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AYAMEMORY
주제설교_F/절기설교

막 15:33-41_고난주간 토요일

by 우루사야 2024. 3. 29.

고난주간 토요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죽게 되십니다. 우리는 신화나 영웅서사를 통해서 주인공의 죽음을 많은 이들이 어떻게 미화시키는지 알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죽음을 통해서 어떤 동기부여를 받기도 하고 감동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우울하고, 비참하고, 통탄하기까지 합니다. 예수를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도 되는지 의심되기까지 하지만 4개의 복음서 모두 예수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우울한 이야기로 전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시죠. 먼저 33-36절입니다. 

33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34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35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36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6시는 정오를 뜻합니다. 해가 가장 밝게 비출 때에 온 땅에 어둠이 임합니다. 먹구름일 수도 있고, 개기일식이나 월식일 수도 있겠습니다. 무엇이던간에 예수의 죽음과 함께 이 어둠이 임하는데, 그 시간이 잠깐이 아닙니다. 제 9시. 오후3시까지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 어둠의 의미에 대해서 예수의 발언이 힌트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셨다고 예수는 외쳤습니다. 마치 고아원에 아이를 두고 떠나는 부모의 모습을 그리는 장면처럼, 비참하고 우울한 음악과 분위기가 어울리는 장면입니다. 예수는 채찍질과 십자가에 달려 탈진한 육신을 가지고서도 이것을 크게 외쳤던 겁니다. 자신을 떠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듯이 말이죠. 

예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는 온전한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픔과 갈등, 고통을 모두 받으셨습니다.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버리심에 대해서 아파했습니다. 아니 어떻게보면 예수의 생애 중에서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신 적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부르짖으셨습니다. 이렇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인류의 복음을 위해 위대한 결단과 순종의 시간을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그 아래서 이 위대한 계시를 가장 먼저 받았다는 유대인은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습니까? 구약에서 죽음 없이 승천했던 엘리야를 향해 말라기 선지자는 다시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고, 특히 불마와 불병거를 타고 올라간만큼 웅장한 모습으로 다시 올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엘리 엘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짖는 소리를 "엘리야, 엘리야"라고 부르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죠. 아둔해도 이렇게 아둔한 것이 유대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가 빨리 죽어서 엘리야가 못 올 수도 있으니, 포도주라도 먹여 수명의 시간을 좀 더 늘리게끔 하려고까지 합니다. 결국 예수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셨습니다. 37-41절입니다. 

37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39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40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41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

결국 예수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기적, 자신이 원하는 표적을 요구하지만 성부와 성자는 당신의 인류를 향한 구원계획을 이끌어가십니다. 마침내 예수가 죽게 되니 첫번째고 가장 거룩한 공간인 "성소"의 커텐이 찢어집니다. 예수의 몸이 찢어짐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벽, 거룩의 확장이 펼쳐집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영적원리에 대해 누누히 선지자들로부터 또 언약과 말씀으로부터 받았지만 자신의 교만과 아집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곁에 섰던 백부장은 단번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고민하게 됩니다. 신앙생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더 하면 할 수록 생겨나는 나의 경험이 나의 아집이 되어 이 유대인들과 같이 내 앞에 있는 예수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던 백부장이 되는 것이 맞는 것 아닌가? 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나의 것을 축적하고 나의 경험을 모으는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더 겸손해지고 더 죄인임을 고백하며 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