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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 설교_F/우리행전_사도행전

우리행전(6) 밖에서 찾는 은혜

by 우루사야 2023. 7. 21.

본문 : 행 6:1-7
제목 : 균형영성

1. 서론
1) 예화 : 균형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은 옐로스톤 국립공원입니다. 그리고 크기도 최대인데, 경기도 전체크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보니 얼마나 많은 야생동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1990년대에 이 국립공원에서 사슴개체수가 급격히 늘기 시작했고, 사슴들이 풀과 나무, 뿌리까지 먹어치우다보니 국립공원이 황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공원측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여 공원측은 늑대14마리를 풀어놓았고, 이는 사슴개체를 조절시켰고, 산이 다시 푸르게 해주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자연계의 균형"으로 풀어냈던 것이지요.
요즘 뉴스에서 많이 나오는 안타까운 뉴스가 바로 교권침해에 관한 것입니다. 사실 제 때만 해도 선생님께 맞고, 머리채 잡히고 머리카락 잘리고, 욕설을 듣는 일은 다반사였습니다. 그렇다보니 교권에 대한 제한이 급속도로 이뤄졌고, 이러한 제재는 오늘날과 같은 교권침해현상까지 만들어내고야 말았습니다. 사실 교사와 학생 어느 한쪽의 손만 들어준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문제는 정치계에서의 여당과 야당, 사회에서의 남성과 여성, 교회에서의 높은 연령세대와 젊은이들 간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리는 이런 관계를 "탁월한 인간의 지혜나 힘"으로 해결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균형'을 통해 함께 살아감으로써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왔던 것이고, 그렇게 성숙해왔던 겁니다. 
2) 주제
어찌보면 우리네 인생은 힘을 주어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보다는 균형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듯 합니다. 폴 트루니에는 인생의 사계절이라는 책에서, 청년과 어른의 차이를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청년은 절대적인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인생을 흑백논리로만 보는 것이죠. 그런 청년이 세상에 선과 악이 분리할 수 없을 만큼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만 "충만한 삶"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22사실 나의 속 중심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23그러나 나의 의 여러 부분들에서는 다른 법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나를 내 에서 작용하고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24나는 참으로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에서 구원해 내겠습니까?"(롬7) 라고 말합니다. 자기 안에 회색지대가 있으며, 이것으로 괴롭지만, 내 힘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음을 다음 8장에서 고백합니다. 바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힘이지요. 
이런 인생임을 인정했을 때, 나의 힘이나 세속의 물질이나 영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책이 없음을 인정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영적 성인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옐로스톤 공원 관계자들은 황폐해지는 산림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없음을 인정했을 때, 진정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성공할 인생, 능력이 있는 인생이 아님을 인정했을 때 진정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힘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3) 본론잇기
우리는 지난 주에 "나는 교회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봤습니다. 오늘은 그 사건에 이어서 교회가 또 다른 내분을 겪게 됩니다. 사람이 많아지니 먹고 자는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기적이 일어나고, 헌금을 자원해서 내는 인원이 많아지는 그 교회에도 시기의 공격과 질투의 내분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들은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어떤 힘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해나가는지, 회색지대 인생들이 모인 교회에서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해주시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저와 여러분의 공동체, 그리고 가정, 직장, 일상에서도 회색지대에 은혜가 베풀어지는 은혜가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1. 본론
1) 문제발생
먼저 1절을 보면 "1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교회가 부흥하니 챙겨야 할 성도수도 많아졌습니다. 그 중에 특히 먹고 자는 문제가 걸려있는 과부들 경우 교회가 더 특별하게 챙겨야 하는 영역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과부들을 챙기지 못했는데, 그것도 본토 유대인 과부들은 챙김을 잘 받지만 소수세력인 본토 밖에 사는 과부들을 빠뜨리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 한두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반복되다보니 "원망"이 생기기까지 했고, 결국 헬라파와 유대파로 나뉘어지기까지 했던 겁니다. 
사실 그간 예수공동체는 너무나도 급속도로 성장했습니다. 예루살렘의 규모에서 수만명이 한번에 움직인다는 것은 예수공동체만의 일이 되지 않음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공동체는 여러가지 면에서 고려해야 할 것들이 한번에 많이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런 점에 있어서 구약성경에서 구제해야 할 대상으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과부"의 문제에 있어서 놓쳤다는 것은, 당시 제자들에게 심각한 결여가 생겼음을 의미합니다. 첫번째, 성령충만한 제자들도 "문제가 있는 인간"입니다. 

두번째로 헬라파와 히브리파라는 벽이 생겼음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파를 나누는 기준은 "혈통, 출신"이 아닙니다. "언어"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을 통해서 많은 나라들이 그리스헬라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주변국들은 아람어를 썼습니다. 그러니 언어가 달랐던 것이지요. 의사소통의 문제가 생겼다는 것에서 우리는 의미심장한 문제점 하나를 찾게 됩니다. 그 전에 이 공동체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때가 언제였습니까? 성령이 강림하셔서 "난 곳 방언"들로 언어가 소통되어지는 기적이 이뤄졌을 때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 공동체가 두 언어로 인해서 소통이 불가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적이 사라졌다거나 은사가 없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할 공동체가 점점 일에 치여서 마음이 곤비해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세번째입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2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이 구절을 보면 12사도는 말씀만 전했을까요 아니면 구제하는 일에 그들도 동참했을까요? 네. 만약 이들이 구제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지 않았다면 이런 말 할필요가 없이죠. 사도들까지 구제하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빼앗겨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시간까지 없어지기까지 하니 때마침 조율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겁니다. 

종합적으로 보면, 지금 초대교회는 불균형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겁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교회, 치유가 일어나는 교회, 신도수가 급속도로 늘어나는 교회일찌라도 "일에 치여서 불균형으로 무너질 수도 있는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보다 신자가 충만해졌던 것이 먼저 보였고, 신자가 서로 소통하는 것보다 일에 치여서 일을 처리하기에 바빴고, 그래서 본래 사명인 하나님의 큰 일을 전하는 것보다 다른 것이 먼저 보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상황에 끌려다니면 결국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상황이 우리에게 주인노릇하게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다가는 살려고 발버둥치는 우리의 모습, 허우적대며 갈팡질팡대는 우리의 모습만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 직장, 일상, 교회에서 그 무엇에게도 다스리는 자리를 빼앗겨서는 안되겠습니다.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우리가 주인이 되어 다스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그렇다면 제자들은 혼돈 속에 빠져가는 교회를 어떻게 다시 균형잡히고 성장하는 교회로 세울 수 있었을까요?





2) 균형
본문 3-4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3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4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제자들은 분업을 택합니다. 교회의 중심부역할로써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하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수반되는 문제 또는 해결해야 할 사안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고자 하지요. 한 단어로 설명하자면 "균형"입니다. 균형있는 사람들을 찾아, 균형있는 체계를 잡고자 사람을 세웁니다. 그렇게 균형있는 교회로 성숙해지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 아나니아가 높아지고자 했던 것과 비슷하지만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높이는 사역입니다. 지난 시간에 높아지고자 하는 사람이 낮아졌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낮은 자를 높이는 사역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초대교회는 예수님처럼 낮은 자를 높여서, 균형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가 서두에 여러 예를 통해서 "나의 힘"이 아니라 "외부를 통한 균형의 힘"을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초대교회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1) 12사도 밖에서 : 12사도들은 7명을 세웁니다. 우리는 이들을 집사라고 부르죠. 그런데 사실 집사라는 말이 여기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1장에서 한번 나오는데, 그것도 보조자로써 부른 것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주인의 종노릇하는 집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영어성경에서는 전도자라고까지 부릅니다. 네, 사도들은 자신들과 같이 사역할 동역자를 세운 것입니다. 잡일을 할 사람을 뽑은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6장 뒤로 살펴보면 7집사 중 스데반과 빌립 집사의 사역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줍니다. 현대로 보자면 목회자로써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지요. 네, 12사도들은 지금 자기들 밖 외부에서 사람을 세움으로써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게다가 사도들은 이 7집사를 세울 때에 자신들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3절에 보니 "형제들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라고 말합니다. 사도들과 가까운 이들을 세워 정치세력화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회중에서, 즉 현장에서 검증되고 칭찬받는 자들을 "택하라"(3절)고 합니다. 사도들은 회중을 높이고 있습니다. 
(2) 히브리파 밖에서 : 5-6절을 볼까요? "5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6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일곱집사를 세울 때의 이름들을 보면 유대본토땅에서 쓰는 이름들이 아닙니다. 모두 헬라로마식 이름입니다. 네, 기득권층 다수파라고 불리울 수 있는 히브리파는 소수이자 외국에 있던 헬라파 사람들로 세움으로써 균형을 맞춰가고 있는 것입니다. 12사도가 자신들의 권한을 위임한 것처럼, 히브리파 다수는 헬라파 사람들을 높이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7집사에게 잡일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2절에서 "접대"할 때 사역도 디아코니아, 즉 봉사라고 부릅니다. 4절에서 말씀기도 "사역"을 말할 때도 디아코니아라고 부르면서 봉사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네. 하등 차이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1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제자가 많아지니" 분업을 한 것이지, 그 전까지 분업하지 않고 제자들이 구제사역을 함께 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사도들이 말씀기도사역과 구제사역에 우열을 두고 있었다면, 제자들도 처음부터 구제사역을 하지 않았겠지요. 본래 12사도는 다른 신자들과 같이 서로 섬기고 높이면서 이 일을 감당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상태였기에 이렇게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이에 회중이 5절과 같이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며 화답했던 겁니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일 중 하나가 "사람세우기에 실패하는 것"에 있습니다. 수십년을 목회하신 담임목사님을 원로목사님으로 높이는데 실패하고, 새로운 담임목사를 세우는데 실패하고, 새로 중직자를 세우는데 온갖 정치적인 계산들이 난무하며, 부교역자가 교회에 새로 올 때에 파워게임을 하는 성도들이 나타나며, 새신자가 교회에 적응하려고 해도 섬김이 없어 결국 공동체 적응을 포기하곤 합니다. 과연 교회가 무엇을 위해서 있는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그 삶을 실천한 오늘 본문에서의 초대교회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3) 적용
그런 점에서 저는 행복한교회가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를 환대해주시는 성도님들, 담임목사님을 향한 성도들의 사랑, 교우들 간의 화목과 화평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제가 올해 소그룹을 묶어드리는 사역에 힘쓰고 있는 것을 다들 아실 겁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교회가 문턱이 높지 않고, 서로 섬기려는 모습에 있음에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이 그러시더군요. 좋은 교회란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고 말이죠. 한 소그룹에 사회적 위치가 높고 낮은 모두가 함께 있을 수 있는 곳. 사회적 지위가 낮더라도 복음때문에 리더가 될 수 있는 곳. 사회적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고 또 복음을 아직 모르거나 미성숙하다면 배우게끔 할 수 있는 교회.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질서있게 함께 할 수 있는 곳이 좋은 교회라고 말이죠. 

오늘 본문에서 초대교회가 이렇게 지혜롭게 서로 섬기며 높이면서 균형을 맞춰가니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7절입니다. "7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이렇게 교회가 균형을 맞춰가며 본질을 향해 나아가니 3가지 놀라운 일이 나타납니다. 첫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저절로 퍼져나갑니다. 두번째, 신도수가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세번째, 반대편에 있던 자들까지도 함께 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적용해볼까요? 우리가 본질을 향해 균형을 맞춰 나아가다보면, 저절로 이 지역에 하나님의 말씀이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저절로 교회에 함께 하는 신자수가 많아집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를 핍박하고 안티크리스쳔인 이들이 함께 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앞에서의 균형"입니다. 그 균형이 무엇인지 우리는 나 자신을 두고 기도하며, 말씀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번 오송지하차도에서 두분이 뉴스에 나오셨습니다. 747급행버스 50대 운전사는 승객을 대피시키고 다시 남은 승객을 구하러 가다 참변을 당했습니다. 또 다른 유병조 화물트럭기사는 3명을 구했는데, 그중 한명 20대 여성의 아버지가 말하길 자기는 포기하려 했으나 기사님이 자기를 놔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분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누군가의 사랑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코 우리네 인생의 문제들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서로 사랑함으로써 서로 높임으로써 우리는 내가 가진 난제들을 풀어낼 수 있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가정에서 배우자와 부모, 자녀들을 높여보십시오. 직장에서 또 일상에서 나의 이웃들을 높이고 섬겨보십시오. 교회에서 교우들을 사랑하며 바라보십시오. 그리할 때 점점 내 힘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었던 난제와 같은 인생문제들을 하나님께서 신비하게 또 내가 섬김으로써 이해할 수 있게끔 하나하나 풀어주실 것입니다. 이번 한주도 그렇게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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