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AYAMEMORY
주제설교_F/부활에서 시작하자(눅24)

애프터부활절(2)

by 우루사야 2023. 4. 22.

본문 : 누가복음 24 25-27
제목 : 눈을 가리우시는 예수님

 

1. 서론
1)
예화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표현이 있지요. 무언가에 홀려 정신을 잃다, 무엇에 덮이거나 가렸다는 의미입니다. 보통 사랑에 빠질 쓰는데, 셰익스피어는 베니스상인에서 "Love is blind"라고 쓰면서, 표현이 지금까지도 우리가 많이 쓰는 표현이 되었죠. 영국의 안드레아 바르텔 교수팀이 연구한 결과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비판적 사회평가를 내리는 뇌신경조직이 억제된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호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페닐에틸아민 호르몬 분비가 높아져 우리 몸의 대사 곳곳을 흐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럴 쾌감을 담당하는 중추는 굉장히 활성화되어 기분이 극도로 좋아지죠. 또한 인지능력에도 영향을 주어 이성적 판단을 없게끔 만든다고 하네요.

2)
주제
그런데 사랑의 대상이 타인이 아니라 자신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을 향한 과도한 사랑 또는 우상숭배도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나아가 눈에 콩깍지를 씌우게 합니다. 눈이 가리워지게 합니다. 결과 자신에 극도로 몰입한 나머지 내가 원하는 결정이 내려지면 핑크빛 세상이 되고, 내가 원하지 않는 상태가 되면 잿빛세상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것을 정신의학에서는 자기애성 인격장애, 여러분이 아는 표현으로는 나르시시즘이라고 부르죠. 경중에 차이는 있겠으나, 성경은 부분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할 정도로 우리에게 주의를 요청합니다. 성경 전체에서 132회나 사용되었고 단어를 사용한 책이 신구약 32권에서 골고루 사용하고 있는교만이라는 단어입니다. 스스로를 높이는 마음가짐이나 행위를 말하는데 잠언은 직접적으로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29:23)라고까지 말합니다. 자신을 향한 과도한 사랑이 되었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가장 죄악 있는 것이죠. 


3) 본론잇기

지난 주에 에베소교회라는 대형교회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측근 제자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서미련하고 더디 믿는 자들아!”라고 질타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나 엠마오로 가는 제자가 결국신앙의 첫단추 제대로 끼우지 못해 신앙적으로 질타받고 있는 형국인 것이죠. 그렇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신앙연수가 길고, 교회 봉사가 많고, 성경적 지식이 많아도 결국 "부활원리로 세상은 돌아가며, 부활원리로 예수는 살아계시다"라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도 에베소교회나 엠마오 제자와 다를 없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부활을 믿지 못하는 "눈이 가리워진 제자들이 등장합니다."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알아보지 못하거늘" 그런데 예수님과 만난 후에 그들이 어떤 변화를 가지게 됩니까? "31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과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길래 그들의 눈이 다시 밝아질 있었고, 가슴이 뜨거워질 있었고, 나아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부활증거하는 증인으로 변화되게끔 하셨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살아계신 예수와 부활의 원리로 높아지시는 저와 여러분되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콩깍지를 인정하는가

예수님의 부활이야기를 누가복음 24장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는데, 지난주에 하나님은 나사로처럼 예수님을 신비한 모습으로 부활하게끔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가 살아날 것이라는 부활원리를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누가는 부활사건에서 번째로 엠마오로 가는 제자를 등장시킵니다. 이들은 12제자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를 추종하며 따랐던 자들이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말씀을 들으며 간직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죽고 부활하지 않자, 그들은 실망하며 예루살렘과 제자공동체를 떠났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셨는데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셨습니까?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알아보지 못하 하셨습니다.(15-16) 예수가 이렇게 하셨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봅니다. 

 

일단 두제자의 신앙에 대해서 살펴보죠. 예수에 대해 무어라 말합니까? "19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21우리는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예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굉장했던 이들로써 예수를 평범한 사람으로 보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예수가 3일만에 살아나 엄청난 일을 것이라고 믿었다는 증거로,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천사를 여인들의 이야기,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베드로와 요한이 빈무덤을 보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최소한 예수가 죽고 3일째 오전이 될때까지 소망을 잃지 않았던 이들이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에서 3일장을 치른 다는 것은 "영혼까지 떠난 완벽한 죽음"으로 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무덤에 장사를 지내려 여인들과는 다르게 "예수의 부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3일째 해가 중천에 가까워질수록 이들의 믿음도 약해지기 시작했던 겁니다. "13-14 날에 그들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예수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린채로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났던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지점을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지난 주에 여인들은 예수의 부활약속을 기억하지도 믿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장례를 치르러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엠마오의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대치에 다다르지 못하니 이내 믿음을 잃어버리고야 말았습니다. 여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질타를 받았다면, 지금 제자들은 약한 믿음에 질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해지는 이유는 "나의 기준과 기대"라는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모습으로 부활해야 하는 예수인데 그렇지 않았던 겁니다. 살아생전에 백성들 앞에서 종교지도자들을 엄청난 논리와 발언으로 입을 잠가버렸고, 기적들을 베푸시면서 천국을 보여주었던 예수였습니다. 그가 마침내 부활만 해준다면, 예수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다시 세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자신만의 콩깍지를 쓰고 있는 자들에게 나타나지 않으려고, 그들의 "눈을 가리운 채로" 그들에게 등장하셨던 겁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질타하십니다.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미련이라는 단어를 다른 번역에서는어리석다, 멍청하다라고 말해줍니다. " 놓고 기역자 모른다" 속담이 맞는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제자들을 향해 질타하는 자가 바로 이야기의 주제였던 예수 당사자아닙니까? 신앙이 열심이 있어도 미련하고 멍청하다 못해 예수를 앞에 두고도 못알아 정도이니 말이죠. 열심히 사역해놓고 첫사랑 첫단추를 잃어버려 질타받은 에베소교회, 부활원리를 잊어버려 기억하라고 혼난 여인들, 부활을 믿다가도 결국 자기 뜻대로 안되니 포기해버려 미련하다고 혼난 제자들. 지금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부활에 대해 나는 어떻게 믿고 있는지 다시금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의 처방, 눈을 가리고 뜨게 하는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십니까? 첫째, 눈을 가리우셨습니다. 둘째, 부활원리를 한문장으로 말해주십니다. 셋째, 부활원리를 지지해주는 성경근거들을 풀어주십니다. 그러니 그들의 심령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32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러니 그들의 발걸음이 어디로 옮겨집니까? "33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실망하며 절망하며 예루살렘을 떠났던 그들이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처방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 처방은 눈을 가립니다. 이상한 관점으로 바에는 아예 못보게 하신 것이죠. 이들이 아마 예수님을 알아챘다면, 자신들이 원하는 예수가 나타났다! 예수로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보자! 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예수는 그들의 눈을 가리우셨습니다. 그들의 욕망, 그들의 열정, 그들의 사고방식을 막고자 하셨습니다.
사람은 원하는 것이 생긴 순간부터, 세상을 내가 원하는 욕망을 중심으로 바라보고 해석하고 결정하고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성경적이지 않거나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가리우십니다.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다. 성공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맹인임을, 한치 앞도 바라볼 없는 이들임을 가르치십니다. "미련한 죄인아!"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눈을 가리우시고 "미련한 자들아! 더디 믿는 자들아!"라고 질타하셨던 것입니다. 처방을 내려주신 것이죠. 만약 내안에 부활한 예수가 없다면, 부활한 예수와 함께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여러분 심령에 꿈틀거리는 예수의 말씀이 없다면. 먼저 "내가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지, 흔들리는 갈대같은지, 죄가 많은 자인지, 교만하고 밖에 모르는 사람인지" 인정하셔야 다음에 예수가 보입니다. 예수는 건강한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병든 , 약한 , 죄인을 부르러 오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번째로 예수님은 어떤 처방을 내려주십니까? 부활원리를 문장으로 설명해주십니다.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 낮아짐으로써 높아져야 한다는 원리를 먼저 이야기하십니다. 너무나도 명확합니다. 사단이 말하는 바와 너무나도 명확한 구분이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높아져야 영광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죠.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인류를 위한 희생의 고난을 받고 순종할 " 하나님이 마련하신 영광의 자리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쉽게 이것이 받아들여지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목소리와 정반대의 원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도 원리를 믿지 못하니, 예루살렘을 떠나고, 부활소망을 잃어버리고, 슬픈 기색으로 나아갔던 아닙니까? 사실 예수가 떠나간 초대교회는 로마군을 이기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러 먼저 나가야 했던 겁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한교회가 지역을 먼저 섬기지 않는한 우리는 지역에서 부흥할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 직장,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부활원리 "낮아지면 높아지리라" 이것을 가르치고 살아내시는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세번째 처방입니다. 예수는 부활원리가 어떻게 증명될 있는지 "27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주일에 한번에 설교로 결코 여러분의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성경공부가 필요하다는 겁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태초에 부활원리로 하나님은 창조하셨고, 원리를 확인했던 모세, 선지자, 신앙의 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처럼 우리도 살아보라는 겁니다. 삶에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죠.
3)
다시 현장으로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가리고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처방은 슬픈기색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던 제자들로 하여금 다시금 일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망한 예수공동체로 말이죠. 로마군과 유대종교인들이 아직도 쫓아다니고 있는 망한 공동체로 다시 돌아갈 있게 확인케 하셨습니다.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세미한 소리, 하나님 나라의 원리" 일어나게 하시어,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왕이 되게 했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였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후계자 선지자가 되게 했습니다."(왕상19-20) 하나님의 원리를 이해하고 깨닫게 되니, 가슴과 마음이 "하나님의 뜻과 사명, 열정으로 뜨거워져 하나님의 뜻을 전하러, 증인이 되러 나아갈 있게 " 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현장으로, 삶의 터전으로 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와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죽기 싫다는 겁니다. 어떻게든 내주기 싫고, 내가 손에 쥐어야 하고, 직성대로 해야 풀리는 겁니다. 혹시 그렇게 여러분의 가정을, 여러분의 직장을, 여러분의 관계를, 여러분의 재정을 쥐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그럼 절대 부활은 없습니다. 죽어야 부활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생각을 죽여야 합니다. 손을 모으고 성질을 죽여야 합니다. 엉덩이를 앉히고 욕망을 죽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살려주십니다. 죽기 싫은 자신을 붙들고 첫번째 처방 "나는 절대 죄인이다!" 가르치십시오. 두번째 처방 "예수처럼 죽어야 산다!’ 가르치십시오. 세번째 처방 "삶에서 죽어서 부활을 확인하러 나가십시오!" 다시금 뜨거운 열정으로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며, 성령님과 동행하는 풍성한 삶으로 나아갈 있는줄 믿습니다. 


3.
결론
남송의 학자 주자는 "천하의 이치는 끝나면 다시 시작된다" 했습니다. 손자병법에는 "끝나면 다시 시작하는 것은 해와 달이 그러하고, 죽었으면 다시 살아나는 것이 4계절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린이집을 가는 길에 보면 아파트 담장으로 겨울에 메말랐던 나무가지에 초록빛이 가득한 이파리들이 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부활의 신비" 느껴집니다. 세상이 부활원리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그런데 나는 죽지 못하고 가지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며 나아가고 있습니까? 


나만의 콩깍지를 쓰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주님이 주실 있는 것은 눈을 가리우게 하시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것도 못보게 하실 겁니다. 우리는 멈춰야 하겠습니다. 기도의 자리로, 말씀의 자리로 나아가 "세미한 소리, 말씀"으로 우리의 가슴에 섬김과 희생, 사랑으로 우리를 섬겨주셨던 예수를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와 같이 죽으러 가자고, 섬기러 가자고 하실 순종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그러나 죽는 자에게 부활이 있습니다. 이번 한주도 가정, 직장, 일상에서 예수와 같이 섬김과 희생으로 죽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살리실 겁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