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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_F/사사기_다시 주시는 은혜

사사기 20:1-11

by 우루사야 2022. 11. 17.

1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2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 명이었으며
3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올라간 것을 베냐민 자손이 들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이 악한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우리에게 말하라 하니
4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내 첩과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5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내가 묵고 있던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 그를 죽게 한지라
6내가 내 첩의 시체를 거두어 쪼개서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냈나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라
7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다 여기 있은즉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지니라 하니라
8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이르되 우리가 한 사람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말며 한 사람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9우리가 이제 기브아 사람에게 이렇게 행하리니 곧 제비를 뽑아서 그들을 치되
10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백 명에 열 명, 천 명에 백 명, 만 명에 천 명을 뽑아 그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준비하고 그들에게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 무리가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하니라
11이와 같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하나 같이 합심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더라


오늘도 다시 은혜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지난 본문에서 레위인은 자신의 첩의 시신을 나누어 각 지파에 보냅니다. 그의 행위는 이스라엘의 영적각성을 꾀하는듯이 보이지만, 사실 그는 첩으로 둔 아내를 인격적으로 또 하나님의 인연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음행을 얼른 감추기 위해서 이리저리 다녔던 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오히려 이 상황을 드러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가 회개해서일까요? 문맥상 이 레위인은 이 상황까지도 사용하여 자신의 위신을 높이려는듯이 보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첩이라 할지라도 그 시신을 이렇게 쪼개어 각 지파에 보낸다는 것이 쉽게 이해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지난 본문 마지막절에서 각 지파는 그 시신을 받아들고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삿19:30)라고까지 말했죠. 베냐민 지파 기브아 지방 사람들의 행위나,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레위인이 저지른 일이나... 총체적인 영적혼돈의 상황 속에서 각 지파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이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1-3절입니다.
1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2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 명이었으며3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올라간 것을 베냐민 자손이 들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이 악한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우리에게 말하라 하니
이스라엘 각지파의 대표들이 군사들을 이끌고 베냐민 지파 땅 중에 가장 요충지인 미스바에서 모이게 됩니다. 정의감에 불타는 폭도들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여호와 앞에 모였다"라는 표현을 통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모인 것이지요. "왕이 없으므로"라는 표현을 통해서 사사기 결론부가 흘러갔던 흐름을 기억합니다. 그 속에서 "여호와 앞에서 모였다"라는 것이 가뭄 속의 단비처럼 느껴집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말씀 안에서 이 중대한 사안을 처리하고자 합니다. 사실 이것이 "하나님의 울타리"입니다. 일전에 비유로 소개해드린 차선과 같은 것이지요. 아무리 자동차가 이리저리 차선을 넘나들면서 다닌다 하여도 사고가 나지 않으려면 그 차선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간의 약속이지요. 지금 이스라엘은 영적 낭떠러지 앞에서 하나님과의 약속, 서로의 약속을 기억하며 이 사고를 수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숙하게 처리할런지 계속 살펴보죠. 그리고 베냐민 지파 대표들에게 이 사건에 대해서 추궁을 하고자 합니다. 이에 먼저 첩의 남편 레위인이 말하고자 합니다. 4-7절입니다.
4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내 첩과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5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내가 묵고 있던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 그를 죽게 한지라6내가 내 첩의 시체를 거두어 쪼개서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냈나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라7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다 여기 있은즉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지니라 하니라
레위인의 태도를 볼까요? 지금 이 사람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아내를 내어주었던 것에 대해서는 빠지고, 오로지 피해자로서의 자기변호에 힘씁니다. 더 나아가 그는 "음행과 망령된 일"에 대해 자신이 통탄함을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 시신을 쪼개어 보냈다고 항변을 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대안을 두고 이스라엘 대표들에게 "의견과 방책을 낼지니라"고 넘깁니다. 사사기 저자는 왜 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소개했을까요? 이스라엘의 뻔뻔하고 이율배반적이며 모순적인 신앙의 대표적인 예로서 소개하고자 함입니다. 첩을 둔 레위인이 자신의 손 안에서 첩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안그래도 첩을 둔 것이 남들 보기에 어떨까 걱정이 되는데, 이제는 친정으로 도망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첩이 죽기까지 했으니, 자신이 첩을 두고 다닌 사실이 사방팔방에 전해질 것은 뻔할 노릇입니다. 그러니 이참에 이것을 드러내어 모든 책임을 다른 곳에 전가시키고자 하는 뻔뻔함을 보이는 것이지요. 이것이 누구의 모습입니까? 이스라엘의 모습아닙니까? 자신은 죄를 짓고 마음대로 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명분은 유지하고 싶은 것이지요. 또한 이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세속적인 것은 다 누리며 살면서도 동시에 기독교인 신자라는 명분은 가지고 있고 싶은 나의 현실이지요.

여호수아 말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24:15) 여러분, 우리의 생각은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물론 고민하고 고뇌하고 번뇌하는 시간은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마침내 어느 것이든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그 선택은 두개일 수 없습니다. 하나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를 택하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예수님도 우리에게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고 하셨습니다. 레위인은 지금 이것도 저것도 다 가지고 가고 싶은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 성경은 그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책임을 다른데에 돌리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성경은 그것을 다 알고 있다고, 우리의 이중적인 인생도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고 말하는듯 합니다. 마지막 8-11절입니다.
8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이르되 우리가 한 사람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말며 한 사람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9우리가 이제 기브아 사람에게 이렇게 행하리니 곧 제비를 뽑아서 그들을 치되10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백 명에 열 명, 천 명에 백 명, 만 명에 천 명을 뽑아 그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준비하고 그들에게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 무리가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하니라11이와 같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하나 같이 합심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더라
레위인의 말을 들은 이스라엘의 대표들이 모인 총회는 기브아 지방을 심판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가 기브아 지방을 보호하기로 함으로써, 내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살펴보겠지만, 이스라엘 연합군은 베냐민지파에게 2번이나 패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렇습니다. 지금 총회의 심판에는 권위가 없으니 베냐민지파가 인정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도 허락되지 않음에 따라 두번이나 패배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총회가 하나님과의 관계로서 영성이나, 이스라엘 전체 지파 안에서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움직인 것은 오로지 첩을 둔 레위인 한 사람의 말로 이리저리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기서 보여지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무질서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다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려는 자의 헛된 열정과 욕망입니다. 이중적입니다. 모순적입니다. 이율배반적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정의를 외친다 하여도 그에 합당한 결과를 기대하기가 힘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현실이 중요합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에게 큰 것이 맡겨집니다. 오늘 하루도 내 말과 행동, 결정, 판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으로 승리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작은 것에 충성됨으로 큰 것에 충성할 수 있도록 세워주실 하나님을 고백하며 오늘도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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