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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 설교_F/마주보기_삼상~왕상

마주보기09. 선택받지 못한 기쁨

by 우루사야 2022. 11. 1.

1. 서론
우리나라 최장수 드라마로 전원일기가 있습니다. 22년 동안 1000회가 넘게 방영된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한 드라마로 잘 알려져있지요. 이 드라마가 어떻게 끝나게 되었는지 아실까요?  전원일기 첫화 제목이 박수칠때 떠나라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방영회의 제목은 "박수칠 때 떠나려 해도"라고 하더군요. 전원일기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에피소드가 고갈되어가니 배우나 작가 모두 권태기에 빠졌고 시청률까지 저조하게 떨어졌다고 하더군요. 당시 작가는 "내가 죽는 것이 에피소드가 될만큼 이제 할 게 없다"고 말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최장수 드라마를 또 손쉽게 종영시킬 수 없는 노릇이었던 만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시청률 저조로 종영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퇴장으로 마치지 못해 아쉬운 드라마로 보이기도 합니다. 저희 세대에서는 무한도전이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 온고지신, 옛것이 있고 또 새것은 새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보낼 것은 보내고 또 맞이해야 할 것은 맞이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순리이겠지요. 보낼 것을 보내지 못하면 말씀드린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처럼 아름답지 못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박수칠 때 떠날 줄 알아야"하겠습니다. 참 힘들고 어려운 것이지요. 

우리가 계속해서 다윗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렇다면 어땠을까요? 네. 박수칠 때 떠나지 못할 뻔했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잘 떠날 준비를 하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저기까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여기까지다"라고 알려주셨고, 다행히도 다윗은 그 하나님의 뜻을 잘 받아들였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유와 목적을 너무나도 잘 알 수 있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내 힘으로는 결코 박수칠 때 떠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알고 있어야 박수칠 때 떠나며 아름다운 퇴장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다윗이 선택받아 환희의 기쁨을 누렸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더 신기한 환희입니다. 선택받지 못한 기쁨이겠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지 않고, 박수쳐줄 때 떠나게 해주시고, 나의 분량과 분수를 알게 해주시는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의 결말에 해당하는 다윗의 고백은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18이 말을 듣고 다윗 왕은 야훼 앞에 나아가 꿇어 앉아 아뢰었다. "야훼 나의 주님, 제가 무엇이며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저를 이런 자리에까지 끌어올려 주셨습니까?19야훼 나의 주님, 이것만도 분에 넘치는 일인데 훗날에 이 종의 집안에 있을 일까지 말씀해 주시고 알려주시니,20고마운 마음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야훼 나의 주님께서는 종 다윗의 심정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삼하7, 공동번역)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이 기쁨이 가득하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멈춰라 - 다윗은 멈춰라. (환희를 멈추라, 돌들로, 베드로, 나단까지, 안정기 속의 겸손) 

지난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선택하셨다는 확신때문에 참으로 기쁜 환희에 찼었습니다.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어야 했습니다. 다윗은 다시 한번 하나님과는 다른 뜻을 가지게 됩니다. 1-3절입니다.

1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2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택과 함께 주변이웃국들을 정복하면서 평화의 시대를 누리게 됩니다. 그 때 그의 마음에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 백향목궁과 텐트형식의 휘장이었습니다. 백향목은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나무에서 나오는 송진이 좋은 향을 냅니다. 그리고 튼튼하기에 고급목재로 사용되는 재료였습니다. 그래서 백향목은 아름다움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사치를 나타내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목재로 궁을 지어 사는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윗이 하나님이 계시는 휘장텐트를 보니 하나님께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다윗의 생각이 어디로부터 출발하였는가입니다.

다윗은 지금 보이는 자리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화려한 궁에 살지만 하나님은 텐트에 살고 계시다는 일차원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에서 의미심장한 구절이 있습니다.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사게 하신 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살면서 급박하고 간절한 시기가 아니라 등이 따뜻하고 배가 부른 시점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고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에 있는 감정과 생각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그 마음에 있는 것을 잘 분별하지 못 하였고, 하나님이 사는 곳과 자신이 사는 곳을 1차원적으로 비교하며 하나님이 계신 곳이 덧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텐트에 사시는 이유를 전혀 고려하지 못한채 하는 얄팍한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그의 느슨해진 영성은 더 뼈아픈 타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어쨌든 오늘 다윗의 생각은 기특하지만 성숙하지 못한 생각이었고,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해주십니다. 7절입니다. 

7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하나님은 본래 이스라엘과 함께 광야생활을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만들어 그곳에 임재하겠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하시기 위해 휘장텐트에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도 하나님을 위한 신전을 지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방인은 신을 생각하기를 위대한 신전이 있어야 신이 기뻐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우상은 공간필요합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에게 신전의 모양과 크기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 있기 위해 하나님은 모세에게 휘장을 지으라고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함께하기 위한 표징으로서만 기능할 수 있는 것이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의도와 뜻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제멋대로 하나님의 현재상태를 덧없게 판단하면서 제멋대로 하나님을 위한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3절에서 보니 왕의 최측근에서 멘토역할을 해주던 영적지도자 나단선지자도 이에 대해서 반대없이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3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그대로 행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나의 마음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은 타락했고 나면서부터 악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악한 우리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계속 다시 지금도 부어주시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지,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못된 생각이 우세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믿기보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기억할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4절입니다.  

4그 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5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멈추라"는 겁니다. 다윗의 역할은 여기까지다라는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여기까지인 것입니다. 다윗처럼 기적과 같은 은혜로 기뻐하며 하나님의 집을 지으려했던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를 살았던 베드로가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대선지자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나누시는 것을 보면서 세사람을 위한 집을 짓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의 상태에 대해서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33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신이 없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1절에서 다윗이 평안한 상태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집을 짓겠다는 일이 무슨 일인지 알지도 못하는 것이나, 베드로가 그러한 것이나 하나같이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하는 말들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다윗의 이러한 행동이 극악무도한 죄악이거나 고집과 아집으로 가득 차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린다던지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멈출때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분수를 알아야 멈출 수 있다"는 것이겠죠. 

 

2) 내가 하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왜 멈추라고 하셨던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하나님께 이미 다 계획이 있으셨다는 것이 정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에 다윗에게 멈추라고 하셨던 것이지요. 11-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1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12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해주십니다. 간단하게 다윗은 멈추어라, 여기서부터는 너를 선택하지 않고 너희 후대를 선택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11절 하반절에서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겠다라는 표현에서 하나님의 의도가 분명하게 보입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무언가를 한다고? 아니다. 내가 그간 너를 위하여 섬겼고, 앞으로도 너의 인생을 위해 내가 섬겨줄 것이다. 네가 날 위한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한 집을 짓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짓는 집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3-14절입니다.  

13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14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4절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짓고자 하는 집은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과 집을 짓는데, 아버지와 아들관계가 머무는 집을 짓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신과 인간이 "부자지간"이 되는 관계입니다. 그 관계는 어떤 관계입니까? 무언가 잘못을 하면 벌을 주고 지옥에 보내는 관계입니까? 15절에서와 같이 "은총이 사라지는 관계"가 아닙니다. 용서와 회복의 관계,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관계의 집을 짓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한 가지 듭니다. 이게 나랑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겁니까? 여기서 우리 기독교의 정수가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과 하나님의 연결고리를 어디서 찾으시겠습니까? 단순히 여러분이 생각하는 막연한 믿음에서 연결고리를 찾으시면 안됩니다. 성경은 그 연결고리를 믿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텐트를 지으셨던 이유를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기 위해서"라고 소개해드렸지요. 하나님은 텐트에서 성전을 언젠가는 다윗의 아들을 통해서 짓겠다고 하시는데, 그 이유는 동일합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텐트는 이동하는 이스라엘과 함께 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성전은 이제 이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과 함께 하기 위한 수단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하는 관계가 의미심장한 단어로 표현하셨습니다. 14절을 보니 하나님이라는 신은 다윗이라는 인간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러니까 신의 아들을 삼는 표시로 "성전"을 짓자고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성전을 통해서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말이죠. 부자지간을 표시하기 위한 성전을 짓겠다고 하시는 놀라운 선택이 있으니, 다윗에게 멈추어라, 너에게 성전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니 다윗은 "선택받지 못한 기쁨"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휘장텐트나 성전은 그런데 사실 예고편이에요. 하나님이 그로부터 1천년이 지나서 이 성전을 허무시고 살아있는 성전을 주십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계신 예배당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인 사람"을 보내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본체에서 나온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세우십니다. 다윗 때에는 성전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이 부자지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면,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과 사람이 부자지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래요. 성경은 계속에서 하나님은 여러분과 부자지간이 되기 위해 애쓰시고 노력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후에 다시 이 성전이 바뀝니다. 한 사람에서 모든 신자가 성전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예수 한사람에서 모든 신자에게 임하셔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 계셔서 우리를 성전으로 삼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을 보면 하나님과 사람이 부자지간이 되었구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을 보면서 하나님의 자녀구나, 하나님이 보살피는 자녀구나라는 확신이 있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내 인생을 보면서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이 돌보는 자녀인가? 그 확신을 계속 받으시면서 신앙생활 하셔야 합니다. 당연히 이 질문이 없는 사람은, 다른 무엇인가에 묻고 있겠지요. 나의 돈은 나를 돌봐주고 있는가? 나의 부동산은 내 노후를 돌봐줄 것인가? 각 사람은 각자가 믿는 그것에게 묻기 마련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 마음에 계시는 하나님께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3) 분수를 아는 은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선할 것이고, 그것은 내가 선택받지 못한 하나님의 뜻일지라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에게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영성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지 않으시는 기도제목 가운데 기뻐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지혜와 계획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계획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나단은 다윗에게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허용시켰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과 허락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아는가 모르는가가 중요하겠습니다. 다윗은 그것이 아들에게 주어졌음을 깨닫고, 미래일과 큰일을 알았음게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의 자녀에게, 여러분의 다음세대에, 미래에 하나님이 이 땅을 어떻게 이끌어가실 것인가에 대한 확신과 기쁨이 있으십니까? 

이번 한주간 카카오, 파리바게뜨 spc, 푸르밀 기업들의 뉴스를 봅니다. 정치권에서는 양진영이 협치보다는 서로를 짓누르기 위한 노력들이 더 보입니다. 과연 이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미래를 꿈꿀 수 있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시라면 그 안에서도 전능하신 "선함'을 창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속도,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방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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