼마나 비슷했는지, 다르다면 얼마나 달랐는지 바라보며 우리의 내년을 계획할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이렇게 믿음의 감사의 시간을 연말동안 예수님의 길을 바라보며 살펴보길 소망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유대인 문둥병자에게 하셨던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볼 있길 소망합니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문둥병자가 제사장에게로 향했던 길과 예수님께로 돌아왔던 길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전자는 제사장에게 확인을 받아 현실에서 누리고픈 것들을 누리고자 하는 아니겠습니까? 후자는 무엇입니가? 내가 누릴 것을 내려놓고 은혜의 근거이자 출발점이 되어주시는 분에 대한 신앙고백일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고백은 그의 영혼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을 지난 한주일을 보냈습니다. 성찬을 통해서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신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삶이 혹시 한주간 여러분의 회사, 학업, 가정, 가족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나셨나요? 성찬을 통해 우리는 "이미 받은 구원과 죄씻음" 회복을 가지고 있으며, 나와 연합하여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을 살아냄을 고백했습니다. 기적의 삶을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혹시 그것이 예배 시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지요. 

 

여러분, 백혈구 아시죠? 면역력을 높여주는 것인데, 백혈구 종류 중에 티세포라고 있다고 합니다. 세포는 바이러스세포를 보면 끈적끈적한 물질을 세포에 쏴서 세포를 죽인다고 합니다. 그럼 티세포는 언제 늘어날까요? 튀빙겐 대학 연구팀은 잠을 충분히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비교해보니, 전자의 경우 티세포가 가장 많이 활발했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그래서 잠은 보약이라는 속담은 사실인 것이죠. 환경이 어려워도 우리는 생명력 만큼 행복할 있습니다. 

 

우리는 믿는 만큼, 감사한 만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찾아내고 누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복을 누리는 결과보다 복의 출발점인 하나님께로 나아갈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도 좋고 예배를 드리는 것도 좋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로 들어가는 큐티입니다. 큐티 속에 말씀과 기도, 묵상하며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이성과 감정, 내면, 영혼 속에서 만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판에 말씀하고자 하십니다. 청력, 시력, 촉감도 좋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마음판이기 때문입니다. 

 

 

3. 결론 

 

하나님은 인간이 인생의 1/3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시간을 통해서 몸뿐만 아니라 생각, 감정 등도 정리하고 회복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항상 힘을 내고 동기부여를 새로이 가질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항상 감사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사가 없을까요? 추수감사절에 그렇게 감사를 말했으면서 한주만에 감사보다 불평이 많아지는 것일까요?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부재한 "들에 대한 욕망이자 결실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요즘 조금씩 몸이 건조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겠지요. 체내 수분량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몸이 마르기 시작하고, 그러다보면 주름이 생기며, 점점 왜소해지겠지요. 그것이 점점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안에 있던 생명이 점점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불안과 초조로 작용하며, 나에게 없는 것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이 넘치는 존재로 우리를 만드셨지만, 우리의 죄는 우리의 생명과 함께 많은 것들을 앗아가는 존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을 통해 생명을 회복하지만, 근원적인 죄라는 것을 통해 생명보다 염려와 근심에 휩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를 이기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류가 죄를 이길 있도록 세상에 인류의 대표로 오셨습니다. 대표를 통해 우리는 죄를 함께 이기는 혜택을 누리게 되었고, 결과 본래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생명이 죄로 인해 사라지지 않고 유지하며 살아갈 있게 되었습니다. 육신은 죄로 인해 죽지만, 우리는 육신이 부활하여 고차원의 존재가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믿을 우리는 근심, 아픔, 문제, 역경, 하드십이 있더라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생명력만큼 그리고 예수님이 이뤄놓으신 환경만큼 행복해질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 한가지만 남았습니다. "우리의 의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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