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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 설교_F/마주보기_삼상~왕상

마주보기05. 마음에 이르기를

by 우루사야 2022. 10. 8.

본문 : 삼상 27장 1-4절

제목 : 마음에 이르기를

1. 서론 
1) 예화 
오늘은 벽 이야기로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벽하면 가장 많이 떠올리시는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저는 베를린 장벽이 생각나더군요. 제 어릴 때의 일이긴 합니다만, 그 벽이 허물어지는 과정을 알고나서 더 기억이 남는 것 같습니다. 89년 11월 한 기자회견에서 동독정부 대표자는 "지금 즉시 지체없이 동독과 서독간의 모든 경계에서 출입국을 자유화한다"고 발표를 해버렸습니다. 사실 그는 "여행을 자유롭게 허가하겠다"는 의미였지, 경계를 다 없애겠다고 말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사실 그는 휴가다녀오느라 정신없이 기자회견에 참여하여서, 이 정책에 대해서 숙지하지 못한 상태로 실언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 한 사람의 실수로 인해 30년간의 장벽은 사라지고 이념이 달랐던 두 나라가 통일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어이없는 실수가 놀라운 결과를 이뤄내니 "참으로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로 가득한 것 같습니다." 

2) 주제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벽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감정과 상처의 벽, 사고 안에 있는 어마어마한 고집과 아집이라는 벽, 사람간의 편견이라는 벽, 그 밖에도 경제적인 면에서 너무나도 높아보이는 넘사벽, 마침내는 고갈되어가는 내 육신을 바라보며 점점 현실로 다가오는 죽음의 벽까지. 사실 우리 인생은 벽으로 가득차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벽만 가득한 것이 아니라 그 벽을 뛰어넘는 것이 또 인생인 것 같습니다. 위에서 소개해드린 바와 같이 알다가도 모를 일로 내가 가진 벽들이 무너지고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들을 느끼기도 합니다. 없다가 생기는 돈, 어부지리로 생기는 인생의 기회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행운들, 시간이 흘러 풀려지는 감정과 생각들도 우리의 인생에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압니다.  
신앙에서는 이것들을 가지고 다스릴 섭, 다스릴 리. 하나님이 다스리는 인생이라 하여 하나님의 섭리라고 표현합니다. 생사화복을 다스리는 하나님이라고도 표현하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의 머리갯수까지 세시는 하나님이라고 예수님은 소개하셨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생각, 감정, 인생의 모든 문제들이 다뤄지고 있고 또 다스려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알다가도 모를 일이 아니라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한 발자국씩, 매일 걸어가 벽을 넘은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우리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내가 나의 인생을 이끌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나 나의 지성과 예지력, 체력, 멘탈로 이렇게 유동성이 가득한 세상을 얼마나 올바르게 이끌어 갈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면 과연 우리가 어떤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겠는가 다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제 입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라면 육개장 사발면이 1천원이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른 무언가의 힘이 필요합니다. 정확하고 확실하며 초월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그래서 섭리를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돌보십니다. 신자든 비신자든, 믿음이 적든 많든, 교회 안에 있던 없던, 예수를 믿던 안믿던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 홀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아시고 인간 한명한명을 돌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자신밖에 믿을 것 없다 생각하며 불안과 초조로 살아갈 것인지를 묻습니다.

3) 본문잇기
우리가 계속 살펴보는 다윗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마음에 분별함을 가지고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던 100점짜리 사건, 그리고 그 다음에 마음에 걸리는 것을 만들 뻔했지만 아비가일의 도움으로 분별하여 나발을 죽이지 않았던 50점짜리 사건을 차례로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오늘 살펴보는 본문은 0점짜리 사건입니다. 다윗이 마음에 있던 두려움과 초조로 인해 결국 타국으로 망명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보다 자신의 두려움을 더 크게 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오늘 결론은 다윗이 100점짜리, 50점짜리, 0점짜리 어떤 선택을 했어도 결국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100점을 넘어서는 놀라운 결과를 내놓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여러분의 인생,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인생의 결과가 준비되어있음을 믿으시게 되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첩첩산중
결론은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중간과정, 다윗의 0점짜리 선택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아야겠지요? 본문 1-2절을 보겠습니다. "1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2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다윗은 계속해서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사울에게 손조차 대지 않고 살려줍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그것을 증명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사울을 존대하고 있는지를 말합니다. 하지만 사울은 계속 마음에 올라오는 불안과 초조함을 가지고 다윗을 죽이려 듭니다. 그 초조함이 결국에는 다윗의 마음에까지 번졌습니다. 다윗도 결국 초조와 불안을 느낍니다. 사울에게 아무리 증명하여도 믿어주지를 않으니 자신을 마침내는 찾아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1절에 보니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후일에 사울에게 잡힐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마음이 흔들리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쉽게 생각하기를 조금만 있으면 왕이 되는데 왜 이런 마음과 생각을 할까 싶습니다. 그런데 좀만 더 생각해봅시다. 다윗이 10대때 골리앗을 물리치며 인기를 얻었고 30세 때에 왕이 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최소한 20대 내내 사울에게 쫓겨다니면서 죽을 위기를 넘겼던 것입니다. 자그마치 10년 동안 불안과 초조를 안고 살아갑니다. 매 순간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억울한 상황이 10년간 이어집니다. 사울이야 그렇다쳐도, 다윗의 억울한 이 심정이 10년이면, 그 속은 어땠을까요? 곪을대로 곪습니다. 그럼 어느 누구라도 이게 한이 될 법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 지점에서 사울을 죽이려들지 않는 다윗이야말로 더 대단한 영성인듯 합니다. 어쨌든 결국 다윗은 여기서 죄가 살인으로 들어나지는 않게 막았지만, 도피라는 죄의 행동으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과 가족들 모두를 데리고 망명의 길을 택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고자 하는 장소가 의외입니다.  

다윗이 10여년 전에 물리쳤던 골리앗의 고향 블레셋사람들에게로 도망칩니다. 이것이 굉장히 전략적인 생각인 것이, 사울의 손에 잡히지 않으려고, 사울이 감히 건드리기 힘들어했던 적국에게로 간 것입니다. 갈 때 혼자 또는 자신의 가족들만 데리고 간 것이 아니라, 3절을 보니 추종자들과 그의 가족들 포함해 600명을 데리고 갑니다. 그 당시 나라가 한 성읍을 나라로 볼 때 다윗은 한 나라를 데리고 간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을 받아들이는 블레셋의 아기스 왕은 한 나라가 생긴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게다가 사울군사를 농락할 정도로 10년간 전쟁에 능해진 다윗군사들이었습니다. 이런 전략적인 서로의 이해관계를 통해서 다윗은 돌파구를 찾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 결과 4절에 보니 "사울이 더이상 수색"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배반하고 블레셋으로 도망갔다는 사실이 이스라엘에 퍼지기 시작하면, 더 이상 그가 왕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겠지요.다윗의 망명은 다윗을 눈엣 가시로 여겼던 사울왕에게도, 사울에게 목숨의 위협을 당하고 있던 다윗에게도, 군사력을 높이고자 했던 아기스왕에게도 너무나도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최고의 한 수를 다윗은 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눈 앞에 이익이 너무나도 탁월했던 이 선택이, 조금씩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산더미만한 문제로 터지게 됐다고 말해줍니다.

계속되는 블레셋과 이스라엘 간의 전쟁에 아기스 왕이 다윗을 부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향해서 칼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다윗이 타국으로 망명해서 살길을 찾았던 것이, 나중에는 사울을 죽인 편에 서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블레셋사람들이 다윗이 배반할 것을 두려워해서 제외시킵니다. 그렇게 한 숨 돌리는 그 때 동시에 또 다른 군사 아말렉이 다윗이 살던 시글락 성을 침범해서 다윗과 군사들의 가족과 재산을 모두 뺏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추종자들은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삼상 30:6) 다윗의 선택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결과를 낳고야 말았습니다. 일이 꼬이고 꼬이고, 또 꼬여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황까지 오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바로 앞의 결과는 너무나도 탁월하지만, 그 다음 길에서 그 선택이 어떻게 될런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물 열길 속은 알아도 한 사람 속마음 알기가 어려운데, 나라와 나라간의 일을 어떻게 될런지 알겠습니까? 지금 국제정세를 보십시오. 지구반대편의 일 때문에 라면값이 폭등하고 물가와 기름이 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것들로 지금 내가 내야 하는 이자가 이렇게 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한 나라에서 일어난 코로나가 전세계로 퍼졌고 그것이 드디어 끝나는 것 같더니 이제는 전쟁이라니,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첩첩산중, 설상가상, 사면초가의 인생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의 힘으로 이겨내려고 하면 지금 당장은 풀어내는듯이 보이지만, 나중에는 이것이 결국 나를 아프게 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다윗은 0점짜리 결정을 내렸고, 그 결정은 엄청난 마이너스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인생은 끝없는 벽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의 인생을 어떻게 인도하실까요? 차라리 하나님의 선지자가 그에게 왜 움직이지 말고 광야로 들어가라고 했는지, 차라리 그 때로 돌아가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더 나아 보입니다. 

 

2) 벽을 허물어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다리
우리는 서두에서 "섭리"라는 것에 대해서 잠시 다뤘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인생이라는 뜻이었죠. 하나님은 다윗의 인생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생각과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을 따랐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시는 듯한 생각이 드니, 그래서 자신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섣불리 마음에 드는 두려움에 따라 선택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의 인생에 개입하며 다스리셨는지를 소개해줍니다.

첫째, 하나님은 사울집안에서 왕권을 빼앗기로 한 계획을 실행하고자 하십니다. 특히 하나님은 특별히 사무엘의 영을 사울에게 보내셔서 말씀하십니다. "19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삼상28:19) 하나님이 사울과 그 집안에게서 왕권을 빼앗기로 결정하셨고, 그 실행을 이번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루시려는 계획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두번째, 하나님은 다윗과 그 집안에 왕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하신 만큼, 다윗이 왕이 되는데 걸릴 것이 없도록 다윗이 블레셋과 이스라엘 간의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게끔 하십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주신듯 보입니다. 블레셋에 망명한 다윗을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던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이 전쟁 중에 돌연 배반하여 사울편에 설까봐 그를 전쟁에서 빼버립니다. 더 나아가 다윗의 성 시글락이 아말렉 손에 침범당하게 하심으로써 다윗이 전쟁에서 나와 가족들을 구하러 떠나게 하십니다.(삼상30장)

여러분, 어떠십니까? 하나님의 손길이 얼마나 다각도로 다양한 곳곳에 뻗고 계시는지 보고 계십니까? 느껴지십니까? 여러분의 인생길이 이러합니다. 이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의 하나님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손길은 결코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인도하기 위해서 지금도 바삐 움직이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1절을 다시 보십시오. "1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다윗은 지금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하니 후일의 일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블레셋 사람들의 의심, 앞으로 있을 사울 왕과의 전쟁, 아말렉에게 빼앗겨버린 가족과 재산, 자신을 원망하고 죽이려고 드는 추종자들. 사실 다윗이 하나님의 뜻대로 광야에 있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꼬여버린 일들 앞에서 하나님이 하나하나 정리해 가십니다. 그런 과정들을 통해서 드디어 성경은 이 구절을 기록하게 됩니다. "1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4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삼하2:1,4) 다윗의 그릇된 선택에도 하나님은 그를 인도하십니다. 그가 선한 길을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섭리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손길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찬양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62:1-2) 하나님이 명하신다면, 내가 잘 모르는 길이라면... 기다리라.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 분으로 살아가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시편 뒷부분에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시62:9-10) 다윗이 자신의 판단과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듯 합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인생에 모든 벽은 문이다. 벽은 문을 만들기 위해 있어야 한다. 어떤 이에게 벽은 그 앞에 멈춰서라는 뜻이지만, 간절히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에게 벽은 문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되어준다." 또 어떤 이는 "벽을 눕히면 다리가 된다"고도 말하더군요. 우리가 문과 다리를 만들려 하게끔 말해주는듯 합니다. 참 용기를 줍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합시다. 하나님이 벽을 주시는 분이시라면 문도 다리도 주십니다. 문을 만들 수 있는 지혜를, 다리를 만들 수 있는 힘을, 계기를, 동기를, 기회를 주십니다. 내 두려움이 만드는 문은 금새 고장나 닫힙니다. 내 초조함이 만드는 다리는 건너다 무너집니다. 일을 더 키우게 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만드는 문과 다리로 건너라고 말이죠. 나의 잘못된 선택까지도 선하게 만들어가시는 하나님과 함께 인생의 벽을 문과 다리로 만들어 가시는 저와 여러분되길 소망합니다.                                                   

3) 직면
새벽을 향해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어둠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더 짙은 어둠을 향해 가는 것이라 하지요. 하나님은 다윗에게 유다광야에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계속 죽음의 길에 있게 하셨습니다. 출애굽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가나안 땅으로 가기보다 "광야"에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 불안, 초조, 염려, 시기, 음란, 분란, 요동을 직면하게 됩니다. 이뤄지지 않는 기도제목, 도저히 기다려도 변하지 않는 환경, 나를 너무나도 힘들게 하는 내 주변의 가족... 하나님은 그 속에서 우리가 살게끔 하십니다. 그 환경에서, 그 사람과, 그 시간은 너무나도 힘들게 하고 목을 조르는듯이 답답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을 살아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끔 하십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내 인생을 다스리시고, 나를 다듬으시며,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밝히시는지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우린 섣부르게 바꿔서는 안됩니다. 특히 요즘 정치에 대해서 말이 많습니다. 비웃고 조롱하고 읍소를 나눕니다. 정중한 티비뉴스 토론회에서 조차 그런 장면들이 보입니다. 저는 이것이 너무나도 염려스럽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시간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우리나라가 되길 기도해야 합니다. 경제에 대해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바닥을 보고 있습니다. 아직 폭탄이 터지기도 전이라고 하는데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힘들어 죽겠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불안과 초조가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인구수가 줄어들다 못해 이제 농촌에서나 볼법한 아이가 없어 폐교하는 학교들이 서울과 수도권에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공교육이 흔들리고 자녀교육에 대해서 너무나도 힘들어하는 부모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문제 앞에서 답이 없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물가가 너무 오르다 못해 살인적입니다. 그러나 청년들이 갈 수 있는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그것도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최저임금에 가까운 자리들입니다. 그곳에서 결혼과 자녀출산을 꿈꾼다는 것이 죄책감이 들 정도라고 합니다. 답이 없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가정에, 나의 자녀에게, 우리의 부모님들에게, 우리 교우들에게, 우리 주변인들에게 나타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동네에 술주정꾼 아저씨가 한분 계십니다. 하루에도 그 분때문에 경찰이 2-3번 출동을 할 정도입니다.  들어보니 그 가족들도 그 아저씨를 포기했다고 합니다. 알고보니 정신병 일환을 앓고 계신 상태에서 알콜중독까지 오니, 가족들이 포기했습니다. 동네 상권주인들이 난리입니다. 아저씨 때문에 장사가 힘들다고. 어쩌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저도 그 아저씨의 고함이 너무 듣기가 싫었습니다. 그 순간 귀를 막으려 헤드폰을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두었습니다. 왠지 그 소리를 계속 들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야 그 소리를 들으며 아저씨를 위해 기도하게 될테니 말이죠. 저는 좌우 가리지 않고 뉴스를 봅니다. 정말 보기 힘든 어린이 범죄 뉴스도 챙겨봅니다. 내 나라 밖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챙깁니다. 왜냐하면 알아야 기도하게 될테니까요.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그 날이 있을테니, 직면해야죠. 그 문제를 챙겨야죠. 어둠을 향해서 나아가십시오. 더 짙은 어둠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시고, 흔들리지 마시고 나아가십시오. 그 마음에 이르는 말이 두려움과 초조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확신과 소망이 되도록 여러분을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성부 하나님이 날 창조하셨고 또 마지막을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성자 하나님이 나의 인생과 영혼의 모든 죄와 오류를 책임지고 가장 선한 인생으로 인도하고 계심을, 성령 하나님이 그런 나의 인생에 연합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결론
1) 예화 
벤자민 프랭클린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모두가 오래 살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늙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참 사람이 이중적인 것 같습니다. 도통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도 도통 알 수 없는 일과 결과들로 가득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의 힘으로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2) 주제
하나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분의 개입과 섭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문제 앞에서 도망가서는 안됩니다. 이번 한주, 여러분이 가지고 계시는 문제와 역경, 어려움과 아픔에서 도망가지 마시고 직면하시고 맞딱들이시기 바랍니다. 어느샌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여전히 흐르고 있고 나를 덮고 있고 책임지고 있음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벽이 문과 다리가 되어서 나의 인생이 예수의 손을 붙잡고 나아가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3) 기도 및 결단 
나의 영혼이 잠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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