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AYAMEMORY
주제설교_F/삼각관계 매듭짓기_요나, 사사

매듭짓기08.끌고가는 사랑(2)

by 우루사야 2022. 8. 13.

본문 : 요나서 2장 7-10절
제목 : 끌고가는 사랑

1. 서론
1) 예화
이번 폭우로 인해 수해를 입으신 모든 분들께 심심한 위로를 드립니다. 이번 폭우는 1973년에 완공된 이래 16번밖에 문을 열지 못했던 소양강댐 수문을 열게 만들었습니다. 초당 600톤에서 2500톤을 방류해야 할만큼 비가 많이 온 것이지요. 큰 비가 굳게 닫힌 문을 열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굳게 닫힌 문이라도 대세 앞에서는 열리기 마련입니다.

2)주제
지난 주에 우리는 요나선지자가 그렇게 선한 사람은 아니었음에도 하나님은 그에게 사랑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계속해서 끌고가시는 하나님이심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큰 파도와 큰 폭풍으로 굳게 닫힌 요나의 마음을 열고자 하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배를 돌리지 않고 바다에 스스로 빠져 하나님께 불순종하고자 하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또 "큰 물고기"를 보내셔서 살려내십니다.
제가 계속해서 한 표현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큰"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려는 우리에게 "대세"를 보내셔서 우리의 굳게 닫힌 문을 기어코 열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게 우리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모르는 우리가 사랑을 배우고 알아야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가장 큰 변혁과 큰 변화가 주셨어요. 사람이 모름지기 악하고 이기심으로 가득한 존재였는데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배우고 퍼뜨릴 수 있는 변혁기가 있었습니다. 대세가 바뀌었습니다. 예수라는 대세가 이 땅에 와서 죄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었던 인간을 사랑의 세계로 옮겨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에서 부활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분노에서 인내로, 시기에서 사랑으로 바뀔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소리", 복음은 그렇게 이 땅 가운데 퍼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계속 두드리십니다. 열번찍어 기어코 넘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3) 본문
오늘 본문에서 요나는 큰 물결에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니느웨로 돌릴바에 그냥 죽고자 합니다. 그렇게 죽으려고 바다에 빠졌던 요나가 막상 물에 빠지니 생각이 바뀌었나 봅니다.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그럴 줄 아셨나봅니다. 미리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요나를 구해내십니다. 그리고 요나가 그 뱃속에서 드리는 기도가 오늘 본문입니다. 요나도 대세에 마음이 열립니다. 저도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선 예수님이 요나의 표적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아직도 바다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 바다지도는 5%밖에 작성이 안되었고, 바다생물체의 1/3을 우리는 아직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바가 더 많고,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역사적 사실로 인정했다면 이 요나의 기도를 우리는 더 심도있게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겠죠. 오늘 본문 요나의 기도를 잠시 볼까요? "1요나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기도하여 2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그는 바다 속에서도 "내가"가 중요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를 사랑의 현장으로 데려가십니다. 10절입니다. "10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그의 기도를 살펴보면 사실 계속해서 하나님께 투정부리는 불완전한 기도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면서도 그를 사랑의 현장으로 묵묵히 데려가십니다. 하나님은 계속 여러분이 항복할때까지 여러분을 흔드실겁니다.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하실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까지 끌고가시는 분이심을 오늘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2. 본론
1) 하나님을 이용하는 나
요나의 기도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2,7,9절입니다. "2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7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9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요나의 기도를 보면 1인칭 주어가 참 많습니다. 요나는 불순종해 죽으러 내려가면서도 "내가 받는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뱃속에서 겨우 살아난 그 때에도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라고 말합니다. 무언가 회복되고 은혜를 받는 그 순간에 조금 자신감이 생겼는지 다른 이와 비교하면서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9절에서 "나는"을 다른 번역본을 보면 더 잘 표현해줬습니다. "다만 나는" 그러니까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지만, "다만 나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라고 비교하며 자신이 우월하다는 기도하고 있어요. 그리고서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습니다"라고 다시 마음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무렇게나 시작하려고 합니다. 왜 이렇게도 요나는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왜 상대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까? 제가 청년의 시절에서 조금씩 중년의 시절로 들어오면서 대인관계가 힘들어지더군요. 왜냐하면 사람을 만나면 각자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그리고 듣기 싫은 말은 안들으려고 합니다. 자기는 힘들게 사는 이야기를 하지만 상대방이 힘들게 사는 이야기는 듣기 싫어합니다. 점점 사람만나기가 힘들어지는듯 합니다. 청년의 때에는 자신의 세계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많이 듣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중년이 되면 어느정도 직장생활, 가정생활, 일상생활의 루틴이 잡힙니다. 나의 세계가 만들어졌죠. 그래서 듣지 않습니다. 내 세계, 내 생활, 내 주장에 그렇게 갇혀 사는 것이지요. 요나가 그러했습니다.

요나는 왕의 영토에 대해서 예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왕을 상대로, 그러니까 상류층을 상대로 활동하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활동하던 당시를 보시겠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왕하14:25) 요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긍정적인 메시지가 전해졌고, 그 결과 나라의 영토를 예전 영광에 비할만큼 회복했습니다. 그러니 요나에 대한 평가도 따라서 올라갔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정작 하나님의 평가는 부정적이었습니다. "14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그들이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자, 여기서 요나는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나의 메시지를 통해서 나라가 부국강병해지는듯 합니다. 모두가 요나를 높여줍니다.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정적 메시지에서도 자신이 높아질 수 있는가 였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계속해서 "앗수르를 통해 북이스라엘 심판이 예비되었다"는 메시지가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높아진 요나라면 긍정적 설교든 부정적 설교든 할 수 있었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요나는 무얼 택했을까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으나, 부정적메시지를 전하기 싫었기에 하나님이 가라는 앗수르로 가기도 싫었고, 더 나아가 자신이 세운 업적을 무너뜨리려는 하나님이 싫었던 것이죠. 결국 요나에게 하나님은 자신이 세운 나라와 우상을 무너뜨리려는 존재밖에 안되는 것이었던 겁니다. 결국 요나에게 하나님과 사역은 자신이 높아지기 위한 도구였던겁니다. 여러분에게 신앙은 여러분이 변화되는 장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이용하는 도구입니까?
2) 하나님이 필요없다.
많은 사람이 가장 민감해지는 부분이 "나의 영역"에 누군가 침범했을 때입니다. 나의 집에 방문한 사람들이 함부로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닙니다. 나의 업무영역에 있어서 누군가가 자꾸 충고를 합니다. 나의 미래에 있어서 자꾸 주변에서 조언이라고 스트레스를 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많은 스트레스를 받지요. 그런데 요나에게 하나님이 그런 꼰대, 그런 스트레스, 그런 참견자밖에 안되었던 것이지요. 요나에게 하나님이 그러했습니다. 자신의 영역에 하나님이 침범했기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요나와 꼭 닮은 사람이 예수님의 비유에서 나타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달란트 비유에서 1달란트 받았던 사람의 말을 들어보고자 합니다. 달란트는 일반 개인이 쓰는 단위가 아니라 산업이나 국가정책에서나 쓰는 단위입니다. 그런 돈을 한 개인에게 맡겼다는 것이 주인이 얼마나 신뢰가 가득한지를 알 수 있지요. 후에 주인이 종과 결산을 하려합니다. 그런데 이 종이 나중에 결산할 때 하는 말을 보십시오. 24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와서 '주인님, 저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신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25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저는 주인님의 을 가지고 가서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그 이 그대로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마25) 이 종은 처음부터 주인을 비난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땅에 돈을 뭍었던 이유는, 이 주인에 대한 신뢰가 없었고 만약 이 돈을 잃는다면 자기 자신이 옥에 갇힐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지요. 그래서 원금이라도 보존하고 그대로 돌려주자라는 생각으로 그랬던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주인이 무어라 합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 종이 잘못한 것은 주인의 마음과 이해를 헤아려보려고 하지 않았던 게으름입니다. 즉 자신의 틀, 생각, 관점, 나의 영역 안에 갇혀서 주인의 호의를 멋대로 판단했던 것입니다. 주인이 주었던 달란트 은혜는 고작 나의 영역을 침해하는, 내멋대로 살고 싶은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게으르게 고민하려하지 않았던것이죠. 그에게 하나님은 참견자였습니다.

요나도 악하고 게으른 종이었던 겁니다. 자기 중심적 해석으로 가득찬 사람인 것이지요. 자신의 세계 안에서 하나님을 멋대로 해석하고 가둬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인생에 충고하는 꼰대였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두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하며,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결말까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울면서 이를 간다는 것이 무얼 의미합니까? 우리가 보통 아는 슬픈감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생각이 계속 이 감정의 중심에 있습니다. 바로 후회입니다. 후회를 하며 이를 가는 것이죠.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자는 반드시 슬피 울며 이를 갈며 후회를 하는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지옥벌입니까? 육체적 고통보다, 감정적 고통보다도, 더 우리의 존재를 공허하게 만드는 벌이라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참견, 관여, 섭리를 거부하는 자는 이렇게 살것이라 성경은 약속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나서를 돌아와서 생각해보실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요나를 계속해서 끝까지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실까요? "10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하나님은 요나를 계속 붙들고 하나님이 사랑을 베푸시려는 현장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니느웨에 있는 왕부터 종, 동물까지 회개하는 현장을 보여주시려고 요나를 데리고 가십니다. 요나가 세운 왕국에 머물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우는 회개와 사랑의 왕국을 보여주시려고 합니다. 여로보암 2세와 영토를 넓히고, 나라가 침략당하지 않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요나를 니느웨에 뱉어내게 하십니다. 요나의 미적지근한 신앙,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따르거나,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냉철하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척만 하는 요나의 신앙을 깨우시려고 요나를 끌고 가십니다. 요나에게 계속 참견하십니다. 가르치십니다. 끌고가십니다. 왜입니까? 하나님 사랑이 없으면 우린 죽기 때문입니다.
3) 그럼에도
물론 요나도 회복의 조짐이 보입니다. 3-4절을 볼까요? 3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4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입니다. 요나는 죽다 살아난 현장에서도, 3절보니 하나님께서 요나를 던지셨다고 탓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불순종하고자 바다에 뛰어 들어갔으면서도 말이죠.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요나 자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마음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니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요나의 모습이 시작이 됩니다. 내려올 때까지 내려왔으니 이제 "다시 올라갈 일"만 남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 하지 않으십니다. 불신앙의 밑바닥을 보게 하십니다. 끝까지 내려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남을 때"까지 우리를 밀어붙이십니다. 그게 우리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볼 마음이 생기게끔 밀어붙이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에 소망이 없고, 기쁨이 없고, 불안과 초조, 불확실성의 생각으로 가득하다면 여러분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따르고 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열이면 열 내가 만든 우상, 결국 나 중심의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의와 희락과 화평이라 바울은 했습니다. 하늘이 주는 지혜가 있다고 야고보는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본래 이러한 것인데 왜 이렇게 변한 것입니까? 나의 우상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끌고 가고 계신 줄 믿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내 신앙이 완벽하지 못하고, 때로는 일상에 치이고, 남아나지를 않는 마음과 체력 속에서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지금도 푸른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고 계신줄 믿습니다.



3. 결론
프리다이빙을 아십니까? 숨 한번을 참고 얼마나 깊은 바다로 갈 수 있는가를 두고 대결을 하는 스포츠입니다. 우리나라 1세대 프리다이버인 김선영씨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숨 한 번에 6분을 참고 90미터에 가까운 바다 속을 들어가 캐러비언컵 대회에서 1등을 했다고 합니다. 기자가 그렇게 다이빙을 하면 어떤 생각과 느낌이 드는지 물었는데 이렇게 답하더군요. "경이로워지는 것 같아요. 내려갈수록 몸에 힘이 더 빠지고 내려놓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숨을 참고 있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편안합니다. 몸에 힘이 들어가면 알아차리고 그곳에 힘을 빼줍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시간이 더 늘어나죠."

하나님은 요나가 힘을 빼고 배를 돌리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러지 않고 바다로 뛰어들어갔죠. 죽을 것 같으니 하나님을 불러 겨우 살아남습니다. 그럼에도 물고기 뱃속에서도 아직 정신을 못차렸지요. 그런데 알고보면 그런 일련의 과정이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며 자신의 힘을 빼는 과정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됩니다. 경이로운 하나님의 사랑. 그 안으로 들어갈 수록 우리의 관점, 주장, 틀, 편견, 고집, 아집을 내려놓게 됩니다. 나 자신이라는 우상을 내려놓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사랑에 나의 몸과 인생을 맡기며 하나님을 따라 경이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 한주도 우상과 매듭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경이로운 인생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되길 소망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