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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_E/사상 & 철학

나가르주나 공과 솔로몬의 헛됨

by 우루사야 2023. 3. 8.

강신주 교수 "철학 대 철학" 2.6

1. 에피메니데스의 역설
크레타출신 에피메니데스가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할 때, 그는 거짓말을 하게 된 꼴이 되어버린다. 그의 말이 참이어도 그는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다. 논리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철학자들은 이 역설을 제거해야 할 혹처럼 여겼다고 한다.(강신주) 그런 가운데 러셀이 이 역설을 풀었다 자부했다. 

2. 러셀
거짓말쟁이는 "내가 주장하고 있는 모든 것은 거짓"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이 말은 그가 만든 주장이지만, 자신의 주장이 전체 집합을 지시하고 있다. 역설이 생기게 된 것은 그러한 전체집합 속에 이 말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전체 집합을 지시하지 않는 명제를 1차 명제라고 정의한다. 2차 명제들은 1차 명제들의 전체집합을 지시하는 명제로서 정의되며, 이러한 방식으로 무한히 진행된다. 그래서 크레타 거짓말쟁이의 말은 이제 "나는 거짓인 1차 명제를 거짓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말 자체는 2차 명제이다. 그래서 그는 어떤 1차 명제들도 주장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가 말한 것은 단순히 거짓이라는 내용이며, 그것이 참이 될 수 있다는 논증은 무너져 버린다.(나의 철학적 발전, 러셀)

러셀은 1차 명제와 2차 명제를 구분함으로써 "모든"이라는 범위를 구분하고자 한다. 즉 발언자는 모든이라는 범주에서 제외될 수 있게 하고자 하는 것으로써, 러셀은 이 역설을 풀어 내고자 하는 것이다. 


3. 역설의 사용
부모는 자녀에게 체벌을 가하면서 "사랑하기 때문에 때리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사랑하면서 때린다? 그럼 타인에게 그러한 체벌을 가하는 것은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일까?'라고 아이가 생각할 법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는 사랑의 매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가고, 그런 아이가 성숙해져 자녀를 낳고, 자신의 자녀에게 '가슴을 치며' 자녀에게 회초리를 드는 성숙한 부모가 되게 된다. 

4. 역설을 부정해야 하는가?
그런 점에서 역설을 꼭 논리적으로 풀어내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역설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 논리의 한계를 말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학에서는 그것을 "신비"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참이며 진리이지만, 우리가 우리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험되어지고 체험되어지기 때문이다. 강신주 교수는 이런 논리 맹신주의를 수사학과 대조시키고 있다. 

논리는 보편적인 것 같지만, 그 내면에 지독한 유아론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논리를 맹신하는 사람이 '모든' 혹은 '~하지만 동시에 ~하지 않는'과 같은 언어 표현에 과도하게 집작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수사학은 항상 타자를 염두에 두고 진행된다는 특징이 있다...논리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우리에게는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서 확인되듯이 '수사학적 전회'가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5. 불교에서는
인도 주류철학에서 논리학과 인식론이 가장 발달한 니야야 학파는 '모든 것이 공하다'라는 나가르주나의 주장을 비판했다. 니야야 학파는 회쟁론에서 "만일 그대가 모든 것들의 자성은 그 어디든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그대의 바로 그 말은 결코 자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만일 모든 것은 자성이 없다라는 바로 그 말만은 자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면, 모든 것은 자성이 없다는 그대의 주장은 파괴될 것이다"라고 한다. 즉 자기모순에 빠진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니야야 철학의 말을 따르면 나가르주나나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이나 결국 참과 거짓을 결정할 수 없는 무의미한 상태에 이르게 하는 무용한 가르침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나가르주나는 어떤 사물의 부재가 아니라 어떤 사물에 존재하는 "불변하는 본질, 즉 자성"에 대해 공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인연의 결합에 의해 생성되므로, 그것들에 자성이 있을 수 없고, 자신의 말 또한 자성을 갖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자신의 발언은 어떤 조건에 의존해서 발설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에 불변하는 자성이 있다고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러하다. 아버지가 있음으로써 아들이 있고, 아버지는 아들이 있음으로써 아버지라고 불러주는 이를 통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의존함으로써 존재하기에, 그들 스스로 자성할 수 있는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니야야 학파는 나가르주나의 인식까지도 공하다고 말했는데, 불교 전통과 니야야 학파는 진리 인식에 있어서 4가지 모두를 인정한다고 한다.(직접 지각으로서 현량, 추상적 개념과 논리를 통한 이성적인 추론으로 비량,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이름을 붙여 인식하는 비유량, 신뢰할 만한 사람을 통해 알게 되는 성교량) 그러나 나가르주나의 공개념은 직접지각을 부정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나가르주나는 시각경험을 가능하게 했던 시각능력과 시각대상 자체를 완전히 무화시키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자성을 가진 것으로 사유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란 용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6. 유명론
니야야 학파는 실재론적 입장으로 볼 수 있기에, 유명론 주장을 하는 나가르주나에 대해서 비판적일 수 밖에 없겠다. 그러나 나가르주나는 "모든 것이 다른 것에 의존한다"라는 공에 대한 통찰인 것이다. 이를 통해 고정된 의미 체계로부터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계기를 얻는 것이다. 나가르주나의 통찰에서 후기 비트겐슈타인과 유사한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솔로몬은 "2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1)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도 유명론자이거나 공개념을 가지고 있던 것일까? 그의 인식론은 무엇인가? "12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13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14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18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1) 그는 헛된 것들에 대한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하나님이라는 헛되지 않고 흘러가지 않는 불변의 존재를 의지함으로써 "헛됨의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나가르주나가 인연을 통해서 공한 것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면, 그 인연을 발생케 하는 주체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지 궁금해진다. 

신약은 육체, 육신, 땅의 것 등으로 공한 것들에 대해서 비워낼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공한 것에 대한 비움과 비워내는 그 과정 속에서 발화되는 여러 관계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가 오히려 실재적인 결과물을 가지게 된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공"(功)이 되는 "천국"이 있음을 말해준다. 성경에서는 공(空)이 공(功)이 될 수 있는 세계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이다. 나가르주나가 공을 통해 자유해짐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실재하는 것으로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헛된 것을 위해 수고함으로써, 영원한 것을 추구하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은 그것을 깨닫는 은혜를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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