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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YAMEMORY
구속사 설교_F/우리행전_사도행전

우리행전(7) 돌아설 줄 아는 신앙

by 우루사야 2023. 8. 6.

본문 : 행 9:1-9
제목 : 돌아설 줄 아는 신앙 


서론
1) 들어가기
피드백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피드는 먹이라는 의미이고, 백은 뒤라는 뜻이죠. 먹이를 주었을 때 동물이 보이는 반응을 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관찰하지 않고 무작정 먹이를 주었다가는 동물이 탈이 나거나 병들기 때문이겠죠. 이 용어는 가축뿐만 아니라 음향, 회사조직 등에서도 많이 쓰이는 용어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신앙에서도 이 단어가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결정을 통해 나에게 일어나는 반응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 반응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인지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것을 우리는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잘못된 판단으로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판단 될 때, 돌이켜서 다시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나자신을 향한 피드백, 회심"을 하는 것이지요.

2) 주제
돌 회, 마음 심.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순간순간을 가져가면서 우리는 점점 성숙한 신앙으로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성숙도는 회심이어야 합니다. 혹자와 같이 기간이 신앙성숙의 잣대가 될 때, 보통 우리는 모태신앙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부모의 신앙환경이 어떠냐에 따라 자녀의 신앙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말이죠. 마치 강남에 사는 부모로 인해 자녀의 삶의 행복도가 결정되는 것마냥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많은 성경인물들의 후천적인 신앙환경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회심을 경험한 사건"을 언급해줍니다. 
바울이나 베드로의 회심사건은 굉장히 스펙터클하죠. 그런가 반면에 세리 마태나 나다나엘, 우물가의 여인의 경우 극적인 기적은 없지만, 예수님과 대화로 마음이 통해 제자가 되기도하고, 니고데모의 경우 예수님께 질타를 당하면서도 이어지는 문답이 있은 후, 나중에서야 예수를 공개적으로 믿는 자가 됩니다. 이렇게 성경은 "회심"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많고, 그 종류도 다양하며, 특히 사도행전은 그 회심의 사건이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고, 더군다나 수만명의 회심사건, 한 도시나 마을의 회심사건이 나열해서 기록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후반부는 사울을 통해서 수많은 도시가 어떻게 회심하며 교회를 세우는지에 대한 사울의 5번의 전도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 본론잇기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에서 사울의 회심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줄 것입니다. 회심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교리는 따로 정리해드리고, 오늘은 현대에 살아가는 내가 받을 수 있는 가르침에 집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 본론
1) 회심의 중요성 
그렇다면 사울의 회심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먼저는 사울이 돌기 전 방향으로 갔을 때부터 살펴보는게 순서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지요. "1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사울은 예수제자들을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 정도에 대해서 본문은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사람을 죽이려는 적극적 살해동기를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다른 타인을 향해서 살기가 이렇게 치밀어 오를 수 있을까요? 그의 안에 분명 심각한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2절을 보면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까지 잡으려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잡을 때 예수를 따르는 여인들이 그렇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실 때 남자들은 다 도망가고 여인들만 남아도 잡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울의 경우는 그 때보다 더 심한 정도인 것이지요. 사울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나는 괴수 중의 괴수였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딤전 1:15) 자신의 분노, 자신의 옳음, 자신의 무분별한 잔인성을 두고 말한 것이었죠.

이렇듯 회심은 "나의 옳지 못함"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11월 추수감사절에 초청음악회를 하더라도 우리가 꼭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이 행사에서는 좋은 이야기, 좋은 공간, 좋은 음식, 좋은 시간을 보내겠지요. 마치 연인이 데이트할 때처럼 말이죠. 그러나 결혼은 현실이듯이, 신앙을 갖는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현실을 말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괴수인지 직면하는 시간"입니다. 제가 위에서 언급해드린 베드로도 회심때 자신을 두고 "죄인"이라고 무릎을 꿇게 되는 시간이 있었고, 우물가의 여인도 자신의 복잡했던 결혼생활을 꿰뚫는 예수님 앞에서 고백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율법교사들의 스승인 니고데모는 "이것도 모르느냐"(요3:10)고 질타를 당하기도 했죠. 그렇다면 사울은 자신이 괴수됨을 주님이 어떻게 알려주셨을까요?
4절입니다.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다른이들처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보지 못했던 것"처럼 사울이 하나님을 왜곡하고 착각하고 내 멋대로 생각하고 있다며 "너는 나를 박해하고 있다", 즉 "너의 신앙은 한참 잘못되어있다!"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것이지요.

여러분.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회심할 때 계기가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지 못한 나 자신의 생각과 행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계신 여러분이 신앙을 출발하시는 이시라면 꼭 "나는 어떤 무엇을 믿으며 살아왔는가"에 대한 삶에 대해서 돌이키십시오. 만약 신앙생활을 가지고 계셨던 분들이라면 "나는 어떤 하나님을 믿으며 신앙생활해왔는가"에 대해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과연 성경이 말하는 신, 말씀이 가리키는 하나님을 믿었는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사울의 회심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울을 어떻게 회심시키셨을까요? 주님은 자신을 더 나타내주십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이 불타는 떨기나무로 나타나셨듯, 주님은 "5b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자세히 알려주십니다. 법전에서만 알던 하나님이, 이제는 무언가 차원이 다른 모습으로 사울에게 인식된 것이죠. 네, 하나님이 우리를 회심시키실 때에는 "내가 착각하거나, 왜곡하거나, 잘못믿었던 하나님의 모습을 올바르게" 잡아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사울에게 나타나시며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그렇게 하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고통받는 신 : 예수는 사울에게 강력한 신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통받는 신"으로 소개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신을 생각할 때 고통이나 아픔과 무관한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자 하나님 예수는 아프고, 힘들어하며, 피곤하며, 두려워하고, 때로는 슬퍼하기까지 하는 신으로 소개합니다. 사울은 법전에서 하나님을 알아왔습니다. 법을 수여하고 법을 지키길 요구하며, 법에 위반되었을 때 처벌을 내리는 "상위에 있어 고통을 주는 신"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울에게 예수는 "하위에서 고난받는 존재"로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2) 교회와 하나되는 신 : 두번째로 예수는 사울에게 "핍박받았다"라고 말합니다. 사울은 사실 예수를 핍박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없지만 상상력을 조금 더해보자면,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을 때, 강도 바라바 대신에 예수를 죽이라고 외쳤던 무리 중 사울이 있었을 수도 있고, 공의회원들 사이에 껴서 예수가 심문받을 때 거짓증언을 마구 뱉어냈던 무리에 사울이 있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직접적으로 예수에게 해를 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는 지금 사울에게 "네가 나를 핍박했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사울이 핍박하는 것은 교회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죠. 그런 제자들을 핍박했을 때 예수는 "그것이 나를 핍박한 것"이라고, "교회와 나는 하나된 몸"이라고 소개하는 겁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법전에서만 하나님을 안 사울에게 하나님과 인류는 큰 벽으로 나뉘어져있는, 판사와 죄수였습니다. 판사는 단 위에서 죄수를 불같은 눈으로 쏘아봅니다. 사울에게 하나님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과 하나된 신"으로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나중에 사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누가 우리를 죄인으로 단정하겠습니까? 그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항상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십니다"(롬8:34)

그렇습니다. 지금 사울에게는 그간 자신이 알던 신의 모습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소개하며 고통받는 신이라고 말했고, 인간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라고 말했던 겁니다. 사울이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회심이라는 것이 첫고백때에 있을 수도 있고, 신앙생활 중간중간에 일어나는 것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멋대로 그리는 신"의 모습에서, 예수라는 정확한 "성경이 말하는 신"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3) 회심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그렇다면 우리는 회심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 주님께서는 사울에게 빛을 비추시며 그를 보호하고 계셨고 또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6절을 보실까요? "6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사울이 회심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그 당시 다메섹 도시에서 가장 성숙한 제자 아나니아를 주님은 준비시키기도 하셨습니다. 네, 회심을 우리는 준비하지 못합니다. 단지 하나님이 하실 뿐입니다.

제가 고백하고자 합니다. 이번 여름성경학교를 하면서 처음에 많이 부담이 되었습니다. 교사가 한명도 없는 터라 혼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준비를 시작하니 많은 아이들이 오겠다는 의사를 보였고, 성경학교 기간 내내를 보니 약 40명 가량의 아이들이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 마음 속에서는 '그래, 이렇게 신나는 행사로 끝마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라는 생각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방도를 통해서 저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첫번째로, 기도하는 가운데 아이들을 기억나게 해주셨습니다. 좀 더 큰 교회 좋은 시스템에 가면 아이들이 좋은 성경학교를 할텐데라는 부담으로 기도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이사야 너가 복음을 전해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두번째로, 사람을 보내주셨습니다. 지역신자분을 보내주셔서 여름성경학교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 대화 속에서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을 일으켜주셨습니다. 이런 회심을 가지고 신학적으로 여러 이슈가 있는데, 일단 이것은 추후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마음을 돌이키게 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학교를 마치고 제가 알게 된 하나님의 모습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저의 불안과 초조를 피드백해보니 저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 나의 일을 하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 믿음과 기대, 확신, 소망이 가득한데 말이죠. 주일학교가 조금씩 더 커질 것이고, 그전까지 해왔던 온가족예배가 걱정이 됩니다. 교사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따라가다보면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은 책임지실 줄 믿습니다. 회심을 하는 이 인생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울에게 빛을 비추시며 하나님 당신을 소개하셨던 시간, 그리고 보내주셨던 아나니아처럼 저에게도 하나님은 사람도 보내주셨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다시금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3. 결론
여러분의 인생이라고 다를까요? 사울과 여러분이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이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괴수 중의 괴수였던 사울, 행사로 마치려고 했던 믿음없던 목사 이사야. 여러분과 다를 바 없고, 오히려 여러분이 더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께 맞춰가려는 방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그의 이런 고백은 첫 회심때에도, 그리고 회심한 이후 몇몇 큰 갈등과 분노, 어려움, 고뇌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살아가려고 했던 방향" 하나님을 기준으로 항상 피드백해왔던 그의 믿음을 보고 기뻐하시며 그의 인생을 이끌어주셨던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고백이었을 겁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이 아파트를 사는데 평생이 쓰이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오로지 자녀의 성공, 공동체로부터 받는 인정에 매몰되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공동체가 세워지고, 사랑받아 다시 일어나는 자가 나타나며, 썩어가는 곳곳이 빛나고 생명력 넘치길 바라십니다. 이제 그만 주님께로 돌아가 여러분 곳곳에서 여러분의 행전을 써내려가시는 한주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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