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AYAMEMORY
구속사 설교_F/우리행전_사도행전

우리행전(4) 해석하는 신앙

by 우루사야 2023. 7. 9.

제목 : 해석하는 신앙

본문 : 4 18-23

1. 서론

1) 예화 

우리나라 65 이상 성인의 임종 선호 장소 1위는 집이라고 kbs에서 보도하더군요.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10명중 7명은 의료기관에서 생을 마감하고, 집에서 임종한 비율은 16% 불과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현실은 집에서 마지막순간을 보내고자 한다면, 보호자가 경찰조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부분 우리나라 성인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까요? 뉴스에서는 "연명셔틀"이라는 표현을 소개했습니다. 임종을 앞두고 요양시설과 응급실, 거기서 중환자실로 갔다가 다시 요양병원으로, 이렇게 오가다 어디선가에서 임종을 맞이한다는 겁니다. 임종 직전에는 일반환자와 격리 밖에 없고, 가족과 함께 죽음을 맞이할 임종실도 대부분의 병원은 없다고 합니다. 대부분 처치실, 간호사실 옆에 물품을 쌓아 놓는 공간에서 임종이 이뤄진다고 합니다. 사실 제가 아는 지인이 호흡기저질환으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여 병원에 갔더니 처치실에 있었고, 이제 안치실로 가면 못본다고 5분의 시간만을 주고 가족과 지인이 이제는 만나지 못하게 하더군요. 
이런 시스템이 되었을까요? 기자는 "죽음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미성숙한 문화라는 식의 해석을 소개하더군요. 죽음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니, 이렇게 결국은 출생과는 전혀 다른 무례한 죽음을 맞이할 밖에 없다고 말이죠. 

 

2) 주제
우리 일생의 순간순간을 제대로 직면하고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말이죠.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 하나님을 대신 우리의 마음에 보내신 것도 "우리를 가장 인간답게 살게끔" 하시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에 계심으로써 우리가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아내고 걸어갈 있도록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고 계십니다. 말할 바를 알려주시기도 하고, 지혜로운 아이디어를 깨닫게 하시기도 하시며, 인내할 있는 힘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 일하시어 내가 인간다운 태도와 명예를 가지고 살아가게끔 하십니다.

3)
본론잇기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4장에서 종교기득권자들은 베드로의 활동을 저지합니다. 그의 지식적 자격은 물론 미달이거니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교리자체를 틀린 것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게다가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 따져봅시다." . 여러분. 우리는 보이는 것과 욕망만을 따라서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이것이 중요한지를 따질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며, 인간에게 성령 하나님은 오셨고 내면으로 오셔야만 했는지, 그래서 이것이 내가 마지막날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어떤 영향력이 있는지 우리는 질문을 던지고 해석할 있어야 하겠습니다. 힘으로 베드로를 가두고 오로지 자기자신의 안일한 환경만을 지키고자 했던 종교기득권자들과 베드로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지 보며, 우리 자신의 신앙도 돌아볼 있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비인간적
먼저 오늘 본문이 되는 사도행전 4 1-3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1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2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3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사도들이 예수부활과 성령강림이라는 하나님의 일들을 소개할 , 3부류가 나타나 이들의 행동을 대놓고 싫어하고 반대하다 못해 옥에 가둡니다. 첫번째는 "성전의 중심축인 제사장", 두번째는 "성전을 관리하는 성전맡은 ", 그리고 세번째는 성경을 해석하는 "사두개파 사람들"로서 바리새파보다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유대교의 세력이었습니다. 성전사람들과 함께 다니는 것보니 유대교 중심축이 사도들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던듯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행동은 제자들과 토론, 논쟁, 의견교환, 연구가 아니었습니다. "잡아서 다음날까지 가두어놓는 "이었습니다. 그렇게까지 밖에 없었을까요? 4절을 보십시오. "4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오천이나 되었더라" 제자들이 옥에서 나와 말씀을 전하기만 해도 남자만 5천명이니, 2만여명의 남녀노소가 예수를 따르기 시작하는 "예루살렘의 대격변"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는 2절에서 사두개인들이 특히 싫어하는 지점이 있었다고 소개합니다.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 가르침을 찝어 알려줍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승천하신 것을 제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난 예수를 보았고 확인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애써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난 것이, 성전 앞에서 구걸하는 유명한 앉은뱅이가 병고침을 나아 성전을 뛰어다니고 있는데, 제자들이 일은 "부활하신 예수가 하신 "이라고 설명하니 사두개인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불편해지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사두개인들은 제자들을 감옥에 가둬놓기는 했지만,"비난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14) "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라고 인정했습니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18) 경고하는 밖에는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2번의 대격변의 대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마다 회개하고 예수의 제자가 자들이 첫번째에는 3천명, 두번째에는 5천명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도 함께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제자들을 가두는 것입니다. 이들의 심리는 무엇이었던 것일까요?

첫번째, 이들은 현재가 아니라 나의 과거에 붙잡혀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까지 유대교에서 부활이라는 자체에 대해서 찾아보기가 힘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오죽하면 사두개인들은 구약에서 부활을 암시하는 단어들은 시적표현이나 은유적 표현이라고 치부해버렸겠습니까? 그간 경험하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던 부활이라는 사실 앞에서 그들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새로운 것이 다가올 그것에 대해서 경계하며 살펴보고 질문하는 것은 분명 유익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차피 이들은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채로 무작정 이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감옥에 가둬두어 그들의 입을 막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에 대제사장들은 이미 경비병들을 돈으로 매수해 부활사건을 입밖에 내지 못하게 전적이 있었습니다. 
두번째, 이들은 사실이 아니라 힘에 붙잡혀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사두개인들은 기득권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추종자들 수만명이 나타나니, 자신들의 세력에 금이 가기 시작했던 겁니다. 특히 예수는 생전에 성전을 뒤엎으며 성전에서 일어나는 수익구조를 망친 전적이 있었기에, 제자들이 그런 짓을 할까 염려되었을 겁니다. 그들은 일어난 사실보다 "자신들의 힘과 기득권" 지키기에 바빴던 겁니다. 결론적으로 부활이라는 새로운 사실과 그것을 증명해주는 성전 앉은뱅이 사건 앞에서도 그들은 "과거의 내신앙" "나의 안일한 기득권지키기" 혈안이 되고 있었던 것이죠. 

2) 인간적인
이에 대해서 베드로는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서 가지를 제안합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19베드로 요한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없다 하니" 여러분, 우리가 죽음이라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를 덮어두고 모른채 하니 가장 비인간적인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지 않습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재정, 환경, 시간, 에너지를 보십시오.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얼마나 비신자보다 많은 것들을 할애하고 따로 떼어내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다워지기 위해서 "신앙"이라는 것에 대해서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따져보고 해석해보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두가지 제안 첫번째를 살펴보죠.
(1) 20
절에서 베드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없다" 못을 박아버립니다. 베드로는 지금 자신 안에 성령 하나님이 살아움직이시고, 자신의 인생을 통해 앉은뱅이를 일으키시며, 타인에게 천국의 소망을 주는 현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오감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을 부정할 없고 말해야만 하겠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지성인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무신론자 물리학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돼지나 인간은 물질적으로 하등 차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돼지를 죽여도 되지만, 돼지는 인간을 죽이면 안된다는 기준은 어디서 생겼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종교말고는 다른 곳에서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밖에도 우리가 묻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여기는 합의되는 많은 기준들에는 종교가 역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신론자임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이세상에 존재하는가, 신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있는가, 이런 질문에서 상당히 동의가 되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20하나님이 세상 창조하신 그때부터 보이지 않는 그의 속성, 그의 영원하신 능력 신성 그가 만드신 만물을 통해 분명히 나타나서 알게 되었으니 이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1)라고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나를 돌아보아야 겠습니다. 아직도 예수를 만나지 못했고, 확신이 없으며,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거나 방치하고 있다면. 우리는 "변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종교에서 경전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나는 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확인해야 합니다. 무신론자도 저렇게까지 생각하는데, 성경은 성령 하나님을 확인하라고 지금 나에게 보내주셨다고 누누히 말한다면, 나는 확인해야 합니다.
(2)
이것이 동의가 된다면,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쉽게 말해 하나님이 안에 살아계시는데 누구의 말을 듣는 것이 맞는지 한번 따져보자는 겁니다. 인간이라면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생각하고, 신앙에 대해서 곰곰히 물어보고, 해석을 가지고 답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한편으로 다른 이에게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사는지" 대해서 말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인생말년에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15마음 주님이신 그리스도 거룩하게 모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간직한 희망에 대해서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부드럽고 공손하게 대답 준비를 "(벧전3)라고 말이죠.
여러분. 성령 하나님은 있는 , 잡을 있는 , 대화나눌 있는 분으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앉은뱅이에게 "믿음으로 오셨습니다." 예수가 어떻게 죄를 사하고, 하나님의 자녀직분을 주시며, 천국구원이 어떻게 주어지는지 깨닫게끔 오셨습니다. 여러분의 질문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갈망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심령이 필요합니다. 그것으로 성경을 읽으시고, 예배에 참여하시고, 기도하십시오. 어느샌가 마음 속에 깨달음과 지혜,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확인하며, 마침내 다른 이에게 "내가 믿는지" 말하는 여러분을 보게 되실 겁니다. 

 

(3) 인간적인
제가 요즘 나누고 섬기는 삶에 대해서 다른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중고거래하는 인터넷 공간에서 "쌀을 나누는 사역" 접한 적이 있었습니다. 요즘 밥이 없어서 굶은 청년들이 많다기에 당근마켓을 통해서 자양동 일대 주민들에게 2kg 봉지를 나누고자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쌀이 그렇게 인기가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여차저차해서 분을 골라 교회로 오시면 드리겠다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분이 토요일에 오셨습니다. 분께 쌀을 드리며 한잔을 하는데, 잠깐 예배당에 가서 기도를 하고 와도 되겠냐고 하시더군요. 그리고서 잠시 후에 1 로비로 오셔서 헌금을 주시더군요. 보니까 쌀값보다 많은 금액이었습니다. 이해가 안되죠. 저의 행동도 그렇지만 분의 행동도 사실 이해가 안됩니다. 그래서 이분과는 대화를 해보자는 생각으로 이런저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분의 이야기를 들으니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위암 4기에 걸린 남동생을 간호하기 위해 가족과 떨어져 서울 자양동에 동생과 살아가고 있는데, 날카로워진 동생과 함께 살아가면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살아간다는게 너무나도 힘든 상황이었고, 붙잡을 것이 없어서 새벽예배붙들고 산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들어보니 부모님과 7남매 모두 불교인데, 자기 홀로 기독교를 믿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분을 말씀드리는 이유가 "제가 사람다워지는 느낌"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는 생전부지의 그분의 이름과 남동생분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눈물이 나더군요. 가장 신자다운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나누고 섬기고자 했던 시간을 통해 제가 섬김을 받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뛰어드십시오. 구원, 영혼, 섬김, 사랑의 장으로 뛰어들어가십시오. 거기에는 결단도, 헌신도, 희생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길을 마련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확인하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을 확인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고 있고,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고 있구나." 확인하십시오. 이것이 가장 인간적인 아니겠습니까? 매일 회사일에 찌들어서 집에서 쉴려고 하면, 수만가지 가정문제들이 나를 괴롭합니다. 직장에 가서 일만 하려고하면 동료간의 갈등때문에 수많은 에너지를 뺏기고 나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들로 마음이 찢어집니다. 핸드폰에는 지금 당장 해결해야 경제적인 문제들이 산적합니다. 이게 과연 인간적인 삶일까요? 여러분,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과 같이 살아야 가장 인간다워집니다. 성전에서 앉은뱅이로 구걸하던 사람이, 믿음을 깨닫고 자신이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임을 깨닫고 가장 인간답게 변했습니다. 나면서부터 자신이 가지고 있던 벽을 넘게 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이죠.

 

3.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저희 집에 많은 연령대의 아이들이 찾아오는데, 그러다보면 저희 아이들과 다른 아이들의 차이점을 대화속에서 알게 됩니다. 저희 아이들은 ""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누가 만들었고,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를 말이죠. 물론 때때로 이것을 다른 아이에게 강요할 때가 있는데, 이것을 "대답"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교회가 "이겠죠.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제가 제목으로 "해석하는 신앙"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과 내일, 모레에도 우리 앞에는 많은 변수들과 변화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마다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서 결정해야" 하는 운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땅에 수많은 존재들은 자신의 본능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오로지 인간만이 "질문하고, 고민하며, 되짚어" 봅니다. 그렇게 "가장 옳은 길로 해석해냅니다." 성령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의 인생을 "모르겠으니 덮어두는 인생" 아니라 "해석하고 답을 내리는 인생" 주셨습니다. 해석하는 인생을 오늘 당장 안에 계시는 하나님과 함께 사시기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