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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_F/삼각관계 매듭짓기_요나, 사사

매듭짓기07. 끌고가는 사랑

by 우루사야 2022. 8. 7.

 

 

본문 : 요나서 1:1-4
제목 : 끌고가는 사랑


1. 서론
1) 요즘 많이들 보시죠? 금쪽같은 내새끼에 한 모자가 출연을 했습니다. 아이는 학교에 가지 않으려는 장면부터 저는 보았습니다. 아이 엄마는 8시35분이었는데 지금 학교 안가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제가 아이 등교를 시켜봐서 아는데 35분이면 충분히 남습니다. 오히려 학교에서는 좀 더 늦게 50분에 맞춰서 오라고 하는데, 이 엄마는 왜 이 시간에 아이와 씨름을 하고 있을까요? 좀 더 보았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차에서 잡아 끌어 내리고, 바닥에 주저앉는 아이를 일으켜 겨우겨우 교실 앞까지 데려다 놓습니다. 그 때 패널 정형돈씨가 영상을 멈추고 말합니다. "저는 어머니가 너무 강압적으로 느껴집니다. 아이의 의견, 그러니까 왜 학교를 가기 싫어하는지 물어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묻더군요. 거기서 오은영 박사님은 다른 의견을 말하시더군요. "약한 모습 보이지 않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시는 모습에 따봉을 드립니다" 하시더군요. 나중에 보니 아이는 뇌전증 증상이 있었던 아이였고, 혼자 해결능력이 부족한 상태였기에 묵직하게 끌고가는 양육이 필요하다고 평가하시더군요.

2) 주제
우리는 살아가다 보면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하여 삶이 진행되기 보다는, 상황, 환경, 정황, 배경, 흐름, 대세에 의해서 더 많은 내 인생의 주요요소들이 결정되기도 하고 선택되어지기도 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내 인생의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이 나를 끌고가시는 것들을 지금 깨닫기도 하고 나중에 정리해보며 깨닫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믿음이 유산으로 주어집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1:6)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일을 시작하시어서 우리를 어떻게든 끌고 가시는 분이신 줄 믿습니다.
인격적으로, 자유로운, 존중하는… 이러한 수식어가 주는 느낌은 어떠합니까? 강압적이지 않고 나에게 많은 권한을 주는듯하며 따뜻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재난상황에서라면 어떨까요? 불이나 연기로 가득한 빌딩 비상구 계단에서라면 어떨까요? 아니죠. 그럴 땐 누군가 큰 소리로 명료하고 확고한 목소리와 자세로 명령해주기를 바랍니다. 거기서는 이런 강압적 소리가 더 인격적입니다. 확고한 목소리가 나를 존중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의 위기의 상황에서 때로는 확고하게 말씀하십니다. 강압적으로 끌고가실 때가 있습니다. 착한 일을 내 인생에서 이뤄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나를 끌고 가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교리에서는 "성도의 견인"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책임지시고 붙들고 나아가고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3) 지난주잇기
우리는 지금까지 우상과 매듭을 지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십계명 1-4계명으로 알아보았습니다. 나 자신을 우상으로 세우려는 나의 욕망을 잠재우고, 어떻게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 알아봤습니다. 이번주부터는 요나서를 통해서 요나가 선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자신"이라는 우상을 세웠던 자로서,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착한일을 위해서 끌고가시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요나의 인생이 우리의 인생이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지킬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나가며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기준
우리가 요나서라고 하면 큰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니느웨로 가서 부흥을 시킨 이야기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수 많은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본성이 담겨져 있는데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2절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1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2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하나님이 요나를 부르신 목적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2절에 보니 "니느웨 성읍의 악독"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하나님 앞에 상달되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도저히 눈뜨고는 봐줄 수 없는 만큼인지라 심판으로 그들을 멸절시킬 정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잔인했던 제국을 뽑으라면 저는 몽골과 앗수르가 기억이 납니다. 특히 사형을 시키는 방법에서 그런 악독함과 인간모독이 드러나기 마련인데, 앗수르가 참 사람을 잔인하게 괴롭히고 죽이는 나라로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라를 대상으로 하나님은 요나를 부르셨던 것이지요. 1절에 보니 "임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시니, 요나의 인생의 기준이 명확해졌던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명분도 너무나도 명확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한 도시로 가서 "회개하라!"라고 외치는 것만큼 가장 선지자다운 활동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가장 요나가 요나다울 수 있는 부르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앗수르는 그 당시 북이스라엘을 위협하던 가장 강력한 대제국이었습니다. 그런 나라로 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라는 것에 있어서 너무나도 멋드러진 사명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하나님과 멋지게 하나의 사명, 일을 해낼 수 있는 순간입니다. 그 당시 니느웨는 고대도시 중에 가장 큰도시 였습니다. 놀라운 사역의 기회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바로 "일"때문입니다.

여러분. 많은 관계들이 어느 지점에서 많이 깨지는지 아십니까? 부부를 생각해보지요. 부부가 처음 만날 때 연인으로 만나지요. 연인은 좋은 곳에서 좋은 것을 먹으며 좋은 모습으로 좋은 시간을 가집니다. 그렇게 서로에 대해서 점점 알아가지요. 그리고 서로에 대해서 충분히 알았다고 생각한 후에 드디어 "결혼"이라는 "일"을 치르게 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결혼은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것만 누리던 커플이 처음으로 "하나의 일"을 치르게 됩니다. 특히 한국의 경우 두 사람의 시간이라기보다 "두 가문의 만남"이라는 문화이기에, 많은 커플들이 이 일을 하다가 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사람은 "일을 할 때 서로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과 요나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일"을 해보자고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선지자가 무얼 하는 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고, 그것을 전하라는 것만큼 너무나도 확실하고 명확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요나에게 맡기실 만한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왜 문제가 생긴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묵상할 때 유념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기준은 생각보다 너무나도 명료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죄"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시고, 죄를 없애기 위해서 맏아들까지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려면, 그 죄라는 벽을 없애야 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죄라는 일" 앞에서 진짜 일대일의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시설, 좋은 식사, 좋은 관계, 좋은 메시지 속에서는 결코 진짜를 알 수 없습니다. 교회는 "죄의 일"을 다뤄야 진짜 하나님과의 관계로 나아가게끔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죄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하마티아라고 불리우는 죄라는 녀석은 하나님을 향하는 방향을 빗겨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총체적인 인생관에 관한 문제이지, 하나의 행동의 잘못으로 치부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사, 죄를 없애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에 얼마나 힘을 쏟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알아가고, 나의 죄를 예수로 풀어가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럼 요나는 어떠했을까요? 하나님과 죄라는 일을 없애는데 있어서 문제가 생길만큼, 그의 마음에 우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2) 빗나가는 요나
본문 절입니다.
3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기서 두 번이나 반복되어 강조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라는 표현입니다. 여러분이 예상하시는 바와 같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하자고 하셨던 "죄에 대한 일", 선지자로서 가장 우선적인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과 기준에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왜 요나서를 살펴보는지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나서는 니느웨 회개운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요. 그런데 요나서가 기록되면서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하나님의 선지자의 악독함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얼굴, 그러니까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피하기 위해 도망을 다니는 요나의 모습 속에서 인간의 악독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나는 모든 성도의 얼굴, 모든 신자의 죄악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14장에 보니 요나는 왕 여로보암2세의 곁에서 조언을 건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계급적으로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확실해 보이지요. 그런 요나가 갑자기 자신의 터전에서 떠나 니느웨의 반대편인 다시스로 도망하고 있습니다. 그냥 그곳에 그대로 있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반대편으로 도망을 간 요나인 것을 보면 얼마나 하나님을 향해서 반대의 의사를 표했는지 알 수 있지요. 니느웨에 가지 않겠다는 적극적인 표현으로 그는 반대편으로 더 멀리 갔던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자신이 이해하기에 니느웨가 망해야 한다는 생각과 기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대화를 잠시 살펴보면 도움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16)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베드로에게 사단이라고까지 명명하십니다. 요나나 베드로나 하나님의 관심과 뜻에는 마음을 두지 못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생각, 기준, 수준, 신념 안에 하나님을 가둬놓은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에 내 생각을 맞춘다"는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그 분을 만나서 그 분이 말씀하시는 바를 알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 점에서 여러분은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에서 나의 죄가 그 사이에 끼지 않도록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자기자신을 우상으로 두고서, 결국은 여호와의 뜻에 굴복하고 싶지 않아서 다른 반대쪽 도시로 하나님을 피해 간 것입니다. 불순종은 어떤 죄를 저질러서 불순종이 될 수 있겠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생각에 나를 맞출 생각이 없어 말씀생활과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 것에 있음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성경이 누누히 말하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 예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성령님이 우리의 마지막날을 예비하심이 여러분에게 어떤 뱡향을 제시해주십니까? 여러분의 말과 행동, 선택을 바꿔놓고 있습니까? 그것을 입으로 고백하실 수 있으십니까?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 여러분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나요?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이 사신 인생을 따라사십시오.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확신을 믿고 명예롭게 살아가십시오.


3)적용
4여호와께서 큰 바람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마지막 4절을 보니 하나님을 피하는 요나가 탄 배에 어떻게 하십니까? 매우 비인격적이고, 급작스러우며, 너무 극단적이지 않으십니까? 배가 깨질 정도로 바람을 보내 폭풍을 일으키시니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인내하시며 우리의 인생을 이끌고 가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배를 깨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단호함과 끌고가는 사랑이 우리의 인생을 이끌고 계십니다. 아무리 우리가 기도를 해도 들어주시지 않으십니다. 응답이 없습니다. 너무나도 단호하십니다. 나를 깨뜨리시는듯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을 잡아 당겨 이끌고 계심을 우린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에 나의 생각과 뜻을 맞추면, 그 속에서 용기, 지혜, 소망, 기쁨, 평안이 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큐티하실 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그래서 내가 과연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았는지, 내가 어떤 영향력을 주요하게 받으며 살았는지 알고 계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과 맞는지 살펴보신 후에 말씀을 보셔야 합니다.그리할 때 내 생각과 경험, 기준을 초월해 착하고 선한 일을 내 안에서 시작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 또한 우리가 보게 될 것입니다.


3.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EBS에서 보게 되었는데, 자신의 마음의 감정에 대해서 표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마음건강도를 체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난 한주간 마음이 어떠했는지 물었을 때 3가지 단어 이하로 쓰는 사람과 7가지 단어 이상으로 쓰는 사람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고 하더군요. 자신의 마음의 언어를 듣고 성숙해지어야 한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우리 마음에 우상이 있는지, 아니며 하나님이 계시는지 우리는 확인해야 합니다. 공허, 시기, 질투, 분노로 가득한지 아니면 충성, 온유, 인내, 사랑으로 가득한지 말이죠. 우상이 주는 것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확연히 다릅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알아내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선한 길로 푸른 초장으로 끌어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저와 여러분되시길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jnn-Jbo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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