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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_F/부활에서 시작하자(눅24)

애프터부활절(3) 증명되는 삶

by 우루사야 2023. 4. 30.

제목 : 증명되는 삶
본문 : 누가복음 23장 34-37절
 
1. 서론
1) 질문과 답
이 세상에는 탁월한 질문으로 인류발전을 이루게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과는 왜 아래로 떨어지는가 질문하기 시작한 뉴턴을 통해 우리는 만유인력을 이해하여 바다의 조수간만의 차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물건을 팔면 된다는 현대자본주의 흐름에서 "우리는 왜 이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질문이 정답보다 중요하다. 내가 만약 1시간 후에 죽는다면, 나는 55분을 질문을 찾는데 할애할 것이다. 올바른 질문은 답을 찾는데 5분도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2) 예수는 경험하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는 살아있는가?" 그런데 이 질문은 사실 우리에게 만족스러운 답을 내리게 해주는 좋은 질문이 되지는 않는듯 합니다. 그렇다면 더 좋은 질문이 필요합니다. "예수는 왜 부활해야만 했는가?" 이 질문은 우리 인생의 수많은 질문들에 답을 내줄만큼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림으로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만드셨고, 예수는 왜 인간이 되어야만 했으며, 성령이 왜 또 어떻게 우리에게 존재하는지, 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인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진리로 우리를 인도해줍니다.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단순한 질문으로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를 찾을 것이 아니라, 왜 신은 죽었다가 살아나야만 한다고 성경이 말하는지에 대해서 물을 수록 우리는 놀라운 신앙의 답변들을 얻게 됩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기록하면서 예수가 등장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나타나도 제자들의 눈을 가리게 한 채로 "고난을 받은 후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는 부활원리”를 가르쳐왔음을 말해줬습니다. 의심하는 입장에서 확인하는 관찰자가 될 것이 아니라, 예수의 약속을 믿는 신뢰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요20:29)라고 하셨죠.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원리라는 답으로 두고, 우리 곁을 떠나실 수 있었죠. 인류는 예수가 없는 채로 이 땅에서 부활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면서 2000년 동안 교회를 키워나가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나가며, 이 지구 곳곳을 복음화 시켜왔죠.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를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또는 부활을 믿지만 내가 원하고 상상하는 예수를 그릴 것이 아니라 태초전부터 또 성경 내내 약속되고 계획되었다는 “낮아져서 죽으시고, 높아져서 부활하신 예수”를 믿어야 하겠습니다.
 
3) 본론잇기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은 여인들과 여러 사람들이 예수가 부활했다는 증언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봐야 믿겠다는 것이죠. 그들의 질문이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는 이들에게 동일한 방식, “예수는 왜 부활해야 하는가”라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들의 질문을 바꾸시었고, 마침내 그들이 “참된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써 오늘 예수님께 알려주시는 참된질문으로 우리도 참된 증인이 되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봐도 의심하는 인간, 증명자체가 불가한 우리 존재
36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37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38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의 부활을 믿었지만 자신의 때에 부활해주지 않은 몇몇 제자들이 예수님께 실망하고 예루살렘 예수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시되 눈을 가리심으로 그들의 주장과 편견을 죽이시고, 부활원리를 가르치신 후에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말씀과 부활원리라는 진리로 충만해진 그들은 뜨거운 가슴을 안고 예수공동체로 돌아와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그 말을 할 때에가 바로 36절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을 한번 보십시오. 놀라고 무서워하는데 그 이유가 "영"으로 생각, 그러니까 유령으로 귀신보듯이 본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의 "두려움과 의심"을 질타하십니다. 요한복음을 보니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잡으러 올까 두려워서 모든 문들을 다 닫아놓고 있었다고 말해줍니다.(요20:19) 그런데 예수님이 문을 열지 않고 영화에서 유령이 벽을 통과하듯이 오시니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가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의 나타나심을 아무리 말해줘도 믿지 않았다고 말해줍니다.(막16:14) 지금 11제자들은 예수의 살아나심도 못믿고 있었거니와 예수가 나타나셨어도 유령으로 취급하고 있었으므로, 부활이라는 것을 두고 "귀신빙의"정도로 생각하며 초자연적일로 치부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살아났는가?" 그들은 오로지 예수가 살아났는가에만 주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가 살아났다는 소식만으로는 믿지 못합니다. 살아났다면 자신들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령으로 의심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그들에게 만져보라 하십니다. "39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4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41a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제자들에게 처음에는 소식이라는 간접적인 청각증거, 두 번째는 나타나심이라는 직접적 시각증거, 세번째는 만져봄이라는 촉각적이고 인격적인 가장 직접적인 증거가 제공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간입니다. 여러분 눈 앞에 아무리 초자연적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또 다른 근거를 찾으려 할 것입니다. 마치 사랑을 자꾸 확인하려는 연인처럼 말이죠. 우리도 하나님께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은혜받아서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고 내 인생 지켜주고 계심을 믿었다가도, 금새 잊어버립니다. 재물 유혹에 금새 빠져버리고, 타인과의 갈등에서 결국 이겨버리고 싶고, 쉽게 분노하고, 음란이 채워지지 않으면 공허하며, 저 위치에 앉지 않으면 내 인생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나는 금새 고아와 같이 의지할 것 없는 초라한 모습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왜 입니까? 인간은 답을 가지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답을 외부로부터 얻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좋은 질문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꾸 정답을 가지려 했습니다. 질문없이 정답만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정답이 주어지고 또 주어져도 공허한 것이죠. 중요한 것은 ”질문“입니다. ”왜 예수는 살아나야 하는가? 나에게 왜 부활예수가 필요한가?“ 여러분이 이질문이 아직 스스로에게 들제 않는다면 내가 믿고 있는 예수가 성경의 예수인지 돌아보셔야 합니다.
2) 증명하시는 예수
질문없이 정답만을 가지려는 제자들을 예수님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41b부터 보시죠. "41b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42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43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첫번째, 엠마오 제자들에게 하신 것과 같이 눈을 가리시고 그들이 원하는 예수상을 깨부수셨듯이, 11제자들의 편견을 깨시려고 예수는 문이 닫힌채 들어오셨습니다. 일부러 유령처럼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서는 그들의 편견을 깨시려고 만지게 하시고 또 식사까지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39b)고 설명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설득하고자 함이 아니십니다. 그들의 편견을 깨부수시는 과정이신 것입니다. 특히 도마는 ”못 박힌 손과 발을 보아야 믿겠다“라고 까지 했지요. 그런 그들에게 예수는 유령처럼 나타나셔서 식사까지 하는 모습을 일부러 보이시며, ”부활체“가 어떤 모습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십니다. ”너희의 수준낮은 질문의 답이 되는 부활예수의 모습을 부셔라, 나는 더 놀라운 모습으로 너희에게 나타났다. 더 고차원의 질문을 던져야 지금 내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두번째,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러 온 여인들에게 천사가 했듯이, 또 예수부활을 믿었지만 포기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하신 것처럼 부활원리를 가르치십니다. "44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45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46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옳은 질문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살아났는가라는 질문은 신비한 부활체를 보여줘도 못 믿습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겹지만, 반복되지만, 똑같지만! 성경이 강조하는 “예수가 살아낸 부활원리”를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죽은 후에 어떻게 나타나실지에 대해서 양과 염소비유에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예수는 굶은 사람으로, 떠돌이로, 병든 자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 격리된 자로, 사업이 망해 헐벗은 자로 나타날 것이라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말씀하시며, 이들을 섬기기 위해 같이 낮아진 자들에게 "나를 섬겼으니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라고 하셨고, 낮아지지 않은 자들에게는 "나를 섬기지 않았으니 마귀와 같은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낮아져야 예수가 보입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섬기고 희생하고 사랑하려고 나가야 예수가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부활원리, 죽어야 살아나는 그 법칙대로 살아야 예수가 보이고,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를 접대하고,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서 예수에게 대접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간단하고 심플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했던 예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입니다. 나의 욕망, 욕심, 욕구로 가득찬 상태로 그것을 들어줄 예수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곳에 예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높아지고자 하는 삶에는 예수는 없습니다.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하고 사랑하는 인생에 예수가 나타나고, 그 예수가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3) 증명되는 삶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복음서들은 각각의 결론부를 가지고 예수의 부활사건을 마무리 짓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4복음서 모두 “증인이 될 것”을 말해줍니다. 마태는 가르쳐 증인을 삼으라고 했으며, 마가는 믿는 자의 증거가 나타날 것이라 했으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 “내 양을 돌보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모두 예수의 부활을 살아내는 증인이 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누가는 어떻게 살라고 말해줄까요? 마지막 47-48절입니다. "47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49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예수는 제자들을 다 가르치신 후에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뒤집어졌습니다. 높아지는 인생이 판을 치던 세상에 다른 기류가 흐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낮아지며 회개하며 낮은 자들과 함께 하는 인생의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두 번째, 낮아져서 높아진 부활한 예수를 보고 경험한 자들은 함께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인들에게는 "약속된 위로부터 주어질 능력, 즉 성령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세상의 판도가 바뀌었음을 깨달은 사람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성령과 능력이 이미 여러분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바뀐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곳곳에서 묻고 답하셔야 합니다. "예수는 왜 살아나셨는가? 지금 나의 가정에서 왜 살아나셔서 함께 하시는가? 내 직장에서 왜 살아나셔서 함께 하시는가?" 그 질문을 던지시면서 낮아지실 때 여러분은 예수를 확인하게 되실 겁니다.
 
이번에 우리나라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의회에 가서 연설을 했지요. 뉴스는 그 소식을 전하면서 꼭 이런 표현을 합니다. 어떤 단어를 몇번이나 썼는지를 말이죠. 그렇습니다. 자꾸 반복하고 계속 사용하는 단어나 표현에는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계속해서 "부활원리를 확인하고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증인이 될 수도 없고 또 성령의 임재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낮아지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교만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었는지 말씀드렸습니다. 그 반대인 겸손은 교만이 136회인 것에 반해 40회밖에 안됩니다. 왜 입니까? 낮아져 겸손해지는 수 많은 표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순종하며, 경외하고, 두려워하며, 사랑하고, 찬양하며, 기도하고, 기뻐하며, 인내하고, 절제하며, 충성하고, 온유하는 것들. 모두 하나님께 낮아지고 이웃에게 낮아지는 것들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낮아지면 예수가 보이고 성경이 약속하는 축복들이 따라오게 됩니다. 그 길을 향해 우리 다 함께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3.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리처드 도킨슨이라는 유명한 무신론자인데,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에서 그는 “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인간의 능력을 주목하라!”라고 말합니다. 신이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니 과학적 실험이 불가한 영역에서 답을 찾지 못한 인류의 많은 예시를 들며 결국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목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인도합니다.

질문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은 왜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가? 예수는 왜 히어로로 나타나지 않고, 눈을 가리고, 우리가 이해못할 부활체로 왔는가? 그리고 왜 사라졌어야만 하는가?” 성경은 신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해주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이 그렇게 일하셔야만 했는지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좀 더 성숙한 질문에서 시작해야겠습니다. 왜 예수는 살아나셔야 했는지에 대한 대답을 각자의 영역에서 고민하시고 그 답을 찾아 은혜로 살아내시는 저와 여러분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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