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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_F/주일설교

행 8:26-39 주일설교

by 우루사야 2021. 11. 13.

제목 : 하나님나라의 이산가족

26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

27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9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35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7(없음)

38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39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1. 서론
1) 들어가기
우리는 지난 주에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나에게 주신 것들에 감사하며 이번 추수감사절을 보내는 우리가 되길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오늘은 미리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앞으로 받을 것"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 말은 곧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감사하게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미래를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현재라는 시간을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과거에 이미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또 앞으로 주실 은혜에 소망을 갖는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시기 전부터 약속하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미리 은혜를 주셨고 또 미래에도 은혜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미래에 약속되어 있는 은혜를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지 함께 이야기나누며 추수감사절을 준비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2) 예화 
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에 "액땜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앞으로 당할 큰 액운을 대신하여 미리 다른 가벼운 고난을 겪어 때우는 것을 말합니다. 무속적인 의식과 관려이 있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민간 신앙에서 비롯된 용어입니다. 전혀 상관없는 일련의 사건들을 일부러 연관시켜 자신의 미래의 전망을 밝게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일 것입니다. 이걸 실생활에서 생각해보면 더 쉬울 것 같습니다. 여러분 제가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왔습니다. 연속해서 5번이 그렇게 나왔습니다. 그럼 그 다음 던질 때는 어떤 면이 더 나오기 쉬울까요? 그렇죠. 앞면이나 뒷면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전에 몇번이나 앞면에 나왔던, 다시 던질 때에는 여전히 확률은 50대 50입니다. 앞사건과 뒷사건을 연결해서 미래를 규정지어보려는 우리의 생각성향인 것이지요. 그럼 여러분 로또번호를 예측한다는게 의미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네 없습니다. 과거 번호기록들을 분석해서 번호제공해주는 유료사이트들이 있는데 사실 의미가 없는 것이죠. 이것을 도박사의 오류라고 부릅니다. 원인과 결과에 있어서 연관성이 없는 것들이나 사건들을 어떻게든 연결시켜 결과를 도출하고 거기에 돈을 걸려고 하는 도박사들. 혹시 우리가 이 모습은 아닌지, 나의 미래를 보장해줄 수 없는 것에 내가 시간과 에너지, 의지, 이성, 감정, 재정 등을 베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액땜이라고 생각했지만, 미래에 더 안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 인생인데 말이죠. 나의 미래를 예측하려는 것은, 우리의 불안해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주제
왜 이렇게 사람은 미래에 대해서 관심이 많을까요? 그것은 과거를 덮거나 지우고 새롭고 변화된 미래를 바라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의 미래를 예측하려는 것은, 우리의 불안해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류가 뻔히 있는 논리를 펴서라도 과거를 묻어두고 새로운 미래로 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는 결코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를 봄으로써 미래를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확실성과 신뢰성이 가득한 자와 한 약속이라면 더욱 더 확실하겠지요. 요즘 대선후보들이 각국을 돌면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문제를 함께 토의를 하고 결론을 도출하며 "공략"을 세우고 있습니다. 약속을 하는 것이지요. 그 약속을 잘 지킬 것 같은 사람이 결국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미래를 그리겠지요. 그럼 대통령중의 대통령이라고 불리우는, 성경의 표현으로는 만군의 주라고 불리우는 분이라면 어떨까요? 인간보다 더 약속을 귀히 여기시는 분이라면 어떨까요? 인간과 약속을 맺어 행복한 미래를 그리게끔 하시는 분이라면 어떨까요? 선악과라는 약속을 아담과, 무지개라는 약속을 노아와, 별과 모래로 자손에 대해 아브라함과 약속을, 수많은 심령의 감동으로 왕조와 메시야에 대해 다윗과 약속을 하셨던 분이라면 어떨까요?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행복을,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약속하시는 분입니다. 

구약에서는 지난 주에 나눈바와 같이 그 약속이 할례로 표시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은 무엇일까요? 네, 바로 세례입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예수시대"의 표시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세례"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세례를 받는 자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유언으로 이 말을 남기셨죠.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장) 세례는 곧 영역확장의 표시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오심으로 이 세상에 오고 있습니다. 그 표시들이 점점 늘어가는 것이 바로 "세례"를 통해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도박사의 오류는 근거없이 미래를 확인하려는 것이라면, 세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계속 주지할 수 있게끔 한다는 것은 첫번째로 나의 입장의 변화,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 세상과의 관계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변화들을 항상 인식하며 "변화된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소망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본론잇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초대교회의 격변기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교회는 리더가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있었지만, 그는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이 각 성도에게 임하셨고, 신자는 각자 모시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가지고 곳곳에 가서 세례를 주고 제자를 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가지는 자들이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례받은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약속에 참여하게 되는 혜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즉 공허한 삶이 "하나님의 혜택으로 규정된 삶"으로 변화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세례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약속의 표시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받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여러분의 탄생만큼이나 여러분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선택이요 작정이었던 세례, 즉 약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곁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아도, 나를 복음의 길로 인도해준 그 사람이 없어도, 내 안에 세례와 약속된 성령님이 계시니 미래를 근거있는 확신으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한명이 바로 에티오피아 내시였습니다. 그의 인생이 복음과 만나 세례를 통해 어떤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가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는 한 주가 되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세례로 나아가는 삶

오늘본문에서는 주의 사자, 빌립, 에디오피아 내시가 등장합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고위관리직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충분히 평안할 것이지만, 그는 이방인이면서도 영혼의 갈망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신앙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그 결과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하러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말씀을 통해 자신의 영혼과 미래가 어찌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그로 하여금 성경을 읽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돌아가는 길에 빌립을 만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고, 기꺼이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오늘 본문의 마지막장면인 38-39절을 읽어봅시다. 

38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39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누가는 에디오피아 내시에 대해서 두 가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내시는  빌립을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12제자가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는 생전에 절대 못본 것처럼, 이 내시도 복음의 통로였던 빌립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 입니까? 신약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예수, 내시에게 빌립은 떠나줘야 할 분들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심으로써 이들이 기쁘게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의 확장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본문 26-29절을 살펴보겠습니다. 

26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27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28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29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하나님은 우리가 세례라는 근거를 가지고 미래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표시인 세례를 통해 우리가 미래를 소망으로 그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은 세례의 사역으로 잃은 자를 찾으러 나아가십니다. 본문 속의 내시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6-29절에서 빌립과 내시의 세례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 힌트들을 살펴볼까요. 

누가 언제 - 하나님은 빌립이라는 사람을 불러내십니다. 그 당시 빌립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엄청 바쁜 목사님처럼 전국을 돌만큼 엄청난 메시지를 전하던 분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만큼이나 초대교회에 있어서 강력한 복음의 힘을 내비치는 이였습니다. 그런 그를 주의 사자는 이끌어내어 내시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있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세례를 어떻게 기억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세례를 위해서 그 교회를, 그 목사님을, 그 공동체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어디서 - 주의 사자는 내시가 예루살렘에서 예배가 끝난 뒤에 그를 만나게 합니다. 지리적으로 보면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근처 도시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보자면 사마리아에 있던 빌립과 예루살렘에 있는 내시가 서로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들을 광야, 내시가 돌아가는 길에서 만나게끔 하십니다. 그런데 내시가 남쪽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었습니다. 누가는 다른 한 길이 아닌 광야길에 서있으라는 섭리가 있었다고 전합니다. 쉽고 편한 길이 아닌 세례주기 어려운 그 길 속에서 하나님은 역사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빌립에게 한 사람을 보게 하셨습니다. 에디오피아 한 사람을 말이죠. 여러분의 세례는 군부대에서처럼 많은 수가 한꺼번에 행해지는 세례였을 수도 있고, 작은 교회에서 간소하게 치뤄진 세례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러분 한명을 보고 세례식을 준비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약속의 징표인 세례를 기억하며 미래를 꿈꾸고 소망할 수 있게끔 말이죠. 

성찬과 세례가 보이는 은혜를 말해준다는 것에 있어서 공통점은 있지만, 단회적이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는 "자격과 포지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통해 교회에 들어와 교회 안에서 성찬으로 성장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찾아 그들로 교회를 통해 관계를 회복하고 성장시키고 성숙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세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세례를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현재 처한 상황보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들을 기억하게 됩니다. 세례는 곧 내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안에 계신 성령하나님, 그리고 그 성령 하나님이 증거해주시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진리들로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약시대가 구약시대보다 더 가까이 하나님의 오심의 증거입니다. 

물론 아직 우리는 목회자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가장 진리를 잘 깨달을 수 있을 때가 저 천국에서 하나님 앞에서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과 신약시대의 차이는 지금 우리 안에 성령님이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예배드리며 현실 속에서 천국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다는 미래성에 있습니다. 세례는 바로 그런 자의 삶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획기적인 시대의 변화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갈4:4-7)"

세례는 우리의 입장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려주는 "보이는 은혜, 표시된 약속"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미래를 그리며 현실을 살아낼 수 있는지 우리는 근거와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게끔 됩니다. 그렇다면 그 과정은 무엇일까요? 누가는 내시가 어떤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된 약속을 깨닫게 하셨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30-35절로 이어집니다. 

 

2) 예수가 준비한 구속, 회복된 미래 
30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32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33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34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35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빌립을 내시에게 보내신 목적은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누가는 내시가 읽은 성경구절을 세세하게 인용합니다. 즉 빌립과 내시의 만남의 목적이 되는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말하고자 함입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이미지는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같이 조용히 입을 열지 않으시는 주"였습니다. 내시는 이 사람이 이사야 본인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말하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그것을 빌립은 "예수를 가르쳐", 즉 예수로 해석하여 해설해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복된 소식"이었음을 가르칩니다. 이 구절 전에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빌립이 어떻게 예수를 설명했는지 알수는 없으나 내시가 읽는 부분의 위아래를 설명하며 말해줬을 겁니다. 즉 "예수는 인류의 죄를 씻기기 위해 이 땅에 온 하나님"을 말한 것이지요. 좀 더 쉽게 말씀드릴까요? 빌립은 하나님이 내시가 행복하길 원하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두려운 존재도 아니고, 당신을 평가하는 존재도 아니다. 당신을 바라보고 계시고 당신을 위해 이 광야로 보내셨고, 당신을 격려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말이죠. 그래서 그 죄짐을 책임질 예수도 보내셨다는 것을 말이죠. 그런데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내시는 후에 빌립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그 세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왜 세례는 물로 하는 것입니까? 바로 "죄씻음"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로 말미암아 죄가 씻겨져 내려갔다는 표시된 은혜인 것이지요.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내 죄가 씻겨져 내려간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미 예수로 죄씻음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확신하기에, 그 믿음의 증거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와 세례의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우리의 죄를 씻겨내셨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 이 죄씻음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복"입니다. 우리의 행복입니다. 방금 읽은 이사야서 본문에서 다른 구절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b) 

이것은 우리의 미래에 평화와 나음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우리 인생에서 어려움과 고난이 있지요.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것의 안에는, 그리고 그 결과에는 평화와 나음이 있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예언하고 확증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빌립은 내시에게 이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방인이었습니다. 내시였습니다. 국고를 관리하는 고위직이었지만 그의 안에는 공허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교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땅에서 올라와 예루살렘까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 나치수용소에서 수감생활을 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기이한 현상 하나를 소개해줍니다. 1944년 12월 25일부터 1945년 1월 1일 연말크리스마스시즌 동안 수용소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했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전염병, 가혹한 노동과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용자들은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따뜻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졌지만, 그것이 이뤄지지 않자 절망에 빠진 나머지 육신의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절망으로 죽지만,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러 왔습니다. 미래를 주러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복음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 자살률의 특징 중 하나는 80대 이상의 노인자살률입니다. 우리나라 30세에서 79세까지 10만명당 30명 내외의 자살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80세 이상으로 가면 70명으로 배가 높아집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급격한 산업화와 발전으로 인한 자신의 가치에 대한 절망이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과 건강이 있다 하더라도 "절망" 앞에서 사람은 약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갑자기 높아진 계층의 자살률이 있습니다. 바로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원인에 대해 지금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현대여성들이 느끼는 "소외감"에 대해서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살만한 세상, 절망보다는 소망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함께 고민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정책과 공동체의식, 공감 등의 인간적인 방법들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는 그들을 위해서, 그들의 미래와 소망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들의 평안을 위해서 말이죠. 에디오피아 내시의 공허감이나, 80대 노인의 자존감하락이나, 20대 여성의 막연함이나 그 모든 것에서 "소망"을 일으키기 위해서 예수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에게 미래가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심령, 지성, 의지, 감정에서 예수님이 심어놓으신 것이 있습니다. "대"입니다. 대신할 대입니다. 우리가 직접 살아야 할 때는 저 천국에서 왕노릇할 때입니다. 지금은 예수님께 배우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매일 묵상을 하셔야 합니다. 하루의 일과를 두고 "미래가 약속된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맞을까? "미래가 약속된 나"는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맞는가? 이런 질문들을 통해서 말이죠. 

 

 

 

3. 결론

본문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36절부터 39절입니다. 

36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7(없음)

38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39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36절에서 내시는 그간 준비된 길을 걸어왔다면, 이제 스스로 반응하고 결단합니다.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자는 거리낌이 없습니다. 두 번째입니다. 39절입니다.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의 길은 공허가 아니라 불안이 아니라 막연함이 아니라 "기쁨"이었습니다. 거리낌 없이 기쁨의 길을 걷는 인생이 바로 신자의 인생입니다. 

세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미 주어진 구원과 은혜를 깨닫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그 구원과 은혜의 내용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과 우리의 죄씻음, 그래서 우리가 당당히 세상으로 나아가 기쁨으로 살아낼 수 있다는 미래입니다. 우리가 기대를 걸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세례는 말해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한대목을 읽어드립니다. 

 

6어두운 데에 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 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의 세례식은 언제였습니까? 어디서였습니까? 하나님은 그 속에 계셨고, 그 안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러분에게 그 약속을 깨닫게 하고자 하십니다. 이번 한주 여러분의 세례를 기억하시면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소망찬 미래를 그리시며 감사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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