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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_G/칼럼

우상과 행복

by 우루사야 2021. 9. 29.

* 본문은 맥체인성경읽기 156번째 신명기 10장, 시편 94편, 이사야 38장, 요한계시록 8장입니다. 개역개정4판, 현대인의 성경을 사용하였습니다.

우상은 왜 만들어지는걸까? 그 대상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자기만족일 심산이 크다. 그것은 사람일수도 있고 물건일수도 있고, 사상일 수도 있다. 그래서 중독의 사전적 의미는 물건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상까지 포함한다. 자신의 건강하고 성숙한 생활을 진행시키지 못하게 하고, 묶어두는 것. 그런데 그것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 어찌할 방도가 없다. 그래서 그 중독된 우상의 대상은 자기자신이 될 수도 있다. 
사람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 걸까? 우상이 없이는 행복할 수가 없는 것일까? 자기만족없이는 우리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가?

12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민10) 

모세는 분명하게 "행복"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말씀과 율례을 주셨다. 그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것은 눈으로 볼 수 있거나 손이나 감각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인간은 자기만족을 위해 감각적인 것을 먼저 찾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만족과 행복을 위해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도를 행하며 사랑할 것을, 그래서 세상에서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을 말씀하신다. 결국 행복은 무언가를 가짐으로써가 아니라 또는 느껴서가 아니라 "살아냄"으로서 가능한 것이다. 

11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12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13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14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15심판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따르리로다 (시94) 

그 살아냄에는 마냥 행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원수나 핍박자들로부터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때론 하나님께 혼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인생이 행복한 인생이다. 아픔과 고통은 우리가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신중하게 만든다. 감각적인 존재가 사유하게끔 한다. 그 사유 속에서 신뢰가 생기고, 확신이 생긴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이 그러하다. 물론 죄를 짓기 이전에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방법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어쨌든 죄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신자는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행복할 수 있다. 그 교제는 의를 말하고, 악을 말해준다. 영혼과 심판에 대해서 논해준다. 곤고함과 오만의 차이를 말해준다. 근심의 시간 속에서 즐겁게 해준다. 

11나는 또 이 세상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뵙지 못하고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도 다시 보지 못할 것으로 알았다.12목자의 천막을 걷듯이 내 육체의 생명이 내게서 떠나고 직조공이 베틀에서 베를 잘라 말듯이 내가 내 생명을 말았으니 내 명이 조만간에 곧 끝나 버릴 것 같았다.13마치 사자가 내 뼈를 꺾는 것처럼 내가 밤새도록 신음하고 괴로워하였으니 정말 내 생명이 곧 끝나 버릴 것 같았다.14내가 제비나 학처럼 지껄이고 비둘기처럼 슬피 울며 하늘을 바라보다가 지쳐 "여호와여, 내가 죽게 되었습니다. 나를 구해 주소서" 하고 외쳤다.15여호와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고 이 일을 행하셨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고통을 생각하며 여생을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리라.16여호와여, 이와 같은 주의 훈계로 사람이 살게 되니 내 영혼의 생명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여, 나를 고치시고 살려 주소서.17내가 이런 고통을 당한 것은 나에게 유익이었습니다. 주는 내 영혼을 사랑하셔서 나를 죽음에서 건지시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사38, 현대인의성경) 

히스기야가 그러했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죽음과 생명을 묵상하며 인생을 돌아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히스기야는 그것을 금새 잊어버렸다. 인간이란 행복한 길을 주어도 결국엔 다시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닐 존재들이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큰 덕목은 겸손이리라. 자신의 덧없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다시 되물을 수 있는 겸손함. 

이사야 37-38장의 이야기는 사실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다. 앗수르의 침공 앞에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다 말씀하시면서 앗수르를 멸망시키신 하나님이셨다. 죽음의 기로 앞에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주셨고, 병이 낫게끔도 해주셨다.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기도가 무엇인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겸손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자들의 신음소리 아닌가? 예수님도 그러한 기도를 은밀한 곳에서 만나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의 행복은 물질도 아니요, 정신적 쾌락도 아니요, 겸손한 가운데 만나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3또 다른 천사가 금향로를 들고 와서 제단 앞에 섰습니다. 그 천사는 모든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보좌 앞에 있는 금제단에 드리려고 많은 향을 받았습니다.4그때 향의 연기가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에서 하나님 앞으로 올라갔습니다.5그리고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와서 제단의 불을 가득 담아 땅에 던지자 천둥과 번개가 치며 지진과 요란한 소리가 났습니다. (계8, 현대인의성경) 

인생의 앞날을 누가 알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일 뿐이리라. 우주의 종말의 때는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개인의 종말은 항상 마주하면서도 잊어버리는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의 개인적 종말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다. 이를 "잠자는 자"로 표현할 순 있다.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수면은 매일 시공간을 뛰어넘는 체험이다. 그렇다. 우리는 긴 잠을 자고 일어나 우주의 종말을 함께 마주하게 될 것이다. 모든 성도가 모여서 말이다. 그 때 일어날 재난과 화도 함께 우리는 보거나 겪을 것이다. 그 때 사용되는 것이 모든 성도들의 기도이다.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이 땅에 내려온다. 그 기도의 결과가. 

우상은 우리를 보지 못하게 하고 듣지 못하게 하고 결박시킨다. 그러나 하나님과 교제는 우리가 더 깊은 주제들을 묵상하며 그 속에서 자유를 누리게 한다. 듣지못하고 보지 못한 자가 듣게 되고 보게 되고 바라보게 된다. 믿게 된다. 그래서 행복해진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 안에서 자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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