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AYAMEMORY
강해설교_F/베드로전서_신실하신 하나님따라

벧전 2:18-25

by 우루사야 2022. 12. 6.

18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오늘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의 길을 예비하심을 보노라면, 참으로 성실하시고 신실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상상속의 천국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일하시고, 힘쓰시고, 애쓰시고, 노력하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알면 알 수록 천국이 어떤 곳인지 우리는 더욱 더 확신하게 되고 고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그 천국을 확신하는 자들이 성실하신 하나님을 고대하면서, 준비해두신 천국을 바라보면서,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해줍니다. 특히 베드로는 고난 가운데 선함을 드러내는 삶을 살자고 말합니다. 18-20절입니다. 

18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19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여기서 말하는 사환은 고대사회에서 집안에서 일하는 집사나 종을 의미합니다. 현대에서 말하는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권면의 순서를 먼저 국가와의 관계에 이어서, 종의 처신, 그 다음으로는 아내, 그리고 나서 남편에 대해서 권면합니다. 즉 순종하고 순복해야 할 대상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면서 권면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땅을 만드실 때의 질서는 "섬김과 순종"이었기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태어나실 때에 고위층의 자녀일 수도 있고 하위층의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사회계층으로나 말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위층이거나 누군가에게 더 순복하고 순종해야 하는 위치로 태어나게 됩니다. 성경은 그 순종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더 먼저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원리에 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누군가를 다스려야 하는 사람들조차도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다스려야만 합니다. 이 세상은 섬김과 순종의 원리로 지어졌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더 나아가 부당한 순종까지 말합니다. 까다롭게 구는 주인들이나 나의 상급자들, 부당한 고난을 주는 고용주들에 대해서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고까지 말합니다. 이런 인내가 선한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부당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내하고 참는다는 점에서 조금 의아함이 생깁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사환"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회사의 고용주와의 관계가 아니라, 가정질서 안에서의 아버지, 남편, 가장에게 있어서의 질서입니다. 사환은 종이자 집사라고 말할 수 있는 가정노예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고용주와의 관계보다 더 밀접하게 서로의 생활을 공유하고 책임지고 섬기는 관계지요. 그런 가정질서 안에서 베드로는 사환을 먼저 언급하면서 순종으로 선함을 드러내 낮은 자리에서 부당한 것까지 인내하며 가정의 질서를 세워갈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질서는 "섬기는 자"로부터 세워지는 것입니다. 위에서 짓누르고 명령하여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섬기는 자로부터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당함에 맞서기 이전에 섬김으로서 질서를 세워나가기를 권면하는 것이지요. 21절과 같이 말합니다. 

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가장 부당한 처사를 받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분은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으시고, 그 부당함을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섬김으로써 질서를 세우시기 위함이었지요. 누군가가 부당한 상황에서 섬길 때 그 부당함이 고쳐지고 정당함으로 바뀌어질 씨앗이 심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회사에서 가정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억울하고 부당한 고난을 당할 때에, 그들과 싸우고 대립하기 전에 "내가 섬긴 적이 있었는가?"라고 스스로 먼저 되물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 섬김의 말, 행동, 시간, 교류간에 하나님이 역사하실 영적공간이 생기는 것이지요. 이 땅이 원래 지어진 순리가 작동될 수 있는 틈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부당함 가운데 섬김의 시간, 사역, 에너지, 가르침을 살아내셨습니다. 22-24절입니다. 

22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23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섬김을 통해서 이 세상에 질서의 토대를 삼으시고 회복하고자 하셨습니다. 죄라는 부당함의 원리를 없애는 것이요, 의로운 원리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말이죠. 부당함이 지금 당장은 이해가 안가고, 받아들이기 어렵고, 참기에 너무나도 아플 수 있습니다. 내 눈 앞에 나의 것들을 잃어가니 지금 당장 반박하고 따져서 나의 것을 수호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신자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신자라면,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라면, 예수를 따라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 섬김은 단순한 희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섬김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이 땅을 회복하는데 사용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당함 가운데 누군가의 희생은 타인들에게 죄의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해주고,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게 해주고, 느낄 수 없는 것들을 느끼게 해줍니다. 예수의 부당함 가운데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구원을 바라볼 수 없었을 겁니다. 나의 죄에 여전히 허우적대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의 희생을 보니 그 희생이 가지는 목적과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을 알게 되니 나를 위한 것이었고, 더 알게 되니 나 혼자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으로 이끌어가는 인생이셨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가 부당함 가운데 당한 고난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는 우리에게도 이 부당함 가운데의 고난에 함께 하자고 합니다. 그 고난에 참여한 제자들의 헌신, 신자들의 헌신, 성도와 교회의 헌신을 더하셔서 이 세상이 원래 만들어졌던 원리 "섬김의 나라"를 회복해 가셨던 것입니다. 비신자들이, 불신자들이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을 신자들의 부당함 가운데의 순종으로 생각하게끔 하자는 것이지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 제목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억울한 고난을 바라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와 교회와 신자들이 억울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인내하고 순복하는 그 현장을 세상은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구원을 천국을 바라보게 될 줄 믿습니다. 마지막 25절입니다. 

25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비신자 불신자들과 같이 예전에는 의지할데 없고 말할데 없고 허무하고 공허하며 헛된 것을 쫓던 인생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나를 위해 부당한 가운데 고통을 감내해주신 예수를 바라봄으로써 나에게 아버지되시는 성부 하나님이 있음을 깨닫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나의 본향집이 있음을 알게 되었지요. 나와 함께 계시는 성령 하나님으로 용기와 승리의 삶을 살게 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은 나의 권리쟁취 이전에 예수를 따라 섬김과 희생의 삶에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도 성실하신 하나님과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되길 소망합니다.

'강해설교_F > 베드로전서_신실하신 하나님따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벧전 3:8-12  (0) 2022.12.09
벧전 3:1-7  (0) 2022.12.08
벧전 2:11-17  (1) 2022.12.06
벧전 2:1-10  (0) 2022.12.02
벧전 1:20-25  (0) 2022.12.0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