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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_G/칼럼

책임과 동정

by 우루사야 2023. 12. 4.

어떤 부류의 사람이든 이해못 할 길이 없는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대중으로부터 지탄받습니다. "책임감을 다하지 않음에 따라 타인에게 피해나 상해를 입혔을 경우"가 가장 큰 비난을 받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위법적인 조치라는 논쟁이 지금까지도 있는 유승준 입국금지나 MC몽 군복무회피 의심사건 등이 있는듯 합니다. 이건들은 오래전이라면 요즘은 캣맘에 대한 이슈가 많은듯 합니다. 우리나라 반려동물에 대한 시민의식은 높아져 동물학대금지법안뿐만 아니라 논쟁이 있지만 개식용을 금지하는 법안발의까지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캣맘에 대한 시선은 그리 곱지 않을뿐 아니라 점점 더 악화되는듯 합니다. 길고양이를 돌봄으로써 반려동물과의 유대적 감정이라는 본인의 욕구는 채우면서도, 정작 자신이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책임은 회피해버리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런 현상이 전국적으로 또 공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캣맘이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듯합니다. 반려동물에 대한 시민의식은 높아졌지만, 캣맘에 대해서는 비판여론이 강한 아이러니한 상황은 아마도 "책임감"때문일 것이라고 말해도 무방하겠죠.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를 보면 이례적으로 한 부류를 직설적으로 지탄합니다. 경건한 흉내는 내지만 정작 실체(능력)는 없는 자들과 멀리할 것을 말하면서 도중에 유혹받는 아녀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평가합니다. "항상 배우기는 하나 결코 진리의 지식에 다다를 수 없는 자들"이라고 말이죠.(딤후3:7)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세속적으로 타락한 목사야말로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그 목사 휘하에서 휘둘리는 여집사들까지 이렇게 욕해도 되는가 의문점이 남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여인들을 향해서 "악한 욕심에 빠져 죄에 빠져 있는 상태"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즉 분별력이 없음으로 인해 속아넘어가는 자들에게도 바울은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죠. 신자라고 해서 빠져나갈 길은 없습니다. 믿음생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서 자신이 누리고 싶은 유익만 얻으려 하는 것은 지탄받기에 합당합니다. 
 



그렇다면 고대사회에서 왕이라면, 책임이 막중하다 못해 다른 이의 생명까지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라면 어떨까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겠죠. 성경은 한 왕에게 굉장히 분노하는 선지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열왕기하 13장에서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임종 직전의 엘리사에게로부터 화살예언을 받게 됩니다. 화살을 동편으로 쏘라는 지시를 통해 시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로 엘리사가 화살로 바닥을 내려치라는 지시에 요아스는 성의없는 태도로 임하게 됩니다. 이에 엘리사는 굉장히 분노하며 요아스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죠. "왕은 대여섯 번을 쳤어야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왕은 시리아를 완전히 정복할 수 있을 텐데 왕이 세 번밖에 치지 않았으므로 그들을 세 번만 무찌를 것입니다."(왕하13:19) 이는 요아스의 노력여하에 따라 하나님이 움직이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승리의 약속을 주심에도 그것을 믿지 못하는 요아스에 대한 지탄이 담겨있는 것이지요. 여인의 위치에서나 왕의 위치에서나 믿음에 대한 당연한 반응으로 나타냈어야 하는 영적분별력이 없는 자들은 "항상 배우기는 하나 결코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는 성경의 경고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딤후3:7)

 

 

그래서인지 호세아의 외침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힘써 여호와를 알자...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찢으셨으나 우리를 낫게 하실 것이며, 치셨으나 우리를 싸매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사흘 만에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니,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살 것이다."(호6:1-3) 호세아는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칩니다. 그 분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말이죠. 이것이 책임감 있는 신앙인의 모습, 하나님과 관계한다고 말하는 이의 합당한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에 대한 어떤 것을 알아야 할까요? 

그래서 호세아는 중간에 의미심장한 표현들을 제공해줍니다. '여호와께서 상처를 주셨으나 회복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 하나와 이틀 후 살리고 사흘 후 일으키신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지 않고자 함으로써 떠나실 것입니다. 빛이 떠나면 자연스레 어두워지듯, 생명과 보호의 하나님이 떠나니 이스라엘은 자연스레 침략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프겠지만, 하나님은 그 다음 회복할 수 있는 길까지도 마련하시면서 그들에게서 떠나가셨던 것이죠. 그들을 떠나면 그들이 아프겠지만, 돌아올 때 낫게 하실 것이고 싸매어 치료해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알라고 호세아는 외쳤던 겁니다. 그리고 그 회복의 속도는 엄청납니다. 2-3일만에 온전해질 것입니다. 어디서 많이 본 표현이네요. 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단순한 상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단절과 인간속성의 깊은 곳에서부터의 타락을 말합니다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게 하니, 이는 음란의 영이 그들 속에 있으며, 그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호 5:4) 그럼에도 하나님은 어마어마한 타락으로부터의 회복까지 준비하셨던 것이죠. 예수가 죄를 감당해주시고, 예수를 성령의 능력으로 회복케 하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이 때부터 선언되고 있었던 겁니다. 네, 북이스라엘은 우상숭배로부터 돌아와야 했고, 돌아오는 길은 자신의 노력이나 책임감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해야 한다는 내적책임, 즉 마음으로부터의 믿음이라는 “회귀”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회귀의 길은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충분히 마련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궁극의 책임감은 하나님사랑의 수준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요아스 왕이 지탄을 받는 그 상황도 좀 더 자세히 보면 비판만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자 그의 간구를 들어주셨으니, 이는 아람 왕이 그들을 학대하므로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을 돌아보셨기 때문이다...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신 언약 때문에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보살피셨고, 그들을 멸망시키기를 기뻐하지 않으셨으며, 지금까지 자기 앞에서 쫓아내지 않으셨다." (왕하 13:4,23) 과연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성경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향해서 자기를 계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마음을 연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께로부터 회복과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타락이 아무리 심각하다 할찌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과 인자하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그누구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할 자가 없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다시 일으키신 하나님의 책임있는 능력이 이미 선행되어짐은 그 증거로써 충분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호세아를 통해 이미 계획해놓았던 것임을 드러내셨음도 우리가 믿기에 충분한 근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에 있어서 책임의 공은 우리에게로 넘어와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두팔 벌려 기다리고 계시고, 그 팔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을 멀리하려는 인간일 뿐입니다. 
 

프라고나르,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고 있는 여로보암’, 1752년, 아카데미 데 보자르, 파리, 프랑스


연애에 대해서 가장 많이 비판받는 유형 두가지를 꼽으라면 아마도 어장관리와 환승연애일 겁니다. 아마도 대부분이 책임감 없이 이성에 대한 감정나눔에 대한 비판일 겁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는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도외시 하는 신과의 관계에 대한 현대인의 뻔뻔함은 도저히ㅜ변명의 여지가 없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아래와 같은 영상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출산, 육아, 이혼, 동거, 전남편 등. 아메리칸 스타일이라고 넘겨버리기에는 많이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 많더군요. 자신의 감정보다는 타인의 감정을 더 우선시하려는 세명의 성인남녀. 그리고 짧은 시간에 이뤄지는 그들의 대화, 제스쳐, 스킨십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하더군요. 물론 이혼과 동거 등과 같은 비기독교적인 상황들이 있지만, 오히려 이것이 기독교인이 살아가는 현실이라는 점에서 좀 더 깊이 고민할 수 있게 하는 좋은 사례라 생각됩니다. 자신의 감정에 대한 책임감 없이 이성관계를 하려는 미혼성인, 반면 이혼동거 상황에서도 타인의 감정을 더 우선시 하려는 모습. 최소한 본인만큼은 후자에서 더 많은 기독교적 가치를 엿볼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아쉽게도 이후 이들의 결별 소식 속에서 아이들이 받게 될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수많은 회색지대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지킬 수 있는 책임감은 아마도 가장 손쉬운 표현. 즉 마음을 표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믿음으로 고백하는 기독교신앙"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부모봉양, 회사생활, 경제권, 정치참여, 작심삼일되어버린 운동결심과 금연, 자녀양육 등. 많은 영역에서 우리는 수없이 무너지고 책임감없는 회색지대에 선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출해버리고야 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결코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십니다.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안아주십니다. 그래서 우린 처음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내 양심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말이죠. 이것이 인생이라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최고의 책임감을 보여드리는 것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주님의 법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는 장애물이 없습니다." (시 119:165)


 

- 출처 - 

* 304일차 맥체인본문, 바른성경

* 이미지 : 뉴스앤조이, 한겨레, 다우리교회

* https://www.youtube.com/watch?v=ahnuKweuw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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