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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YAMEMORY
주제설교_F/주일설교

합 2:1-4

by 우루사야 2021. 10. 23.

제목. 약속으로 풀어내시는 하나님
본문. 합2:1-4

 

1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2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1. 서론
1) 들어가기 
우리는 계속해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의 순서에 따라 사도신경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2주간 성령을 믿으며 사는 삶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주에는 성령과 함께 미래를 바라보는 삶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할 것을, 그래서 재물을 신으로 섬길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과 함께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투자하여 미래에 주실 영원한 삶과 육신의 부활을 얻어낼 것을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 그것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함께 고백하는 신앙고백은 우리에게 놀라운 삶의 해결점을 제공해줍니다. 특히 이해할 수 없는 시간에 우리에게 버틸 수 있는 힘, 그리고 결국에는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줍니다. 


2) 예화 
제가 한살 한살 나이를 먹을 때마다 가장 많이 저 자신을 두고 느끼는 것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몰랐구나" 입니다. 무언가 열정만으로 가능할 것 같았지만, 실상 성도의 삶을 알면 알 수록 그리고 인간의 삶을 이해하면 이해할 수록 단순한 문제가 아니며 이것을 간단하게 말하는 것이야말로 뭣 모르는 무지를 자랑하는 꼴 밖에 안된다는 것을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걸 많이 느낍니다. 

요즘 계속 화제가 되고 있는 오징어게임. 거기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등장했던 오일남 역을 연기한 오영수 배우입니다. 많이들 회자가 된 것처럼 작품 이미지에 훼손이 될까바 거액의 CF도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일거수 일투족을 조심하면서, 작품과 동료배우들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면 괜히 어른이 아니시구나, 오히려 어떤 기자는 "연륜의 숭고함"이 느껴진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물론 CF를 찍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오영수 배우의 입장에서 거액보다 작품과 동료를 생각하게 하는 지혜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에 대해서 고민해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영수 배우가 종교가 무엇이고 신념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 배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신, 신념, 주장, 평소의 생각이 있었을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어떤 믿음이 있느냐에 따라 그 행동이 결정되어지는 것이지요. 어떤 믿음이 있느냐에 따라 제각각의 지혜가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겁니다. 믿음이 있으면 여유와 여지가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여유와 여지 속에서 지혜가 나타나고 인생을 선한 길로 인도하게 하는 듯 합니다. 그럼 우리의 믿음은 우리에게 여유와 여지를 주나요? 우리에게 지혜로운 길을 걷게 합니까?

 

3) 주제 
사도신경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이 믿음에 대한 고백은 우리에게 어떤 지혜를 줍니까? 어떤 유익을 주기에 우리는 매주일 예배를 드리며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다 함께 고백하는 것일까요? 이 믿음에 대해서 우리가 누려야 하는 지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가장 힘든 때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질문이 들 때인 것 같습니다. 도저히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환경이 펼쳐졌을 때, 내 생각으로는 이 시간과 공간을 살아내기 너무나도 힘들 때인듯 합니다. 이 때 발동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그 때 버팀목이 되어주어 나로 하여금 일상을 계속 지속하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이는 썩은 나무를 믿고 의지하여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먼 곧장 넘어지기도 하고, 어떤 이는 거목을 의지하여 계속 이해가되지 않는 폭풍같은 삶을 살면서도 이겨내기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라는 거목을 믿고 의지했을 때 우리의 삶의 여유와 여지가 생기게 되고, 그 속에서 우리에게 지혜가 나타나 우리의 인생을 선한 길로 인도해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특히나 이해가 되지 않을 때, 도저히 내 상식으로는 풀어낼 수 없는 역경과 고난이 왔을 때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해줍니다. 사도신경은 그런 점에서 고백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거목에 대한 고백입니다. 예배의 순서로 낭독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의 고백, 나에게 여유와 여지, 그래서 지혜"를 주는 것이라 말하는 겁니다. 

4) 본론잇기
오늘 우리는 하박국서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박국서는 질문을 던지는 하박국과 이에 대해서 답해주시는 하나님의 2번의 대화체가 유명한 책입니다. 그 질문 속에서 보이는 하박국은 하나님도 이해가 안되고 또 이 세상의 부도덕함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시고 지켜보고 계시고 마침내 정리하실 것이라고 대답해주십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하박국 너 자신의 문제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박국 너 자신이 준비가 되야 "이해하지 못할 인생을 살아낼 수 있다"고 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하나님을 떠나 내 생각, 내 경험, 내 판단으로 살아내기 일쑤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믿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더 잘 믿고, 그래서 더 주시는 지혜로 인생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명확하게 믿고, 그 믿음이 여러분에게 직접적으로 주는 힘을 통해서 이번 한주도,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일찌라도 힘차게 그리고 승리하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스스로 정직하지 못한 교만 : 하박국의 심정
하박국의 이해반경 안에서 유다가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는 불평불만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가장 악하고 잔인하기로 유명한 바벨론 나라를 통해서 유다를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모순아니겠습니까? 더 성적 좋은 사람이 성적 낮은 사람을 가르칠 수 있고, 전문가가 비전문가에게 조언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벨론은 유다를 향해서 영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유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 하박국의 입장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13주의 눈은 너무 정결하셔서 악을 보지 못하시며 비행을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거짓되게 행하는 자를 보고만 계십니까?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자를 삼키는데 주는 어째서 침묵만 지키고 계십니까? 
14어째서 주는 사람을 바다의 고기나, 다스리는 자가 없는 곤충처럼 대하십니까?"(1장, 현대인의성경)

하박국은 여기서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자를 삼키는데 주는 어째서 침묵만 지키고 계시냐"며, 하나님의 방법은 모순되었고 틀렸고 이해될 수 없는 방법이라고 해석을 보태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스리는 자 없는 곤충"처럼 유다를 내버려 두지 말라고까지 평가합니다. 그러니까 더 옳은 다른 방법을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참 오만한 생각이었습니다. 그 오만한 생각은 오만한 태도와 행동으로 나타나고야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답한 뒤에 하박국의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함께 읽은 2장 1절을 먼저 살펴보죠.

"1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어디 한번 뭐라 말씀하시는지 보자. 더 이상 나에게 반박하실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이제 나를 설득하시던지 아니면 문제를 해결하셔야 할 것이야라고 생각하는듯 보입니다. 그런 입장을 잘 말해주는 표현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라는 표현입니다. 이에 대해서 NIV는 "my watch, my station"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입장과 포지션에 변화를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는 완고한 입장을 말합니다. 

여러분, 언더스탠드의 어원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단어에 대해서 이렇게 풀어내신 분이 있었습니다. 중세 영주 앞에 선 기사는 무릎을 꿇고 듣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던지 말이죠. 즉 상대를 이해한다는 표현은, 위에서 내려다보며 어떻게 말하는지 내가 판단해보자라는 태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일단 받아들이고 이해해보고자 하는 태도로 듣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박국의 태도는 언더스탠드가 아니라 업스탠드였습니다. 그의 위치는 하나님보다 위에 있었지 결코 아래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어떤 응답을 주셔도 하박국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하나 던지게 됩니다. 어쩌다 하박국은 이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요? 신앙이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하나님의 선지자인 그는 어떻게 이런 입장까지 오게 된 것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잘못인가요? 본문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4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의인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반대에 있는 악인은 어떻다고 말씀하십니까? "그의 마음은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순수하지 못하고 중간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교만이라는 단어가 설명해줍니다. 교만은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을 말하죠.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서 이해하려는 언더스탠드가 아니라, 업스탠드가 되어 하나님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재단하려고 하니 관계가 이어질리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있어도 다 불평불만거리입니다.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단점만 보일 뿐입니다. 그렇게 꼬여버린 마음은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높이기만 하다가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망쳐버리는 것이죠. 하박국처럼 말이죠. 

하박국은 1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13절) 하박국은 자신의 민족 유다가 바벨론보다는 선하다는 스스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확신은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게끔 했습니다. 하박국은 유다가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악을 범하고 타락하며 나라가 패역으로 가득찼다는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라 말하며 합리화하는 확증편향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자신의 고집과 아집은 선과 악을 판단하시는 절대적이고 유일하신 하나님까지도 "이렇게 하시는 것이 옳으십니까"라고 따지는 교만한자가 되게끔 하였습니다. 이런 죄인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2) 모든 것은 내 손에 달렸다 : 무신론 또는 이신론
구글에서 이신론을 이미지로 검색하면 종종 보이는 것이 "시계"사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서 내버려두시고 개입하지 않는 것이 꼭 시계공이 많은 나사들이 서로 맞물려서 잘 굴러갈 수 있게 잘만든 시계를 만든 다음에 태엽만 감아놓고 쓴다고 많이들 비유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개입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설계해놓은 이 세상 순리대로 우리는 살아가고 때론 망치기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프랑스와 유럽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보다 사람의 합리적인 이성을 더 우위에 두고서 진리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이성에 불합리해 보이는 것들을 쳐내기 시작했던 운동입니다. 그 중에 신의 존재나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도 대상이 된 것이지요. 그 중에 신의 존재가 의심받기 시작한 것이죠.


그 결과 가장 철학적인 질문, "나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계몽주의는 "진화론"으로 답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우연의 산물로 생명세포가 나타났고, 이것이 우열의 법칙으로 점점 환경에 적응을 잘 해나아가는 존재로 진화하기 시작했다고 생각, 아니 믿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신의 존재를 믿지만 세상에 영향력이 없는 존재로 만들거나, 더 나아가 신의 존재 없이 인간이 스스로 진화하여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시대 근대의 사조였던 겁니다.
현대는 신의 존재를 말하는 것은 특정 종교 안에서만 다루게 되었으며, 모든 공교육에서는 진화론을 정설로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기독교 안에서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인간의 저작으로 보며 성경을 재단하고 제멋대로 해석하고 오용하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요? 이것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성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간은 "믿음"이 필수적입니다. 무언가를 믿어야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믿음의 존재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기 시작하여 때론 무를 믿음으로 불교의 환원이나 자연주의, 물질이나 재물이 차지하는 세속주의, 하나님을 믿지만 거리감이 있는 설계자로서의 하나님을 믿는 이신론, 신적존재 없이 자기 스스로가 신이 되는 무신론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인간이 지성이나 과학으로 또는 재물로 해석할 수 없는 문제가 등장할 때입니다. 그 때 인간은 무너지고 맙니다. 무언가 기준을 세워서 판단하고, 그 기준을 믿고 싶은데 그간 가져온 기준을 가지고 도저히 해석이 안되니 사람이 미치겠다는 것이죠. 죽겠다는 겁니다. 그 때 인간이 하게 되는 행동이 있습니다. 

이럴 때 인간은 도저히 해석이 안되니 하게 되는 판단이 본인이 스스로 그간 믿어왔던 것을 그대로 확장시켜 믿는 것이지요. 이것을 행동심리학에서 확증편향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것을 믿으려 하는데, 그 반대의 상황이 와도 오히려 자신의 믿음을 더 견고하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투자가 워렌 버핏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가장 잘하는 것은 모든 새로운 정보를 해석하여 이전의 결론이 그대로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된 본성은 아무리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것을 알려줘도, 내가 믿고 싶어 하는 것 또는 이전에 내가 믿어왔던 것 그대로의 것을 유지하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그게 편하니까요,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3) 하나님을 기다리는 겸손 : 묵시, 때, 종말을 바라보는 자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직도 우리 심령 속에서 나 자신이 세운 논리로 고집과 아집으로, 확증편향으로 가득 차 있는 나는 이제 도저히 가망이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그런 우리 인간에게 계속해서 두드리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권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신실하심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해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인생문제"를 "믿음"을 가지고 살아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놀라운 하나님의 신비와 섭리로 풀어내게 됩니다. 2-3절입니다. 

2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하박국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판에 명백히 새기라"는 것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확실성을 말하고자 하심이며,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말씀이라는 확장성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끔 하실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확인할 수 있는 예언의 말씀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유다와 패역한 바벨론 모두를 심판하시되, 유다는 바벨론에게 심판당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박국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왜 죄악을 두고 보시는가, 그리고 그것을 풀어내시는 방법이 왜 바벨론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죠. 

이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항상 일하신다는 성실하심과 약속과 예언은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시라는 신실하심"을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여지를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첫번째는 하박국 자기자신이 가지고 있는 확증편향, 쉬운 말로 편견과 고집을 버릴 수 있도록 말씀을 주십니다. 본문은 그것을 "판에 명백히 새긴 묵시"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하박국과 대화체로 말씀하셨다면, 이번에는 판에 새기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듣는 사람들도 그렇지만, 하박국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죠. 
인간이 자신이 우물안 개구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가장 좋고 쉬운 길은 타인의 생각을 듣는 것입니다. 그 타인의 생각이 가장 잘 정리되어 있어서 접근하기 쉬운 매체가 바로 "글 또는 책"입니다. 나의 생각과 다른 생각, 나의 의견과 다른 의견. 그것을 글로 받아들일 때 사람은 가장 정중하고 편하게 나와 다른 것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하박국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두 번째는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즉 하박국에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허락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박국처럼 나에게도 말씀과 시간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종말이라는 사건입니다. 분명한 끝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함을 볼 수 있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건사고, 일상 다반사에 대해서 마침내 정리할 수 있는 종말이라는 사건이 있을 것임을 하박국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종말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 주에 이야기를 나눈 불성실한 종도 그렇게 평가가 바뀔 수 있었던 것이 무엇때문입니까? 끝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끝에 대한 인식은 사람의 태도를 변하게 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살지 못합니다. 반드시 이 세상을 정리할 때가 옵니다. 그 마지막 사건을  기다리며,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하박국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4) 내가 알 수 있는 것과 알지 못할 것이 있다

이제 정리를 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위기가 오거나 내 생각이 멈출정도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 닥칠 때 내가 믿는 것을 가장 먼저 내세우거나 그것을 끝까지 붙잡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위기에서 내가 믿는 신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린 일상과 평시에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가까이 다가서려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내가 이해할 수 있고 또 판단할 수 있는 인생의 순간이 있는가 반면,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또 해결할 수 없는 순간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모자람과 부족함을 인정하지 못하면 우리는 스스로 답을 정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고, 그 결정들이 어쩌다가 옳을 수는 있지만 대부분이 일을 망치고 그릇되게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본문 4절에 악인은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솎이며 합리화하려고 하지 말고, 성령 하나님을 믿으며 내 양심에 있는 것들을 꺼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은 우리를 스스로 낮추게 함으로써 직면하게끔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꺼낸 그 문제, 내가 직면하게 된 그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해결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직면한 그 문제 속속들이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것을 알고 계셨고, 그럼에도 우리를 이해하고 계셨고, 그런 내가 그 죄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대표로서 이미 그 문제와 죄를 해결하셨음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롭게 태어나시어 인류의 죄를 다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삼일만에 부활하시어 우리가 거할 처소를 준비하러 가셨음을 믿고 나의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내가 태어나고 살아가다 죽는 그날 까지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셨고 또 준비하셨으며, 지금도 그 손길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신론은 창조설계를 해놓고 알아서 굴러가게끔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첫째 지금 내마음과 이 공간에 계십니다. 둘째 태초전부터 죽음 이후까지도 함께 계십니다. 셋째 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부활 이후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어 우리와 함께 하게끔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설계자가 아니라 개입하시고 함께 하시고 관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삶이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문제와 역경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라도 살아지게끔 합니다. 그 하나님이 더 크시고 더 먼저 계셨으며 더 강력하시기에 살아지게끔 합니다. 

 

3. 결론
제가 최근에 읽은 책 중에 가장 감명 깊었던 책이 있습니다. "상실"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울다"라는 책을 쓴 제럴드 싯쳐 교수의 책입니다. 신자로서 교통사고로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셋째 딸을 잃은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우리 능력으로 통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공평한 삶을 기대한다. 그래서 우리는 상실을 겪을 때, 정의를 부르짖고 상황이 그런식으로 이루어지는데 분개한다. 그래서 우리는 왜 나에게?라고 되묻는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다시 묻게 된다. 왜 나는 아닌가? 사고 이후 3년 간 배운 것이 있다면,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필요로 하고 또 갈망한다는 점이다. 사고가 나기 훨씬 전부터 나는 크리스쳔으로 살아왔지만, 그 날 사고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살아 계신 실체로 다가오셨다. 상실로 인한 고통은 여전히 느끼고 있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너그럽다." 하나님이 마음에 계신 신자는 왜 나인가라는 질문에서 왜 나는 아닌가라는 반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공정함이 이뤄지지 않음에 분개하기보다, 모든 이에게 은혜를 허락하시는 공평한 삶이 더 멋지고 감사한 삶임을 깨닫는 여유와 여지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무엇을 믿으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오늘도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역경과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우리의 약함과 죄인됨을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섭리로 가장 적당한 때에 우리가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일을 이뤄내시고 성취하실 줄 믿습니다. 어느샌가 엉킨 실타래를 풀어놓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고 고대하며 그 분을 믿으며 지혜롭게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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