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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 설교_F/우리행전_사도행전

우리행전(9) 고난받을 줄 아는 신앙

by 우루사야 2023. 8. 27.

제목 : 고난받을 줄 아는 신앙
본문 : 행 12장 1-7절

1. 서론
1) 예화
메기효과를 아십니까? 과거 유럽어부들이 북해에서 잡은 청어를 멀리 보낼 때, 수조에 천적 메기를 함께 넣어 청어들이 수조 안에서 활발히 움직이게끔 하여 신선도를 유지키게 했다는 겁니다. 이런 효과는 국산가구업계에도 일어났는데, 이케아라는 대형 해외브랜드가 들어오니 국내 가구 브랜드가 다 죽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오히려 경쟁력이 상승하고 매출이 크게 증가함으로써 메기효과를 한 번 더 증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과도한 스트레스는 열정을 꺾지만, 적당한 자극은 해이해지지 않게 하고 적극성을 높일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2) 주제
성경에서도 이러한 원리로 말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잠언은 자녀양육에서의 자극을 적극적으로 말합니다. "15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22) "17네 자식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잠29) "24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13) 그럼 자녀양육에만 말할까요? "12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3) 예수님의 수제자이자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대표였던 베드로는 말년에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19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벧전2) 우리의 인생이 해이해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 때로는 세상이 주는 시험이 반드시 있다고 말해줍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우리의 신앙을 활력있게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므로 받아들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네, 고난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고민하고 기도하며 간구할 때 우리에게 풍성한 유익이 있음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3) 본론잇기
그런 점에서 예루살렘교회도 자극을 당합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엄청난 고난을 당합니다. 예수 이후에 생긴 첫 교회인데, 이 교회가 잘 되어야 후속교회들이 더 든든히 세워지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고난을 계속 주십니다. 과연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지, 이 고난들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어떻게 인도해가시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본론
1)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
1-3절입니다. "1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2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3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우리가 살펴왔던 것처럼 예루살렘교회는 말그대로 문 열자마자 엄청난 인기몰이로 부흥하던 교회였습니다. 당시 유대교는 이런 기독교인들을 시기질투하다 못해, 결국 무력으로 진압하려고까지 했습니다. 첫번째가 베드로를 투옥하는 것으로 2번이나 가뒀습니다. 두번째는 스데반 집사에게 돌을 들어 사형을 집행한 것이었습니다. 이 두가지 모두 유대교와의 사이에서 일어난 종교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종교밖에서 정치세력까지 가세해 기독교를 핍박하였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교회의 2인자 야고보를 당시 왕 헤롯이 사형시킨 것이죠.  기독교의 중심인물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예수, 야고보, 스데반이 죽었고, 이제는 베드로가 사형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것이 15년 안에 다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예루살렘은 당시 큰 흉년을 맞이하여 교회자체가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어 이방인 안디옥 교회를 의지해야하는 처지였습니다. 수만명에 달했던 조직이 뿔뿔히 흩어졌고, 리더급 사람들이 사형당하거나 투옥되었으며,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워진 상태입니다. 과연 예루살렘 교회에 하나님이 계신가 의문이 들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보려면 예수님때로부터 베드로까지 계속해서 기독교를 향해 핍박과 고난을 주는 가문, 오늘 본문에 등장한 헤롯가문을 보아야 합니다. 이들은 본래 유대인이 아님에도 정치적 탁월성때문에 로마로부터 권한을 받아 유대인들을 다스리는 총독역할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보니 로마눈치도 봐야 하고, 유대인들이 이방인 왕의 다스림을 무시하며 소동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유대인들의 눈치도 봐야하는, 매우 정치적인 입지가 좁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가문은 대대로 기독교인들을 희생제물로 삼아왔습니다. 첫번째 헤롯대왕은 새로운 왕이 태어날 것이라는 유대교 구약예언이 이뤄져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줄어들까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는 2살 이하 사내아이를 모두 죽였죠. 두번째로, 헤롯대왕아들 안티파스 또한 세례요한을 죽여 쟁반에 담아 선물로 딸에게 주었죠. 세번째로 헤롯대왕의 조카손자 아그립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그 또한 로마군과 유대교인들에게 정치적 입지를 세우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돌로 치는 유대인은 사형법이 있음에도 칼로 야고보 사형집행을 하면서도, 베드로사형집행은 유대인 절기를 지켜 그 후에 일정을 잡고자 하는 이중성을 누가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때로부터 베드로까지 계속 탄압하는 헤롯가문과 함께 한 부류가 있으니 바로 유대교입니다. 그들은 야고보 사형집행을 보고 율법대로 집행해야 한다고 따져야 했지만 시기로 가득했기에 오히려 헤롯을 연호했습니다. 추악한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고 무고한 예수를 사형시키라고 소요를 일으켰던 무지성 무리와 너무나 비슷해 보입니다. 헤롯가문과 유대인들 모두 자신의 욕망으로 가득해 하나님의 뜻도, 사랑과 정의도, 단순한 법과 절차도 모두 무시하고 모순된 태도로 교회를 핍박했던 것이죠.

그러니 예루살렘 교인들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힘들고 낙망될 수 밖에는 없는듯 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모순적 핍박이 너무나도 힘들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님의 임재, 사도들의 기적을 볼 때만 해도 참으로 가슴이 뜨거워지고, 이 교회에 충성을 다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와 자신으로 가득찼을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됮 않는 모순된 고난이 다가오니 참으로 사람 마음이 뒤바뀌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도 모순된 모습이 되어버립니다. 베드로가 잡혀 사형날이 가까워지니 기도하기에 힘씁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천사로 말미암아 풀려나 돌아와 문을 두드립니다. 베드로의 음성이 들립니다. 한 소녀가 베드로가 왔다고 말하니 무어라 말합니까? "15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행12) 이 얼마나 모순되어 있습니까? 베드로가 풀려나기를 기도합니다. 게다가 이전에 그런 일이 있었기에 다시 한번 그런 일이 일어나길 기도했을 겁니다. 그러나 믿지는 못합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며 생명따위는 가볍게 보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헤롯가문, 자신들의 시기와 욕망으로 가득차 하나님의 사람들을 계속해서 거절하고 죽이는 유대교인들, 기도는 하면서 그 기도가 이뤄질 것이라고 믿지 못하는 예루살렘 교인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홀연히 나타나는 주의 능력
모순으로 뒤덮여있는 유대정치와 유대종교, 교회신앙 안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교회를 인도하십니까? 베드로의 투옥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5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6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말씀드렸던 것처럼 베드로는 천사로 신비롭게 풀려난 적이 있기에 헤롯은 이번엔 더 강력한 경비태세를 세우게 됩니다. 4개조가 돌아가면서 감옥입구를 지킵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감옥 안에서 쇠사슬로 묶여져있습니다. 잘때까지도 포함해 두 군인이 양 옆에 있습니다. 그리고 밤이 찾아옵니다. 사형날짜가 다음날로 다가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기도를 하지만, 응답이 오는 것 같진 않습니다. 네,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고난을 당하도록 내버려두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그 교회를 향해서 매를 들고 계십니다. 이렇게 징계를 주시고 정치와 종교에서 거의 매장당하다시피 다루십니다. 하나님이 이 교회를 포기하신 것일까요?


 
우리는 지난 2주 동안 회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180도 도는 바울의 회심에서도 예수님은 바울의 잘못된 지점을 정확하게 지적하시는 매를 드셨습니다. 약간의 각도를 변경하도록 하는 베드로의 성화회심에서도 주님은 그의 잘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알고 하나님께로 맞춰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루살렘교회에게도 이런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베드로가 신비하게 나온 적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기도가 이뤄질 것이라고 믿지 않고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서 거리가 멀어져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신앙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그들에게 알려주시고자 그들의 신앙 끝자락까지 몰고 가셨던 겁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도 응답되지 읺을꺼라고 생각할때까지 가서 모두가 포기하고 있을 때, 7절과 같은 일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7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홀연히. 사실 원어에서 누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카이 이두! 그런데 보라!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겁니까? "상황이 사면초가, 설상가상일지라도 나는 네가 상상도 못할 타이밍에, 그 상황에, 그 환경에서도 일할 수 있다! 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삼엄한 경계에도 빠져나와 교회에게 이 사실을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 헤롯은 정치력으로 "신의 칭호"를 받으려다가 벌레가 내장을 갉아먹는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예루살렘교회가 절망하고 낙망해 믿음을 잃어버린듯이 보이는 그 때에 나타나셨습니다. 홀연히 갑자기 나타나 "보라"고 외칩니다. 베드로를 구원하기도 했고, 헤롯왕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도 바람이 어디서 불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처럼 된다고 니고데모에게 설명하셨습니다.(요3:8) 또한 예수님의 다시오심도 "번개가 동쪽에서 서쪽까지 번쩍이듯"이 될 것이라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마24:27) 하나님은 내 생각을 뛰어넘어 일하시는 분이심을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십니다! 내가 해이해졌다고 생각하지도 못할 그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나에게 홀연히
우리가 고난하면 생각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동시대에 함께 사역했던 안디옥 교회의 바울도 같은 어조로 말합니다. "13여러분이 당한 시험은 모든 사람들이 다 당하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여러분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여러분이 시험을 당할 때에 피할 길을 마련해 주셔서 감당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고전10) 네, 우리엑 피할 길은 하나님을 믿고서 있는 겁니다. 내생각과 관념을 뛰어넘어 어떻게든 하늘 솟아날 구멍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루살렘 교회에게 하나님은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셨던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데려가셨고, 스데반 집사와 야고보 사도도 데려가셨습니다. 흉년을 주시기도 했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기도 하셨습니다. 감당할만한 시험이기 때문에 주셨습니다. 믿음이 얼마나 정체되어 있는지 깨닫게 해주는 자극이 되었습니다. 응답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응답을 믿지 못하는 교회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께로 회심하게끔, 성화하게끔 하셨습니다. 우리는 복을 받았냐 시험들었냐로 신앙을 구분하는 초보적인 구분보다 성숙해져야 합니다. 잘되든 안되든 하나님을 향하며 하나님의 시야를 공유할 줄 아느냐로 말이죠.

한국기독교 역사 100년을 살펴볼까요? 교회가 풍성할 때가 있었는가? 네, 맞습니다. 19세기말부터 시작한 쇄국정책으로 조선을 찾은 선교사들은 핍박받기 일수였습니다. 20세기초 일제식민지 때에는 신사참배로 인해 신앙핍박은 일상화였습니다. 20세기 중반은 공산주의가 일본을 대신해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1980년에나 와서야 이제 교회가 풍성했습니다. 사람도 넘쳐나고, 재정도 풍성하고, 뭘 해도 되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2000년을 기점으로 다시 교회는 어려움에 당면하게 되었습니다. 제 은사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한국교회의 원래 위치가 어딘줄 아는가? 1990년 호황의 자리가 본래 자리가 아니라 한국기독교는 본래 핍박받는 자리에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네, 한국교회는 천황을 향해 절하라는 핍박 속에서, 공산당체제 아래에서, 군부정권 아래에서, 물질만능주의 아래에서 오로지 "홀연히 갑자기 다가오실 주님의 역사" 앞에서 잠들지 않기 위해 깨어있는 신앙으로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자리는 복을 가져다주는 하나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징계"를 허락하시는 하나님도 계심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교회에게 잘했습니까?"라고만 생각하기보다, 이 고난과 고통, 시험, 환난 속에서 내가 지금 어떤 영적시야를 뜨고 하나님을 따라가야 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고민하고 순종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감당할만한 시험과 징계를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3. 결론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세상에 상처없는 인생이 있습니까? 말짱한 영혼은 가짜입니다. 모두들 태어나서 상처받으며 살아가는겁니다. 원래 다 힘듭니다. 몸에 병이 없기를 바래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에 아프고 힘들 수 있는 겁니다. 네.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건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병들고 힘들고 안풀리고 고통스럽다고 특별히 나만 불행하다고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아프다는 것, 징계를 당한다는 것, 시험이 든다는 것, 그리고 마침내 죽는다는 것. 그것은 내가 살아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 홀연히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들과 함께 살아가다가 홀연히 모든 이가 겪는 "죽음"이라는 것을 겪게 될 것입니다. 생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죽음도 다스리기에 우리 모두에게 홀연히 생명을 가져가는 역사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해오셨습니다. 성령을 주실 때에도, 예수를 보내주실 때에도, 구원을 깨닫게 하실 때에도 갑작스럽게,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할 때에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이렇게 역사하십니다. 이번 한주도 내 곁에서 내 생각과 경험을 뛰어넘어 놀랍게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생사화복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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