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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_G/에세이

쇼핑몰과 목회자

by 우루사야 2023. 12. 25.

손흥민 선수는 올해부터 토트넘 핫스퍼 팀주장을 맡으면서 한가지 변화를 주었습니다. 매경기마다 경기장을 찾아준 팬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팀 전체를 이끌고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는 오랜만에 복귀한 선수나 슬럼프에 빠졌던 선수, 축하할 일이나 격려가 필요한 선수를 앞세우며 박수와 격려를 받게 만듭니다. 팬이 없다면 축구팀도 없다는 신념에서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타인의 관심을 받으며 유지해가는 직종일수록 타인의 관심을 당연시 여기지 않으려는 노력은 오히려 겸손이라는 성품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목회자의 경우는 특수한듯 합니다. 목회자야 말로 매순간 무대 정중앙에 서게 됩니다. 예배당에서나 가정심방, 때때로 장례식장에서까지 목회자는 관심의 정중앙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목회자를 바라보는 청중을 목회자는 팬으로 여겨서는 안된다고들 말합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죠.

"7이들이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을 두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8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9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다. 이 사람을 두고 성경에 기록하기를,10'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 하였다."(마11, 새번역)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두고 그간 선지자보다 가장 복음에 가까운 은혜를 받은 자로 높이시면서, 그런 자는 왕궁에 있지 않다고 말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런 자는 광야가 어울린다는듯이 말씀하셨죠. 복음서들도 요한을 묘사할 때 "4요한은 낙타 털 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다. 그의 식물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마3, 새번역)라고 말하면서 광야에서 생활했음을 간접적으로 묘사했지요. 그렇지만 세례요한이 광야에 있었다고 해서 교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5그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부근 사람들이 다 요한에게로 나아가서,
6자기들의 죄를 자백하며,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7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마3, 새번역)

세례요한에게 사람들은 몰려들었고 그 당시 최상류층의 유대종교지도자들까지 올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요한에게로 나아왔다"는 것에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팬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가까이 나아가지 않았고, 그들이 세례요한에게 다가왔다는 것이 주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그 반대의 방향성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이 되어 오셨지, 인류는 예수님에게 나아가야 한다는 "가장 중요한 한 발자국"을 남겨둘 정도로만 가까이 오셨습니다. "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 

기업은 고객에게 가장 친화적인 길이 무엇인지 고민을 합니다. 쇼핑몰은 고객의 쾌적한 쇼핑을 위해 조명과 동선까지 신경씁니다. 교보문고가 후각을 위해 교보문고 향과 그날 날씨에 따른 BGM을 고르기 위한 직원을 둔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 친절이 구매를 끌어내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차치하고서라도, 분명히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상대인 인류를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목회자는 성도에게 친화적이어야 한다는 말의 의미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지 고민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각 교회의 정서, 지역의 특색 등을 고려한다면 개교회마다 그 기준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히 "죄인의 회개와 구주를 향한 영접"의 발걸음까지 목회자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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