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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_F/룻기_하나님의 날개아래

룻 1:15-22

by 우루사야 2023. 2. 2.

15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19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22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오늘도 성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양식을 구하러 이방땅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나오미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리다시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계속 내려지고 있습니다. 다만 내가 그것을 인정하고 믿느냐는 또 별개의 것입니다. 은혜가 내려짐에도 나오미는 약속의 땅을 떠났었고, 이방땅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자 하나님이 버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면서도 하나님을 오해하며 구걸하며 지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은 전혀 상관 없는 사람처럼 스스로를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 룻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었던 자였습니다. 그녀 또한 남편을 잃은 과부였습니다. 나오미는 고향땅으로 돌아가 친척을 의지하고자 하지만, 룻은 지금 시어머니를 따라가면 의지할 곳이 전혀 없는 신세가 됩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나의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던 그녀였습니다. 그 고백이 오늘 본문 15-16절에서 등장합니다. 

15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16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결혼관계요 가족관계인 며느리들도 그녀들이 원한다면 또 양식문제라면 헤어질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특히 15절에 보니 "네 동서는 그의 신들에게 돌아가니 너도 따라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유대민족의 며느리로 들어온 자에게 다른 신에게로 가라는 그녀의 발언 속에서 그녀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떠났는지를 보게 됩니다. 물론 나오미도 하나님을 알았고 또 믿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신과 양립하는 신으로, 그리고 은혜보다 심판하고 저주하는 신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그 어머니의 말을 거역합니다. 룻은 어머니를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시어머니 봉양수준에서 그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룻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 가문에 들어가고 싶다는 고백과 같습니다. 자신은 이방인이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 유대인 가문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이렇게 결혼을 통해서 이어졌으니 그 명맥을 어떻게든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보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구원은 혈통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룻의 고백은 자신의 고향땅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가기보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땅으로 가겠다는 뜻을 보인 것이지요. 나오미는 눈 앞의 환경을 보고 이방땅으로 갔다가 유대땅으로 돌아오지만, 룻은 영적시야를 갖게 되었고 그래서 유대땅으로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어제부터 계속해서 룻과 나오미의 구도가 만들어집니다. 이방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오고자 하는 룻과 유대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으며 이스라엘 밖으로 나갔었던 나오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런 구도에 대한 질타는 여러번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장군 백부장의 신앙고백을 들으시면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8:10)고 하신 적도 있었고, 이러한 구도에 대해서 바울은 "표면적으로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마음이 유대인이어야 진짜 유대인,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설해주기도 했습니다. 룻기는 지금 사사기 시대에 있어서 진짜 하나님의 자녀가 누구인지를, 그래서 누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고 믿고 있는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강력했던 지파 유다지파 중에서도 예루살렘에 가장 가까웠던 베들레헴에 살았던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인지, 아니면 이방민족에서 유대인과 결혼하게 된 룻이 남편을 잃었음에도 시어머니를 따라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과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고자 "나의 백성 나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자인지를 말이죠. 본문 이어봅니다. 17-18절입니다. 

17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18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누구의 신앙과 신념이 더 강했습니까? 유대민족이면서도 하나님에 대해 확신이 없었던 나오미였습니다. 이방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해 확신이 있었던 룻이었습니다. 결국 출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믿음과 확신의 정도가 상황을 종결시켰습니다. 룻은 "죽는 일" 외에는 자신의 이 신앙을 꺾을 일이 없을 것이라 말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들어가는 일을 포기한다면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함을 고백합니다. 여기가 중요한 포인트가 되겠습니다. 나오미는 스스로 하나님의 약속 밖으로 나가고자 했습니다. 나오미는 그것이 자신이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고 있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룻은 그 영적원리를 깨달았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자신이 포기한다면, 그것은 나 스스로 벌을 내려달라고 말하는 것이라는 것까지도 깨닫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이방땅으로 갔던 나오미와 다시 비교되는 부분이겠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내가 지옥이든 죽음이든 사망이든. 그것을 무엇으로 표현하든지간에 하나님을 떠나 나를 죽음으로 내몰아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면 생명을 얻는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 원리를 묵상하십시오. 내 마음에 새기십시오. 나의 삶 곳곳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재정지출, 대인과의 만남, 거래처와의 소통 속에서도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결정과 언행으로 나아가십시오. 그곳 곳곳에서 생명이 솟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멀어지는 결정과 언행은 곧 나를 죽이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굳건한 믿음을 가진 룻의 결정에 따라 함께 유대땅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본문 19-21절입니다. 

19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20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21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나오미가 유대땅에서 나갈 때에는 남편과 두 아들과 떠났습니다. 그런데 돌아올 때에는 남편과 두아들도 없고 며느리 한명만 달랑 데리고 돌아오게 됩니다. 두 아들 결혼한 줄 알았더니 한명은 떠났습니다. 사람들이 수근수근대기 시작합니다. 베들레헴이 그다지 크지 않은 마을이고, 또 건너건너 혈통으로 묶여있고, 관계로 묶여있다보니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갑니다. 이에 나오미는 스스로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고 말이죠. 그러면서 기쁨의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자신의 이름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마라라고 부르라고 슬픔의 사람이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나갈 때에는 더 성공하기 위해서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나가서 결혼까지 시키고 10년 동안 정착하는듯 싶었는데 거기서 하나님이 치셔서 망했다고 말합니다.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이 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하나님과 멀어져서 하나님께 공급을 받지 못해 죽고 만 것 아니겠습니까? 물로 생사화복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지금 나오미는 자신이 하나님과 멀어지고자 했던 판단들은 다 접어두고, 결국 하나님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고, 과정은 다 무시하고 결과론적으로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심각하게 오해할 수 있는 신앙사고방식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건너뛰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의지와 자유를 주셨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을 양심 가운데 보내주셨습니다. 우리가 성령 하나님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따르지 않을 것인지 우리가 판단하고 결정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이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된 선택 속에서도 가르쳐주시고 하나하나 고쳐주셔서 그 판단 속에서도 선한 것이 나타나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선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만, 악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떠남으로 한 것임을 우리는 구분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나오미는 지금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계속해서 룻을 함께 생각하게 됩니다. 룻도 시아버지와 남편을 잃었습니다. 집안의 남자들을 잃어 먹고 살 길이 막힌 것은 매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고자 합니다. 고난과 역경 앞에서 영적시야를 가지고 분명한 판단과 결정을 내립니다. 지금 당장은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이실지언정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야겠다는 그녀의 판단이었습니다. 이것은 믿음과 신뢰가 없이는 할 수 없다는 것임을 우리는 또 다른 며느리였던 오르바를 통해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일반적인 시야를 초월할 수 있었던 그녀의 시야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줄 알았던 믿음의 눈이었던 것이지요. 이제 1장이 마쳐집니다. 룻기를 기록했던 저자는 1장을 마무리 지으면서 이렇게 정리합니다. 22절입니다. 

22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나오미와 룻이 돌아온 시기에 대해서 말합니다. "추수 시작할 때"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흉년을 주셨다가 다시 추수할 수 있도록 해주신 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나오미도 모압에서 가족을 잃는 흉년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해서 회복과 기회를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2장부터 하나님은 나오미에게 인생추수할 기회를 주실 것이라고 우리에게 힌트를 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려움과 역경 앞에서도 하나님을 고백하며, 이 어려움이 마쳐질 때까지 더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고 있어야 함을 룻이라는 이방여인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더 필요했고, 하나님에 대해 더 간절했던 룻이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어야 하겠습니다. 죄인과 병자를 위해 이 땅에 오셨지 의인이자 건강한 자에게는 자신이 쓸데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오늘 내가 하나님의 은혜가 간절히 필요한 사람임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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