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AYAMEMORY
주제설교_F/절기설교

성탄절(4)히브리서_왕과 제사장

by 우루사야 2023. 12. 24.

본문 : 히 7장 11-17절        제목 : 왕과 제사장

1. 서론
1) 예화 

다다익선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의미죠. 반대로 과유불급은 과하면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의미죠. 여러분은 요즘 어떤 사자성어가 더 와닿으십니까? 무엇이 더 옳다라고 말하기는 힘들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과유불급이 많이 떠오릅니다. 목사로써 넘처나는 신학적 자료를 가지고 설교를 준비할 때나 부모로써 주어지는 육아 또는 교육정보는 판단을 내리는데 있어서 오히려 방해가 되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내가 좀 더 살펴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 좀 더 찾아보면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선택과 판단에 있어서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럴 때일수록 '키포인트만 알 수 없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많다는 것은 그만큼 부족함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하나로 충분하다는 것은 그 하나가 얼마나 충실하고 대단한지를 말해줍니다.

2) 신앙
신앙이라면 더욱 그러해야겠죠. 우리 목사님께서 만드신 전도지에 보면 100-1=0, 1+0=100이라는 수식의 전도지가 있었습니다.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예수는 그런 존재입니다. 예수라는 기준 하나면 우리신앙은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를 더 알고 또 배워야 하겠습니다.
요즘 유튜브에서 기독교영상들을 보면 2가지 양상이 나타납니다. 첫째, 개인적인 간증. 둘째, 비목회자. 문제는 이 두요소가 교회에서 공적인 설교 또는 메시지로 전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때문에 굉장히 자극적이고 판단기준이 모호한 이야기들이 설교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유튜브에서 설교를 들으실 때 유의하셔야 합니다. 재미로야 들을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것은 또 다른 우리 신앙중심의 문제입니다. 연예인이 성경이야기한다고 믿을만하다고 판단하시면 안됩니다. 또 10만유튜버 집사님의 성경공부가 요즘 인기인듯한데 우리장로교 이웃교단에서 성경해석에 이단성을 확인했습니다. 또 유튜브에서 가장 많은 조회수를 올리는 것이 기독교채널 간증프로그램과 큰교회에서 하는 간증기도회입니다. 물론 간증을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단단한 음식으로 장성한 자가 되어야지, 자극적인 외식으로는 결코 장성한 영성을 키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주된 메시지는 예수에 대해 알려주는 성경이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성탄절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의미하죠. 그런데 히브리서는 특이한 표현을 해줍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라는 표현입니다. 반차는 계통을 의미해요.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계통이 멜기세덱계통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렇게 예수는 어떻게 태어나신건지 함께 살펴보시며, 예수에 대해 더 잘알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멜기세덱 계통, 예수
그럼 예수의 출신에 대해서 좀 살펴보죠. 예수 국적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에도 우리나라처럼 본적을 따지는데, 어디 ~씨 ~파 몇대손처럼 이스라엘도 12지파가 있었고, 예수님은 그 중에 리더역할로 왕을 감당하고 있었던 유다지파출신이었습니다. 어쨌든 유다지파를 비롯해 각 지파는 각자 땅을 분배받아 그곳의 자치권과 통치권을 스스로 획득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역할에서 제외받은 지파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제사장직을 맡고 있었던 레위지파였습니다. 이 지파는 땅을 받지 않았기에 먹고 살기 위해서 형제지파들의 십일조와 제물을 통해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자, 이렇게 이스라엘에 대해서 잠시 살펴봤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말을 한번 들어보죠. 11절입니다. "11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이 사람이 레위지파의 제사장직 계통은 모형으로써 온전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만약 레위지파가 모형이 아니라 실체였다면 예수는 레위지파에서 태어났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오히려 멜기세덱의 반차, 멜기세덱계통의 모형일뿐 진짜는 멜기세덱계통에서 태어난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6-7절을 보시죠. "6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7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게다가 레위지파는 가장 높은 역사성을 가진 것도 아닌 것이 레위 위에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있고,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레위지파는 모형이고, 진짜는 멜기세덱계통이라고 결론맺습니다.


그럼 이렇게 질문해볼까요? 하나님은 예수를 편하게 레위나 아론과 같은 정통적인 제사장 지파에서 태어나게 하시지, 왜 멜기세덱 계통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일까?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여러분, 참다운 리더는 두 가지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먼저 리더로써 옳은 것을 말할 줄 알아야 하며, 두번째로 그 옳은 것으로 멤버들을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두가지 중 한가지라도 결여된다면 그것은 좋은 리더가 아니겠지요. 말뿐 능력이 없거나, 능력은 있지만 옳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자, 하나님은 예수님이 먼저 육신적으로 유다지파에서 태어나게 하심으로써 "왕으로써 리더지파"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멜기세덱 계통으로 태어나셔서 "선과 악함을 다룰 수 있는 제사장직"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옳고 그름을 말하며 왕으로써 다스릴 수 있는 두 가지 직분을 가질 수 있는 계통으로 오셨다는 것이죠. 1절입니다. "1이 멜기세덱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1절에 멜기세덱은 왕이자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두 직분을 맡을 수 있는 지파는 없었습니다. 네, 육신의 세계에서는 불가했습니다. 네, 멜기세덱 계통은 영적세계에서 내려온 계통입니다. 예수는 왕이자 제사장으로써 우리에게 오셨기에, 우리는 이 분 한 분만으로 충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예수의 모습입니다.
2) 인간이 따르고픈 계통
기독교 철학자 C.S. 루이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결코 만족될 수 없는 갈망이 내 안에 있다면 그것은 내가 다른차원의 세상을 위해 지어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으면 됩니다. 졸리면 자면 되지요. 그런데 영혼의 갈망은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가 않습니다. 영혼의 문제는 영적세계에서 해결을 봐야 하는데, 예수를 모르니 채워지지 않는 것이죠. 마침내 인간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멜기세덱 계통이 되어 제사장도 되고 왕도 되려고 해왔습니다. 

 

영원을 갈망했던 진시황, 자신을 신으로 숭배케 했던 로마황제 시저, 태양신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을 신성화했던 애굽의 황제들. 왕이면서도 옳고그름의 기준이 되어 제사장 또는 신이 되고자 했던 이들이었습니다. 현대정치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요. 북한의 김정일은 김일성과 자신의 사진을 온곳에 걸게 했고, 김정일의 날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는 여러 대통령들이 무력으로 권력을 차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직임을 불법적으로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왕으로써의 힘과 그 힘을 계속 유지하게끔 하는 영원성은 인간본능인 것입니다. 종교계에서 나타나는 사이비 교주들의 대부분의 공통점은 결코 민주적이지 않고 폭력성을 가지며 더 나아가 자기자신을 신성화시킨다는 것에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도 힘을 통해서 평온하고자 하는 갈망이 있고, 그 평온이 계속 유지되었으면 한다는 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갈망은 인류시초부터 등장했습니다. 창세기 3장을 잠깐 보시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반한 뒤입니다. 21절에 보니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시고 가죽옷을 친히 만들어 입히십니다. 그럼에도 혼내실 것은 혼내시는데 23절에 보니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시고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냐? 22절에 보니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두가지 때문이었습니다. 첫번째,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모르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악함을 알게 되어서 선과 악이 무엇인지 구분하고자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하시는 것인데 이들이 침범한 것이지요. 선악을 안다는 것은 이들이 감당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능력이 없는데 침범했으니 이들의 나중은 처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연스레 소멸해가는 인간으로써 영원히 살고 싶어할 욕구도 생겼을 겁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영생나무도 침범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질서가 모두 어그러지고 깨져버릴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을 내쫓으신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류의 아버지가 되고자 하셨습니다. 20절을 보시죠. 다른 구원의 계통을 만드신 후에 내쫓으신 것입니다. 바로 가죽옷입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그들을 옷입히시는 은혜입니다. 옷 입히시고 내쫓으신 것이에요. 다른 누군가가 왕이자 제사장으로, 선악을 대신 판단해주고 선한 길을 영원히 걸을 수 있도록 보호해주고 승리케 해줄 희생의 리더를 보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3) 적용
얼마 전에 제 자녀 친구들이 저에게 와서 자녀를 칭찬을 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흡족하다 못해 평안하더군요. 마치 내가 잘 살아온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금새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날 숙제를 안하고 핸드폰하면서 과자를 바닥에 흘리면서 먹고 있는 모습에 제가 분노하고 있더군요. 인간에게 구해서는 안될 기대와 충족을 구하는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저의 모습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겁니다. 여러분도 그러시죠? 이 땅에서 구해서는 안될 영원한 평안을 내가 가진 부동산, 주식, 아들딸, 부모님, 배우자, 우리교회 목사님과 교우들, 정치인, 노후보장제도에게 구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그것들이 계속 우리에게 주는 실망이 눈에 뻔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또는 그것들에게 나는 자꾸 책임을 덧입히며 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요즘 우리사회가 점점 도드라지는 양상 중 하나가 인간에게 덧입히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입히는 것을 봅니다. 특히 정치에서 그러한듯 합니다. 여러분. 정치인은 결코 왕이 아닙니다. 그리고 왕이라 할지라도 그 왕도 인간인지라 병들고 잘못 선택합니다. 하물며 민주사회에서의 정치인은 덜하면 덜 했지 더 할 수 없음에도 우리는 내가 지지하는 정당의 인기정치인은 마치 온전한 인간이라도 된 것 마냥 여기며 상대당의 정치인은 괴물대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가족, 배우자, 자녀들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을 인간일 뿐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예수입니다. 그 예수를 보고 우리의 가족과 이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왕이자 제사장되신 예수를 통해 평안과 영원을 누리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3.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곧 예수 그리스도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 여러분, 교회는 이제 제사를 드리는 곳도 아니고, 옳고 그름을 판단받는 재판장도 아닙니다. 예수가 감당하고 계시고, 그 예수의 영이 우리의 마음에 계십니다. 그럼 교회는 무얼하는 곳일까요? 저는 교회가 마치 집같습니다. 보호를 받으며 평안을 누리는 곳. 네, 교회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어머니 공동체가 있는 곳입니다. 
저는 목회를 할 수록 교회는 집처럼 느껴집니다. 목회를 회사의 프로젝트처럼 대했던 제가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아침잠을 깨우는 매일같이 들리는 밥솥소리와 도마두드리는 소리,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티비를 보며 귤을 까먹으면서 드라마를 보는 가족들, 방에는 형제자매가 이것은 내것이라고 투닥거리는 소리. 우리의 추억과 기억을 돌아보면 이런 소리들과 함께 우리의 감정에 따듯함을 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매일같이 들리는 예배시작 종소리와 찬양소리, 교제식당에서 들리는 탁구소리와 함께 밥을 먹으며 대화하는 소리, 저편에서는 어려움을 당한 성도를 위해 손을 붙들면서 기도해주는 소리. 그것이 우리의 영성입니다. 그리고 그 영성에는 다른 큰 프로젝트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신학자나 목사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 한분을 품고 내 자리를 지키며, 예수의 태어나심을 찬양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