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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_F/주일설교

눅 16:19-31

by 우루사야 2021. 10. 13.

1. 서론
1) 들어가기
지난 주에 우리는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중에 사도신경 성령을 믿사오며 부분의 앞 3가지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나머지 2부분인 성령을 믿으며 살아가는 자가 고백하게 되는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하기 위해 누가복음 16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예화 
통신업계에 5G시대와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시대를 맞이해서 주목받고 있는 것이 메타버스입니다. 초월을 의미하는 메타, 그리고 현실을 의미하는 유니버스의 합성어입니다. 현실세계를 그대로 가상공간으로 만들어 여러가지 영역에 적용하여 활용하는 개념입니다. 실제로 전남 광양 포스코제철소는 여의도5배에 달하는 공장입니다. 이런 거대한 공장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통합운전실은 공장전체에 해당하는 가상화면 속에서 원격으로 지시합니다. 그러니 직원도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겠지요. 한 눈에 볼 수 있게끔 하는 메타버스는 수많은 기계와 공정을 운영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 인생을 이렇게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태초로부터 종말까지, 내가 태어나면서 자라고 또 미래에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서 우리가 볼 수 있고 또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실 이것은 사람의 본능입니다. 하늘을 날아서 한 눈에 세상을 보고 싶고, 미래에 대해서 알고 싶고, 그래서 현실 속에서 살아내고 싶은 것.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점을 봅니다. 이것은 세계공통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현실적인 것들을 준비하는데 몰두하기도 합니다. 이것 또한 미래에 대한 욕망이지요. 

우리의 미래에 대한 본능은 사실 죄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동물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에 대해서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본능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고민하며, 현재를 살아냅니다. 본능으로만 이뤄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본능의 건강한 대안으로, 그 메타버스로 성경과 복음과 성령 하나님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과거를 낱낱히 말해줍니다. 왜 내가 죄인인지를. 그리고 해결책으로 복음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예수와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입니다.  그리고 현재라는 현실 또한 복음과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으로 꿰뚫어 보게끔 하십니다. 내가 지금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또 어떻게 처신해야 하며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말이죠. 모니터로 공장 전체를 보듯,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 전체를 볼 수 있게끔 해주십니다. 

3) 주제 
그런 점에서 성령으로 사는 삶은 미래를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냅니다. 현재가 모여 미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려주시는 미래가 오늘이 되게끔 합니다. 천국이 지금 내 삶이 되게끔 살아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중에 진짜천국을 입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고백으로 성령을 믿사오며,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미래에 대해서 우리는 확신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현재를 미래와 전혀 상관없이 살지 않습니다. 복음이 미래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는 성령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느끼게 해주시고 확신하게 해주시는 미래를 살아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해석하며 용서합니다. 현재의 육신이 부활체가 될 것을 알며 이 육신으로 오늘을 살아냅니다. 미래에 내 영혼이 불멸할 것을 확신하며 영혼을 다스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으로 살며 세상이 줄 수 없는 인격적이고도 영적인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성령을 믿사오며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4) 본문잇기
그래서 우리에게 누가복음 16장은 미래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좋은 답이 되어주는 장입니다. 예수님은 이 장에서 현실에 갇혀 살아가는, 물질주의로 가득찬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십니다. 그리고 신자는 지혜롭게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럼 이 자세한 이야기를 같이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본론

1) 바리새파 사람들과 나사로를 경멸했던 부자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 중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무리가 모이니 설교를 시작하셨는데, 두 가지 비유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먼저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고 두 번째는 부자와 나사로 거지 비유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 사이에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의도를 밝히십니다. 13-15절입니다. 

13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4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5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16)

바리새인하면 어떤 사람들입니까? 말씀을 수호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시니 그들은 비웃었습니다. 즉 화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가장 우선시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즉 우선순위의 문제인 것이죠.
신관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유일신론과 다신론이 있습니다. 신이 하나냐 아니면 다양하냐겠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이는 바리새인들이 보인 종교성은 "택일신론"이었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재물을 신으로 만들었고 그래서 하나님과 재물 중에 재물을 먼저 택해서 섬겼다고 예수님은 경고하시는 겁니다. 
14절에 비웃다라는 동사는 원어로 "코를 높이 들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가르침 앞에서 코를 높이 들면서 얕잡아 본 것이지요. 왜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율법이 규정한 자선행위를 하고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히 사람들에게 인지도를 얻고 있었으며, 그것을 자신들의 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 어느정도 헌금을 하면 교인이 되고, 꾸준한 헌금으로 다른 교인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교인이기에 구원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재물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고 단정지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너희 마음을 하나님이 아신다. 너희 자선행위로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것을 하나님은 미워하신다."라고 바리새인 신앙을 해석하십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택일신론자들, 돈을 좋아하여 돈으로 스스로 옳다는 구원도식을 만드는 자들. 그들은 말씀을 수호하는 말씀을 가졌던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재물의 유혹에 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더 적극적으로 이런 자들의 인생을 메타버스로, 숲으로 보게끔 해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입니다. 그 비유에서 부자는 거지 나사로를 돕지 않고 매일 파티를 열며 현재의 삶과 자신의 감정과 선택에만 집중하다가 지옥불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족에게 이 사실을 전하게끔 기회를 한번 달라고 했을 때 어떤 메시지가 전해집니까? 

"31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여기서 모세와 선지자라 함은 구약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준다 하여도 마음이 닫혀있고 들을 귀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현세의 부귀영화로 갇혀있는 자는 복음을 전혀 들을 수 없다는 겁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서 말해준다고 해도 못들을 사람이라고까지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말씀을 자기에게 맞춰가며 옳다 여기며 재물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은 이 부자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물질로 나의 미래를 준비하려고 하는 자는 스스로 옳다 여기며, 자신의 방향을 재물로 준비하려는 자는 결코 복음을 들을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하자면 그들은 현실에 눈이 가려 미래를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복음의 권함, 예수 그리스도의 권함, 하나님의 섭리의 권함, 성령 하나님의 내주의 권함을 결코 못듣는다는 것입니다. 숲을 볼 수 없습니다. 자신 앞에 있는 나무만 봅니다. 그 시야가 물질로 가득차 있기에 믿음의 시야는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을 향해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여러분, 아직 십자가가 여러분 심령 가운데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까? 예수님의 구속과 대속이 여러분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심령을 보십시오. 여러분을 눈을 보셔야 합니다. 나의 심령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의 눈에는 무엇이 껴있는가? 혹시 물질이십니까? 물질만능주의이십니까? 지금 내 삶에 환경이 바뀌는 문제가 영혼의 문제보다 먼저 이십니까? 그럼 들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권해도 들을 수 없기에, 듣지 못하는 자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2) 물질로 채우는 현재와 미래

얼마 전에 결혼율에 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30대 남성 중 50%가 미혼이었습니다. 그리고 30대 여성중 33%가 미혼이었습니다. 결혼적령기가 예전에는 신체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결혼해서 아이 낳기에 적당한 때가 언제인지를 먼저 생각했기 때문에, 직장자리를 잡지 못했어도, 연봉이 높지 않아도, 집이 마련이 되어있지 않아도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결혼적령기의 기준은 신체나이가 아니라 경제적 환경이 되었습니다. 가정을 꾸려 아이를 키우는 것보다는 쾌적한 행복도가 우선이 되었기 때문이죠. 재물과 환경이 우선이 되다 못해 이제 인간의 가장 본능 중의 본능인 가정을 꾸리는 일에 대해서도 물질은 우리 삶 깊숙이 파고들어왔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청년들을 비판하고 탓하기 보다, 우리 모두 재물이라는 기준이 우리 심령과 사회, 교회 안에 어디까지 파고들어왔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재물은 재물로 연결되어지기 마련입니다. 결코 재물로 시작한 것이 다른 건강한 것을 낳지 못합니다. 재물은 수단이지 결코 시작이나 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가장 직면하기 싫어하는 부분이야말로 바로 하나님과 재물과의 관계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생활에 직접적으로 관여되어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재물로 우리는 스스로를 높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인생을 합리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은 하나님이 높이시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에 있습니다. 재물은 하나님이 높이셔서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선물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처음과 나중은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는 중간수단으로 재물이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역으로 물질이 먼저 주어졌을 때 그것은 사탕이 가득 찬 병을 들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을 겁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상가 노암 촘스키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이렇게 평했습니다. "기업가들은 순간적으로 유행하는 소비재와 같은 천박한 것에 집착하는 인생관을 노동자들에게 심어주면서 장시간 노동을 기꺼이 수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타인에 대한 연민, 타인과의 연대 등과 같은 생각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요컨대 인간의 가치를 완전히 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공장의 나사, 건물의 벽돌로 보는 가치관인 자본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더욱이 현대에는 금융자본주의로 변모하여 금융기관을 거쳐 소시민은 대출이라는 늪 속에서 허우적대며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람은 대출금의 이자를 내주는 창구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세계투자보고서라는 것이 있는데 1차 세계대전때로부터 지금까지 부동산, 주식, 펀드, 금, 국채 등을 조사하여 수익률을 살펴보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수익률이 7%를 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투자는 일확천금을 이루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주변현실을 볼 까요? 몇몇 투자를 통해서 큰 돈을 많이 만져보았다는 뉴스나 기사를 봅니다. 그러면서도 내 주위에는 잘못 투자하여 잃은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이렇게 7%는 맞춰져 가는 것이겠죠. 300만원을 벌면 20여만원을 더 벌게 해주는 투자금이 나의 시작과 끝이 된다면, 그럼 나의 인생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재물로 얻어진 나의 인생지위가 있다면 그것은 언제까지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해주십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즉 제멋대로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며 스스로 합리화 한다는 것이지요. 자기최면을 거는 것이죠. 특히 하나님은 이혼을 결코 허용하시지 않으셨는데, 그들은 모세가 인간사에서 어쩔 수 없는 변수가 생겼을 때 이혼증서를 허용한 것을 자신의 입맛에 맞춰 마음대로 고대사회에서 가장 약자인 여성을 이용하려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즉 모든 것을 물질로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도, 약한 사람도, 재정도 제대로 쓰지 못한채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으면서도 내세는 보지 않고 현실과 물질로만 살려고 말씀까지 변경하고자 하기에,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겁니다. 단지 재물을 손에 쥐고 있는 현재만 있을 뿐입니다. 

 

3) 불의한 청지기처럼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점에서 두 비유 사이에 엄청난 전환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16절입니다. "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천국을 경험하기 시작하며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커져간다고 말씀해주십니다. 이것은 인류사에 있어서 영적 전환점이라는 중대한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이제 "미래"에 대해서 더 분명한 그림을 가지고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의 오심은 하나님 나라의 다가옴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은 가졌지만 재물을 주인으로 섬겼던 바리새인들에게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들어주시면서 올바른 방향에 대해서 말씀하고자 하십니다.

주인의 재정을 잘 관리하지 않아 짤릴 위기에 있었던 종은 주인의 재정을 통해 환심을 사려 합니다. 예수님은 이 종의 의도나 목적은 불순했지만 분명한 것은 "지혜로왔다"고 평가하십니다. 즉 재물에 현혹되고 빠져있어서는 안되고, 미래에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될런지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고자 하심이었습니다. 8-9절입니다.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불성실하게 근무했던 종은 자신이 해고위기에 처했다는 미래의 일을 인식하자마자 바로 조치하기 위해 움직였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몫을 미래에 투자한 것이다. 이를 안 주인은 그를 칭찬했다. 예수는 이 주인의 평가에 동의하면서, 빛의 아들들 그러니까 신자들도 미래에 대해 준비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그 다음 구절들을 통해 더 확실해진다. 9절은 돈을 관대하게 사용할 것, 10-12절은 청지기 직분을 신실하게 감당할 것, 13절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길 것을 말씀하신다. 즉 신자는 현재 가진 재정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지키는 청지기로서 잘 사용함으로써 미래를 올바르게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성실한 청지기는 곧 구원을 얻는 신자를 말한다. 신자는 언젠가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해고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있어서 많은 이들이 의인으로 살지 못했고 이 평가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이 청지기 처럼 삶을 맡은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평가받을 때 옳다고 인정받을 수 없다. 그렇기에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삶에 대한 죽음(해고)을 피해갈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신자는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한다. 죽음 뒤에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 청지기는 남은 자기 직분에서 행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한다. 그래서 그 다음 삶을 준비하고자 한다. 자신의 몫을 포기해서라도 미래를 준비하고자 했다. 물론 주인의 것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인의 청지기라는 직분 안에서만 행동하고 또 얻을 수 있는 유익이었다. 마치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죄사함을 얻어 불의한 자에서 의로운 자가 되어 미래에 대해 보장받듯이 말이다. 그렇게 청지기는 주인이 준 직분의 마지막 순간을 잘 사용함으로써 미래를 준비했고, 주인은 이에 대해서 칭찬한다. 신자는 구원받은 삶 이후에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청지기직과 재정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이다. 그리고 그 삶은 죽음 이후의 내세에 대한 삶을 보장해줄 것이다. 이와 상반되는 것이 바로 바리새인으로 표현되는 거지 나사로를 홀대했던 부자였습니다. 그는 현재 재물로 살아가다가 결국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미래를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미래를 준비하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불의의 재물이 주된 관심사가 아니라 미래가 불안한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주인은 칭찬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대의 아들들, 그러니까 복음을 알지 못하고 현실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살아가는 이들이 이제 앞으로 올 복음을 아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미래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복음을 가지고 더 주도면밀하게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이미 법령이 선언되었고 선포되었습니다. 이 세상이 흘러가는 원리가 바뀌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성령 하나님이 친히 각 인간에게 내주하십니다. 인간은 죽어서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받아들일 사람만 받아들이는 전파력이 아닙니다. 침입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전파되었고,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은 이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그래서 두 주인을 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재물을 미워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재물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재물을 그만큼 미워하게 됩니다. 절제하게 됩니다. 하나님만큼 사랑하지 않으려고 절제하게 된다는 겁니다. 

제가 서두에 메타버스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메타버스로 말씀해주셨습니다. 인생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시야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여서 만드셨다는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차 미래에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를 십자가 구속으로 성령 하나님과 함께 살아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순종하는 자에 대해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10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11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것이죠. 큰 것을 맡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현실에서 주어지는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라는 겁니다. 인생 전체를 조망하면서, 우주 전체를 하나님이 구속사로 어떻게 이끌어가시는지 바라보면서, 지금 내가 가진 재정을 어떤 경제관에서 사용해야 할지 생각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11-12절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11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이 세상에서 재정을 지혜롭게, 미래를 관망하면서 쓰지 못하면 저 천국에서 어떻게 너희에게 참된 것,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너희에게 맡길 수 있겠냐는 겁니다. 두 번째로 12절입니다. 

12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이번에는 돈을 넘어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인생을 이렇게 지혜롭게 살아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천국에 가서 하나님이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겠냐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인생이라는 시간과 재정이라는 알맹이를 "신자답게" 사용하라는 것이죠. 그럴 때 우리가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때 하나님께 충성된 자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메타버스로 알 수 있는 우리의 인생입니다. "10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4) 성령 하나님으로 사는 용서의 과거, 확신의 미래, 그것을 살아내는 현재 

다시 우리 사도신경으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령을 믿사오며... 성령 하나님과 사는 삶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내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나의 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해결되었습니다. 이제 옛 죄된 자아는 죽습니다. 이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것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삶이 가능한 것은 미래에 있을 구원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을 통해서 잘되고 싶은 인생 아니겠습니까?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겠지요. 그런데 이것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이미 우리의 인생이 성공한 인생이라고 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이해하고 있으면서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가 없습니다. 가장 좋은 성공을 했는데, 어떻게 아직도 성공하고 싶다고 말하겠습니까? 꽃등심 소고기를 먹고 있고 또 앞으로 계속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정육내장부속을 먹으려 들지 않습니다. 복음을 이해하고 있다면 세상의 성공에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일용할 양식"이라는 경제관념을 심어줍니다. 

이 표현을 여러분이 가장 많이 듣는 곳은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눈다면 후반부 우리의 요청인데, 가장 첫번째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또 주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물질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일용할 만큼만 거둬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일해야 할까요? 어디까지가 적정한 벌이일까요? 어디까지 연봉이 올라야 성공한 것일까요? 재물이 우리의 시작과 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럼 관점을 바꿔봅시다. 우리는 24시간밖에 없습니다. 육체적으로 8시간은 수면을 위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노동의 8시간도 우리는 사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 남은 8시간은 무엇을 하는 시간일까요? 저는 이 시간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유명인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하루에 8시간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면 성공한 인생이 아니다." 군대에는 자기정비시간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 총을 닦고 샤워를 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수양록도 적습니다. 이렇게 수면시간과 노동시간을 뺀 나머지 8시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나에게 가장 유익한 방향은 어디인지, 내가 나아가야 할 목적지는 어디인지, 어떻게 내 인생의 숲을 메타버스로 봐야 하는지 돌아볼 수 있는 자기정비시간이어야 합니다. 이 시간 속에서 성령 하나님은 우리 인생길의 방향과 걸음걸이를 알려주실 것입니다. 전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0돈 좋아하는 사람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벌어도 만족하지 못하니, 돈을 많이 버는 것도 헛되다.11재산이 많아지면 돈 쓰는 사람도 많아진다. 많은 재산도 임자에게는 다만 눈요기에 지나지 않으니, 무슨 소용이 있는가?12적게 먹든지 많이 먹든지, 막일을 하는 사람은 잠을 달게 자지만, 배가 부른 부자는 잠을 편히 못잔다......19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와 재산을 주셔서 누리게 하시며, 정해진 몫을 받게 하시며, 수고함으로써 즐거워하게 하신 것이니, 이 모두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다.(전5)

그래서 우리는 자족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게 주신 환경과 삶의 주변이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고 나에게 꼭 맞는 것들을 허락해주심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물론 경제적 어려움과 역경들이 있고 우리가 그것을 돌파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을 믿으며 우리는 지금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자족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이 높이시든 낮추시든 하나님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이 도우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버려졌다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인생이 망해 세상에 버림받은 인생이어도 하나님이 도우시면 천국 아브라함 믿음의 자손이 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살고자 했던 부자, 권함을 받지 않았던 부자, 돈을 좋아했던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던 부자는 스스로의 소리에 갇혀 지옥불에 뛰어들게 됩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3. 결론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한국 드라마 ‘오징어게임’에서 1번 참가자 오일남을 연기한 배우 오영수가 치킨 프랜차이즈 브랜드 ‘깐부치킨’으로부터 광고모델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오영수씨는 광고모델 제안에 혹시라도 연기자 본인이 광고 내에서 작품 속 단어를 직접 언급함으로써 작품 내에서 연기한 장면의 의미가 흐려지지 않을까 우려되어 해당 브랜드의 광고 모델 제의를 여러 차례에 걸쳐 정중히 고사했다고 합니다. 자신이라는 나무보다 숲을 볼 줄 아는 눈은 당장 앞에 있는 이익보다 더 큰 것을 보게 하는듯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다. 이해하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얼마나 이해하고 사랑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이 복음으로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아시고 이해하셔야 여러분의 인생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또 행복하게 살아내실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라는 큰 숲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 내 앞에 있는 오늘이라는 나무만 보지 마시고, 지금 당장 벌어내야 하는 또 더 높여야 하는 내 연봉, 내 재물, 내 집, 내 환경에 매몰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번 한주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꼭 내셔서 나의 인생의 방향을 재물이 아닌 하나님께 맞추어 나 스스로 인생을 성공시키려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것들에 감사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이 이끌어가실 내 인생임을 고백하시며, 태초로부터 계획된 내 인생, 그래서 마지막에도 성취하실 내 인생, 그래서 지금도 놀라운 섭리로 내 인생을 이끌고 가고 계시는 성령 하나님과 함께 복음으로 살아내시길 소망합니다. 그 분이 이끌어가시는 내 심령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며 미래를 준비하시는 저와 여러분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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