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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_F/주일설교

눅 19:1-10 주일설교

by 우루사야 2021. 10. 26.

 

 

1. 서론 

오늘은 선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이것은 우리의 컴플렉스가 되곤 합니다. 진심은 그렇지 않은데, 착한 행실을 억지로 보이려하는 것은 오히려 진심이 드러났을 우리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착하게 살아가야 할까요? 착하지 않은 나는 어떻게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선한 삶을 있을까요?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삭개오 본문이 적절한듯 합니다. 삭개오 본문을 기록하면서 누가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선행을 하기로 결단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삭개오가 어떤 이유에서 어떤 감동으로 선행의 삶을 시작했는지는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목적을 가지고 오셨고,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났을 뿐인 사건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도신경에 대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 주는 사도신경은 우리의 믿음고백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박국처럼 나의 관점이 깨어지는 것이 믿음고백입니다. 그리고 깨어진 심령에 믿음과 신앙이 들어오면 행동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선행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선행은 "자연스럽게" 살아집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선행을 억지로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안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성령님의 감동으로 시작하는 선행을 살아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삭개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니 선행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바울처럼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나 회심하는 시간을 가지거나, 베드로와 같이 기적과 함께 예수님을 만나 엎드려 죄를 고백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연스러운 만남으로 삭개오를 만나시고, 자연스럽게 삭개오와 관계를 가지셨습니다. 그랬더니 삭개오는 변화되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의 부르심은 사실 소수의 예가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러운 인격적인 만남, 주변 사람을 만나듯 마음에서부터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선행이라는 것은 안에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만나, 감동을 얻어 하게 되는 우리의 삶이 됩니다. 

 

종단연구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오랜시간 동안 추적하며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는 방식입니다. 하버드대에서 가장 오랜시간인 75년짜리 종단연구를 했었습니다. 주제는 "행복"이었습니다.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742명을 대상으로 시작했습니다. 오랜시간이다보니까 담당자도 4번이나 바뀌었는데 4번째 담당자인 로버트 윌딩어 박사가 내린 결론은 정말 간단했습니다. "친밀하고 좋은 인간관계"였습니다. 사실 동양하면 "관계를 중시"하고, 서양하면 "개인의 권리" 중시하는 것으로 대부분 생각합니다. 그런데 서구사회의 가장 엘리트집단인 하버드대에서 이런 결과를 냈다고 하니 놀랍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이신론적인 관계이거나, 무신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가장 행복할 있는 기회" 잃어버리거나 스스로 버리는 꼴이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경에서 무어라 말해줍니까? 성부 하나님은 독생자 성자 하나님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인류의 대표로 세상에 보내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이 되시어 죄짐을 지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후에 성령 하나님은 땅에 임하셔서 우리의 양심과 심령 속에 지금도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표요 구속사의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복은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대해서 항상 주목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삭개오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니 선행이 살아지게 되었습니다. 전까지 주변 인들에게 비난의 대상이었던, 비인격적인 관계로 가득했던 그의 삶과 전혀 다른 삶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길 소망합니다. 우리의 믿음고백은 삶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나요? 스스로 선행이 부재하다면, 그것은 선행을 결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해야 합니다. 오늘이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멀어진 관계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10절입니다. 10인자가 잃어버린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사역목적은 "관계회복"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하나님께로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삭개오와 만남을 마무리하시며 하신 말씀이 바로 10절이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어떻게 회복시키시는지 구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절과 2절입니다. 

 

1예수께서 여리고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여리고를 들렀다가 가시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지도로 표현해보자면 대전에서 서울을 가려는데 굳이 양평을 들렀다가 가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인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목적과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잃어버린 사람을 찾으러 가시는 겁니다. 누가는 그래서 잃어버린 자가 누구인지 바로 소개해줍니다. 

 

2삭개오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

 

여기서 누가는 삭개오를 소개하면서 3가지를 말해줍니다. 먼저 그는 세리라는 직업을 가졌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대제국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래서 왕을 세울 없었고, 로마군이 세우는 총독이 대신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직업군을 세웠는데 바로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였습니다.
조정래씨 소설 태백산맥에 중심이 되는 갈등관계가 있습니다. 바로 땅지주와 땅에서 빌어먹는 소작농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운데 "마름"이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땅지주는 마름에게 올해 땅을 빌려줄 소작농을 고르게 하는 권한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소작농 입장에서는 소출을 많이 떼가는 지주도 미웠지만, 지주 아래서 자신들에게 내년 소작할 권한, 소작한 곡식을 떼가는 비율 등을 정해주는 마름은 같은 소작농이면서도 지주 아래서 간사하게 대하는 것이 여간 미운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소설에서 지주만큼 미움받는 것이 마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삭개오가 마름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로마군 아래에서 굴복당하는 유대인이지만, 그는 세리였고, 게다가 세리들의 장이었습니다.
셋째로, 그는 부자였습니다. 지금도 고대사에서 가장 오래된 성읍으로 알려진 것이 여리고입니다. 그만큼 도시였습니다. 도시의 세리장이었다는 것은 엄청난 부자였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누가가 삭개오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삭개오에게 이스라엘 국가보다 중요했던 것은 자신의 직업이었고, 여리고 공동체에서 세리장으로서 자신의 삶의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부자로서 입지가 든든해보이지만 뒷구절에서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처럼 "죄인"이라고 불리우며 무너진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세리를 검색하면 같이 세리와 이방인, 창녀와 세리, 죄인 세리로 뜹니다. 예수님도 마태도 세리에 대해서 그렇게 평가하고 계셨습니다. 결국 그의 삶에서 나라도, 도시와 신앙공동체도, 개인의 관계도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을 함께 봅니다. 예수는 삭개오에게 인격적인 관계회복의 시작점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가장 비인격적인 대우를 하기도 하고,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기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7절과 9절입니다. 

 

"7 사람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7절은 삭개오가 주변인들로부터 도시 안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려고 하니 사람들은 예수님이 교사요 선생으로서 죄인과 멀리하여 거룩함을 지켜야 하는데, 오히려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고 삭개오와 함께 예수를 비난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삭개오는 사람과 공동체로부터 멀어진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9절입니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 집에 이르렀으니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인 삭개오는 자신의 믿음의 고백을 "선행"으로 고백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예수님은 삭개오를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삭개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고 인정해주십니다. 그럼 전에는 어떻다는 것이었습니까? 잃어버린 자였다는 겁니다. 무너진 관계였다는 겁니다. 

 

이렇게 사람으로부터, 공동체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비인격적인 관계로 가득했던 삭개오였습니다. 사람은 둘째치고, 그는 하나님과 비인격적인 관계였을까요?
첫번째는 삭개오 스스로 때문이었습니다. 세례요한도 말했고 삭개오도 스스로 인정했던 것처럼 "세리는 착취하는 직업"이었습니다. 정당한 세금을 거두기보다 많이 거둠으로써 자신의 부를 축적했던 자였습니다. 그는 사람과 공동체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재물" 뒤바깠습니다. 결국 그의 주변에 비인격적인 관계로 가득했던 이유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재물로 채웠던 자신"에게 있었던 겁니다. 믿음이 없으니 비인격적인 관계로 가득할 밖에 없었습니다. 

두번째로, 누가는 잃어버린 삭개오에 대해서 공동체를 언급합니다. 7절을 다시 살펴볼까요? "7 사람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여리고라는 도시는 신앙공동체입니다. 도시에서 가장 우선시 되어야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으로 서로 보듬고 보살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자손이라는 정체성보다 "죄인"이라는 낙인을 먼저 찍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향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언 전에 그는 죄인이었을 뿐입니다. 그를 품어내는 것이 아니라 "수군거리"기만 뿐이었습니다. 그를 잃어버린 공동체때문에 예수님은 여리고에 가실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리해보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일상 1단계로 돌입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방향은 어디일까요? 우리가 주제로 다루는 선행으로 우리의 교회를 채우면 되는 것일까요? 서론에서 말씀드렸다시피, 그리고 본문에서도 말해주는 바와 같이 선행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관계입니다. 그것이 먼저입니다. 그럼 선행은 따라오게 됩니다. 

 

일상회복처럼 교회회복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처럼 계속해서 말씀중심으로 나아가면 되겠습니다. 하지만 반면 우리 주변에 코로나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잃어버린 "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죄인이라 낙인찍으며, 어쩔 없는 사람이라며, 수군거리는 자가 아닌 예수님과 함께 잃은 양을 찾아 예수님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우리 행복한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2) 가까워진 관계 

이제는 잃어버린 삭개오를 찾아야 때입니다. 예수님은 여리고로 들어가십니다. 여기서 10절을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10인자가 잃어버린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하늘에서 땅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삭개오를 찾고 구원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목적을 가지고 거리로 들어가십니다. 소식을 들은 삭개오가 있습니다. 

 

3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없어 

 

죄인이라는 평가 속에서도 가지게 되는 "예수에 대한 갈망" 있었습니다. 믿음은 갈망을 낳습니다. 공동체가 버린 그였지만, 그는 이제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합니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계속해서 세리에 대해서 비판적 메시지가 있었지만,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돌아올 있는 길이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삭개오도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들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구원을 받지 못한 자이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신다고 하니 만나려 합니다. 잃어버린 관계가 조금씩 회복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4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삭개오의 갈망은 예수님의 동선에 미리 서있게했습니다. 아직 만나지 않았지만 정서적인 가까움이 느껴지는 단락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예수를 만나기 위해 움직이게 한다. 믿음은 앞으로 가게 합니다. 믿음은 달려가게 합니다. 믿음은 보게 합니다. 믿음은 올라가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나의 한계됨, 모자람, 죄악됨을 항상 직면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죄인이 되어야 의인이 있습니다. 복음의 신비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항상 우리가 평안한 자이지만 또한 항상 돌봄을 받아야 하는 자임을 깨닫고 겸손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간절함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항상 만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5예수께서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여기서 우리는 의아한 점이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와 초면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름을 아셨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와의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는데 있어서 삭개오와 같이 먼저 계획을 가지시고 일하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래서 이렇게 우리에게 권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1:6) 

 

삭개오에게 믿음이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행동은 말해줍니다. 그는 예수님께 계속 가까이 다가가려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삭개오를 미리 아시고 그를 만나러 여리고까지 오신 것에 비하면, 삭개오는 단지 예수님이 보이는 나무 위로 올라갈 뿐이었지만,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가 자신의 구원의 문제에 대해 뭔가 해결점을 가진 분이심을, 그리고 분이 구원의 해결점이라는 상을 주시는 이심을 믿음의 행동으로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거리는 다시 한번 가까워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가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면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빨리 나무에서 내려오라고 말하십니다. 너희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민재 친구들 - 너네 가고 싶다. 탁구장 있다. 지난 주일 교회에서 숨밖꼭질 주하랑.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초대해달라고 말하는 민재 친구랑 같은 모습인 예수님. 그리고 민재는 아빠에게 허락해달라고. 삭개오는 여기에 반응합니다. 6절입니다.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여기서 우리는 선행이라는 주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길 소망합니다. 선한 삶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초청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초대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예수님은 구원의 삶으로 삭개오를 초대하셨습니다. 이에 삭개오는 "반응"했습니다. 우리가 해야 일은 "복음에 반응하는 "입니다. 

 

 

 

3) 결단하게 되는 선행

 

이렇게 인격적인 만남이 이뤄지고, 구원의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게 어떤 삶으로 이어지게 됩니까?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 소유에 대한 결단, 누가는 그가 부자라는 것을 미리 이야기함, 그에에 있어서 재물은 가장 중요한 것이었음

 

잃어버린 자를 찾아 나서신 예수님께 반응한 삭개오는 자연스레 선행을 결심하게 됩니다. 자신이 잃어버린 자라는 것을 알고 예수님께 반응하게 되니까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선행을 하게 삭개오와 선행이 아니라 군중에서 숨어 정죄하는 자들을 함께 살펴보길 원합니다. "7 사람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컴퓨터와 사람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컴퓨터는 찾았다보다 못찾았다가 느립니다. 왜냐하면 모든 곳을 뒤지기 때문이죠.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범위 내에서 찾았다 못찾았다만 결정하는 인지적 구두쇠입니다. 생각하지 않고 결론을 내려는 것이 인간이라는 겁니다. 자신의 경험과 직감을 의지해 결정을 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인 뭇사람들에게 삭개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뭇사람들은 삭개오 대해서 많은 사전지식을 통해 판단하고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결과 "죄인"이라고 낙인을 찍어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신비에까지 의문을 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을 통해 구원의 통로가 막힌 꼴이었습니다. 저는 이번주에 인생이 얼마나 복잡한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 할로윈과 민재
  2. 노태우 대통령의 공과 과에 따른 예우
  3. 교회에 누워있는 노숙자

속을 알아도 사람 모른다고 정도로 사람은 매우 복잡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은 얼마나 난제가 많고 복잡하고 힘들겠습니까?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무언가 확답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일 것입니다. 

6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 부르게 하셨느니라7그러므로 네가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 받을 자니라(4)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본래 어떤 위치였는지를 말해줍니다. 삭개오는 본래 종이 아니라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물이 좋아 떠나간 잃어버린 탕자였던 것이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리 아셨던 그래서 구원하셨던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로 떠났습니다. 우리는 우물을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로 잃어버린 관계를 되찾아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을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만나셔야 합니다. 그럴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선한 " 살아낼 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백성"임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자신이 세리로 어떻게 살아야 했는지, 주변 인식을 어떻게 뚫고 살아가게끔 할런지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직접 오셔서 삭개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이 알려주지만, 그것으로 깨닫지 못했을 성령님이 알려주십니다. 

 

3. 결론

우리나라에도 알려진 '스포트라이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로마카톨릭 성직자 성범죄 은폐에 대한 탐사보도를 바탕으로 그려진 영화였고,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합니다. 교회의 치부가 세상에 퍼져버린 치욕스런 사건이 아닐 없었습니다. (로마카톨릭과의 교회됨에 대해서는 차치하고서라도) 탐사보도를 이끈 마틴 배런은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장으로 재직했었습니다. 그의 팀은 17개의 퓰리처상을 받았는데, 그가 워싱턴 포스트에 재직했을 10개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그의 사회에 대한 공헌도는 높이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이런 결과를 낳게 했나. "유독구독자"라고 답했다. 유료구독자들이라 함은 "돈을 내기 마땅한 독특한 스토리, 심층 스토리, 누구도 다루지 않은 관점의 스토리를 다루려고 노력했다. 클릭수 기반으로 만든 스토리는 추후에 지속가능하지 못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신문사는 구독하는 사람과의 관계로 지속가능합니다. 

교회는 어떨까요? 우리는 항상 하나님 중심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임마누엘, 성육신, 성령강림으로 설명될 만큼 우리와 관계하려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을 떼어놓고 선행으로만 가득 채우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빠진 교회부흥, 하나님이 없는 지역사회 섬김, 하나님이 없는 종교교육. 그것은 클릭수를 기반으로 세워진 언론사처럼 지속성이 없는 모래성과 같습니다. 결국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풍성하시길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06Vnuqx0q4&t=845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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