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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_F/부활에서 시작하자(눅24)

애프터 부활절(1) 첫단추

by 우루사야 2023. 4. 16.

제목 : 첫단추      
본문 : 누가복음  24:1-7

1. 서론 
한 해를 시작하거나, 또는 어떤 도전에 있어서 첫 발걸음을 뗄 때 사용하는 권면으로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고들 하죠. 영어권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는데, "제때 한번 바느질이 아홉번을 던다"고 하더군요. 빨리 가지 못하더라도 첫 손질 첫 발걸음을 제대로 내딛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가다 다시 돌아와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한다는 교훈이겠죠. 어른 아이 모두 좋아하는 조립장난감 레고가 그러합니다. 어떤 한 부품을 제때 써야 하는데, 비슷한 거 쓰다가 나중에는 조립자체가 어긋나서 조립했던 것을 다 해체하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죠.
우리네 인생도, 신앙도 그러합니다. 첫단추는 첫단추구멍에 알맞게 끼우듯, 알맞게 시작해야 합니다. 신앙연수만 더해가거나 교회 봉사횟수만 늘려가면, 나중에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그간 해온 것들에 가려 무엇이 잘못인지 알지 못하기까지 합니다. 결국에는 가까이서 단추 몇개 끼워진 것만 보고 괜찮다 생각하지만, 이내 남은 단추구멍을 의아해하며 전신거울로  보면 맨 위 구멍은 남아있고 맨 아래 단추는 안끼워진 채 우스꽝스러운 꼴로 서있는 나 자신을 확인하게 됩니다. 결국 다 풀고 처음부터 다시 끼워야하지요. 우리 수년의 신앙이 우스워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매순간 "신앙의 첫단추"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한 교회에게 이렇게 말하신적이 있습니다. "2나는 너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있고 또 네가 악한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고 자칭 사도라는 사람들을 시험하여 그들의 거짓을 밝혀 낸 일도 잘 알고 있다.3더구나 너는 잘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끝까지 견디고 지치지 않았다.4그러나 너를 책망할 일이 한 가지 있다. 너는 너의 첫사랑을 버리고 말았다.5그러므로 너는 어디서 잘못되었는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에 행한 일을 하여라. 만일 네가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겨 버리겠다."(계3) 굉장히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교회에 대해 평가하시길 행위, 수고, 인내, 의로움에 대한 분별, 예수 이름을 위한 헌신. 모두를 인정하십니다. 그런데 "첫사랑, 첫신앙, 순수한 신앙"이 없다는 것, 그래서 "어디서 잘못되었는가 생각하고 처음 행한일”을 회복하지 않으면 "네 촛대를 옮겨 버리겠다"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기회줄 때 처음부터 다시 단추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100년간 고도의 발전과 세계화를 경험하면서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대형교회"들을 목격하며 자라왔습니다. 그런데 어느샌가 모든 교회들이 대형교회가 목표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몇몇 대형교회는 처음의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 역사속에서 순식간에 사라진 것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기억합니다. 그런 점에서 위에서 언급된 에베소교회는 그 당시 가장 큰 교회 중 하나였음에도, "처음 순수한 사랑이 사라졌다면 사용하지 않을 교회"라고 예수님이 직접 못박아두셨으며, 현재 우리에게도 유효한 판단기준임을 유념하면서, 교회와 신앙의 첫단추가 무엇인지 고민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신앙 첫단추는 "부활"입니다. 교회와 신앙의 시작은 예수가 살아있다는 증언으로 시작했고 모였고, 그 증언에 따라서 예수를 따르는 모든 이들도 죽어도 살아난다는 그것이 교회의 첫사랑 첫발걸음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섬기기 위해 죽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웃을 섬기기 위해 죽어야 합니다. 예수따라 섬기다 살아나야 합니다. 예수님 부활현장을 누가복음 24장을 중심으로 3주동안 살펴보고, 4월은 교회 그리고 5월은 가정과 일상의 공동체에 대해서 살펴보며, 부활원리로 시작하는 교회공동체와 나의 가정공동체와 일상공동체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2. 본론
1) 천사를 등장시키신 하나님
살아생전 때, 예수님의 주변인물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어떤 이는 정치적인 영웅을 기대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신적 기적을 통한 종교개혁가를 원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새로운 교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겠지요. 또는 그냥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교제하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이들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의 모든 욕망이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항변하시지도 않으시고 너무나도 속전속결로 죽으셨기 때문이죠. 실망한 모든 사람이 떠나고 도망쳤습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이사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하시니 많은 이들이 실망하고 떠나갔습니다.(마22:22) 또 기적만 바라는 순수하지 않은 믿음을 지적하니 많은 이들이 떠나간 적도 있습니다.(요6:66) 그렇게 예수님은 살아있을 때에도, 또 죽어서도 계속 사람들이 떠나가는 인기없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는 사람수나 권력결탁을 통해서 “교회의 첫단추”가 끼워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는 우리가 보기에 좋은 것들을 다 버리고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가 죽은 이후의 사건이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 1-4a절입니다.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인것을 감추며 도망가있을 때에 그나마 여인들이 모입니다. 예수님의 사형식은 불법적으로 집행되었기에 장례식도 제대로 치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안식일이 지나서야 장례를 치르러 나아옵니다. 그러나 가면서도 무덤 입구에 큰 돌을 어떻게 옮길지가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여인들이 있는 곳에 천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4-5절입니다. "4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마태복음에서는 천사들이 나타날 때 지진같은 큰 진동과 번개를 동반하고 광채를 가진 천사가 큰 바윗돌을 옮기며 


말을 건냅니다. 그러니 여인들이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댈 수 밖에 없지요. 그렇게 찾아온 천사가 "위로의 말, 격려, 예수는 살아있다!"라고 말해주면 좋은데 질타합니다. 여러모로 첫단추 잘 끼운 자가 없는 예수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면 되는데 왜 천사들이 나타났는가? 하나님은 사람들 모두가 예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죽은 시체가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아마 그것을 본 사람들은 나중에 예수를 증거할 때에 "내가 본 것은"이라고 전할 것이고, 그것을 보지 못한 자들과 다른 믿음으로 차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하나님은 천국에서 보내는 두 사람이라는 증인을 보내셨는데, 번개, 큰진동, 빛나는 광채라는 초자연적 현상 속에서 천사를 보내셔놓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너희가 바라는 초자연적인 영웅, 초월적인 힘을 가진 교주, 신비한 능력으로 인도해줄 리더로 예수는 오지 않았다! 나는 그런 예수를 너희에게 보여줄 생각이 없다. 천사들을 보라. 그들의 신비하고  빛나는 형상, 그들이 옴으로써 느껴졌던 지진과 떨림들. 그것이 너희가 원하던 바였지만, 그런 것이 있는 곳에 예수는 없다. 여기에 없다. 예수는 다른 곳에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습의 예수는 없습니다. 나에게 로또같은, 내 마음을 한번에 풀어줄 상담사같은, 내 문제를 나도 모르게 해결해 줄 흥신소 같은 예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수를 보고 믿게 허락해주실 용의가 없으십니다. 여러분이 믿을만한 목사, 믿을만한 교회, 믿을만한 하나님은 어떤 모습인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 마음에 흡족하게 주실 용의”는 없어 보이십니다. 그럼 두 번째 질문이 일어납니다. 그럼 예수는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2) 말씀하시는 분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 공동체는 망한 상태였습니다. 제자들이 다 떠나갔고, 리더격인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기까지 했으며, 예수님 공동체에서 회계를 담당하던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는 유대교 사람들에게 팔아넘기다가 스스로 자살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사형집행을 넘기다시피 유대인들에게 넘길 정도니 예루살렘에서 예수와 그 무리들은 말 그대로 끝장나버린 세력이 되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그 공동체는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악조건 속에서 다시 이 공동체가 시작하여 지금 우리에게 전달 될 수 있었던 첫단추는 무엇입니까? 누구의 리더쉽입니까? 누구의 노력입니까? 누군가의 거대한 투자입니까? 아니면 때맞춘 운이거나 시대흐름이었습니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재기할 수 있는 요건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망해도 그냥 망한 것이 아니라 쫄딱 망해버렸는데, 이 공동체는 어떻게 지금 우리에게 이어진 것입니까?

첫단추 시작점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천사들이 무어라 말합니까?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지진도 아니고 번개도 아니고 광채도 아니고, 미리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죽었다 살아나는 영적원리”라는 예수님이 미리 이야기하신 부활원리를 기억하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신비한 광경에 예수는 없고, 미리 약속한 부활원리에 예수가 있다고 명확하게 말씀해주신 겁니다.

(1) 계획 - 여기서 천사들은 “갈릴리에 계실 때에 말하신 것”이라고 과거의 일을 말합니다. 즉 예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미리 설명해주셨었습니다. 그것이 이뤄질 때 잘 믿고 있어야 한다고 말이죠.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재림으로 다시 오실 것이며, 그 때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의 몸이 될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첫단추는 “계획되어 있는 단추구멍”에 끼우는 것이지 내 멋대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셨다고, 신앙생활 하고 있다고, 직분자라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짜놓으신 “인생”이라는 것, “죽어도 다시 살리실 인생”이라는 “재림계획”을 지금 내가 믿고 있는지 나는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을 믿을 때, 우리는 이 땅에서 방향, 태도, 판단이 달라집니다. 이 땅에서 평생 살 사람처럼 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나아가게 됩니다.
(2) 섬김 - 그것이 바로 섬김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죽어도 살리실 것을 믿으니 “섬기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섬기기 위해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예수가 가장 먼저 그 삶을 살아내셔서 증명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첫단추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가 이것이 첫단추가 아니니, 무너지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 것 아닙니까? 교회뿐만일까요? 여러분의 가정, 직장, 일상에서도 하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섬겨야 하는 분명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는 순종하시어 원수들의 손에 넘겨져 고난받으시고 죽으셨시지만, 하나님은 그 예수를 살려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을 인류의 죄값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섬기지 않아도 될 상황에 섬기고 희생하실 때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살려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첫단추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예수의 교회로 예수의 제자로 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죽어도 다시 살릴 수 있는 세상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느라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십니다. 결코 예수천당 불신지옥만 외친다고, 믿음이 있노라고 외친다고 다시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주셨던 겁니다.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
3) 약속된 부활로 걸어가는 교회
우리는 이렇게 예견되고 계획되고 작정해놓으신 영적 원리를 믿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부활원리대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지요. 계속해서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대상은 이웃과 타인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함으로써 우리를 높여주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도 이런 삶을 지속하다보면, 도대체 언제 높여주시나. 언제 속 좀 시원하게 해주시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럼 어느샌가 "내 방법대로 높아지려고 하는 나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 안에 내 욕망이 보이기 시작하고, 내 욕심이 보이기 시작하고, 내 고집과 아집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다시 나의 욕망을 확인합니다. 그럼 부활은 없는 겁니다. 죽어야 부활이 오는 것이지, 죽지 않고 부활할 수는 없는 겁니다.  

우리가 이번 고난주간과 부활절에 계란모양의 비누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 비누로 씻는 이들의 손이 깨끗해지듯 영혼이 깨끗해지기를, 어둠에 있던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와 빛을 보듯 이것을 보는 이들이 예수님을 통해 어둠에서 나와 빛되신 예수를 볼 수 있기를 기도하자고 이 비누를 각각 처소에 두었습니다. 어떠십니까? 내 기도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기도를 하며 죽고 계신가요? 네, 어찌보면 다른 이를 향한 기도를 하는 것은 “나를 죽이는 과정”이겠습니다. 나를 죽이며, 은혜로 나를 다시 살리실 주님을 고대하며 우리는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교회와 신앙은 “타인을 위해 살아가며 나를 죽이고 나를 다시 살리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다시 분명히 일으키실 것이라고 믿으면서 매일 매일 그 사람을 섬기며 나의 욕망을 죽이는 것입니다.

상담이나 관계를 해설해주는 영역에서 “내 탓”이라고 가르칠 때가 있습니다. 이 방법의 문제는 “화를 내 안에 쌓게 된다는 것”에 있습니다. 네.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이른번씩 일곱번 사랑하라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지요. 그렇게 화를 내 안에 쌓아두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반드시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화가 쌓인 괴물”이 되거나 “속은 뭉드러진채 겉으로만 웃고 있는 가면 쓴 가식덩어리”가 되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쌓아둔 화를 해석해주시는 하나님의 부활능력과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부활의 순간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로 그 화를 가지고 나가셔야 합니다. 그 시기, 질투, 분노를 가지고 하나님과 씨름하시고 풀어내시고 은혜로 간증으로 바꿔오셔야 우리 신앙이 제대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3. 결론
이 첫단추를 잘 끼우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계속해서 엇박자로 틀어지게 됩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이 스트레스가 되고, 기도생활 말씀생활과 거리를 둔 것은 오래 되었으며,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신지 확신이 안섭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인생은 사건이 아니라 해석이라고 말이죠. 인생에 사건은 계속 이어집니다. 문제는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바로보며 처리하는가에 있다는 것이죠. 우리의 인생을 성경은 “부활”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어도 다시 살 수 있게 계획해놓으셨습니다. 예수를 따라 섬기느라 죽은 자를 다시 살 수 있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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