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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이 영화 건축학개론에서부터 조정석 배우를 알게 된 나는 멋스러운 조정석 배우보다는 소탈하고 웃기는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특히 그가 영화에서 남녀간의 키스를 친구에게 설명하는 부분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의 표현력을 가지고 재미지게 씬을 찍었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 뇌리 속에 남게끔 했다. 그만큼 그가 설명하는 "키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잘 설명했기 때문이다. 키스는 남녀가 하나가 되어가는 스킨쉽이다. 관계는 그런 것이다. 말과 몸이 섞이고, 생각과 느낌을 나누며, 함께 무언가를 공유하는 것. 그렇게 하나하나 나누면서 관계는 형성되어간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출애굽을 하여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성막을 다 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수기 7장에서 봉헌식을 거행한다. 거기에서 .. 2021. 5. 28.
큐티나눔에 관하여(2) 지난 글에서 교제와 나눔에 대해서 말했다면, 이번에는 한 개인이 그것을 어떻게 참여함으로써 실현가능케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다. 먼저 감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감정 또는 느낌은 외부자극에 대한 반응이라고 하였다. 이 반응을 욕구, 신호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우리는 항상 변하는 환경 속에서 자신도 변한다는 것을 감지하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는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우리의 행복, 즉 복음을 주심으로써 목적과 방향이 설정하셨다. 때문에 우리가 행복한가 그렇지 않은가 또는 그것을 모르고 있는가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매우 중요하고, 이것을 나눌 수 있도록 교회에서 장을 열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고 교회가 "심리학"으로 물들자는 것은 아니다. 단지.. 2021. 5. 27.
큐티나눔에 관하여(1) 교회의 교제를 위해 고대는 식탁(성찬)이 존재했다면, 지금은 소그룹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이 두가지의 공통점은 "삶을 공유하는 코이노니아"라는 것. 삶을 공유함으로써 공교회를 이루고, 이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없는 상태에서 성례만 존재할 때 반응없는 시체와 같이 느껴지거나 메마른 교조주의 교회처럼 비춰진다. 현재 사역하는 교회에서 그래서 "교제"에 대한 욕구에 따라 주일예배만 드리고 흩어지는 것에 대한 대책으로 오후예배를 큐티나눔으로 변경해보고자 하고 있다. 그래서 이를 준비하는 가운데 있는데,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과연 성경은 성례와 교제의 밸런스를 어떻게 가지고 있는가? 건강한 교회는 교제를 어떤 식으로 진행하는가? 이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 2021. 5. 27.
어린이대공원에서 동물원에 처음 간 다재와 함께 2021. 5. 27.
일상, 그러나 그 깊은 죄와의 싸움 나는 뉴스를 보다보면 피하는 것들이 있는데 아동학대와 같이 "무력한 자가 고통받는 사건"에 대해서 피하는 편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가족 모두 그런 쪽 뉴스를 접하고나면 잔상이 너무 많이 남아 일상이 힘들다고들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연민과 사랑이 우리 가족에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래서 어제 일이 잊혀지지 않아 오늘 글까지 쓰게 되는 것 같다. 어제 아이들을 하원하러 가는 길에 고등학교 앞에서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맞는 모습을 보고 바로 경찰서로 함께 동행했다. 여차저차해서 인계하고 나는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 일이 계속, 아니 구타당한 아이의 모습과 주눅든 표정이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아니, 다시 한번 정리해자. 맞는 모습보다 그 아이의 표정, 무기력한 그 표정이 잊혀지지 않.. 2021. 5. 27.
선함의 밭을 가는 하나님의 백성 성경에서 신앙과 불신앙이라는 구도가 많을까 아니면 선과 악의 구도가 많을까? 이것을 계수할수는 없다만 반평생을 성경을 봐온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답은 후자이다. 성경은 "선하게 살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기본적 전제로 두고 쓰여지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미 이뤄진 상태,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답이라는 구도 속에서 인간이 어떤 의지의 삶을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답은 삶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즉 인간의 의지적인 행동일찌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더 큰 틀 속에서는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개입이 여전히 남아있게 된다. 그래서 나의 자유적인 의지 뒷배경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래서 의지에 있어서 충돌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 신자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 네 혀를 악에.. 2021. 4. 28.
양심으로부터 살아내는 일상 레위기 26장 시편 33편 전도서 9장 디도서 1장 벌금이나 형벌은 저주가 아니라 수혜자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반응이다. 개에게 법규를 적용하지 않고 견주에게 묻듯이, 하나님은 천사나 사탄, 세상 그 어떤 피조물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 인간에게 물으신다. 하나님이 준 권한만큼 존중할 의무가 인류에게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때때로 받은 권리만 주장할 줄 알지 우리의 의무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이런 성향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민할 때도 적용되어서,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포지션에 걸맞는 의무는 생각하지 못하고 권리와 혜택만 바라보려 한다. 그럴수록 하나님을 왜곡시키고 이기적인 신으로 만들어버린다. 너희는 내 안식일을 지키며 내 성소를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26:2) 너희 남은 자가 너희의 .. 2021. 4. 27.
병렬독서 210422 1.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 스킵 2. 국화와 칼_일본문화의 틀 1장 3. 영광의 무게 1장 영광의 무게 1장 우리는 너무 쉽게 만족한다. 우리의 궁극적인 욕구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갈망한다는 것은 그 욕구에 대한 실체를 인식하는 것을 말하지만, 그것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욕구 내지 갈망을 획득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천국에 대한 갈망은 "영광"이고, 이 영광은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명예를 말한다. 이것은 낮은 자리에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리고 이 영광을 누리는 자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하나님은 마침내 그를 우주의 권위자로 세우신다. 성찬으로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만큼 영광스러운 일은 없다. 국.. 2021. 4. 22.
최후심판에서 행위의 역할논쟁_로버트 N.윌킨 칼뱅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조차도 영원한 정죄를 피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수적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주의 진영의 신자들이 모두 최종적 구원을 얻으려면 인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인내와 무관한 약속들이 등장하는데, 요한복음은 "피스튜오"(나는 믿다) 동사를 많이 사용하는만큼, 믿음의 즉각성에 대한 결과를 많이 말한다. 하지만 이 약속들이 인내와 상의관계에 관해서 말하지도 않는다. 단지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인내를 영생의 조건으로 삼지 않으셨다는 것만을 말해줄 뿐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하게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 하반절에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2021. 4.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