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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_F/절기설교

사순절3. 내려오세요.

by 우루사야 2022. 3. 19.

 

 

 

본문 : 마20:20-28
제목 : 내려오세요.


1. 서론
백종원씨가 진행했던 골목식당을 잘 아실겁니다. 그 프로그램의 의도를 가장 잘 살렸던 편이 바로 해미성읍 편이었습니다. 그곳에 우시장이라는 곱창요리집과 백종원씨가 솔루션을 진행했는데, 그 주인아저씨가 백종원씨에게 부탁하기를 사정이 있어서 한 집이 계속 마음이 쓰인다고 말하는거죠. 알고보니 자신이 타지로 가면서 인계한 돼지곱창가게인데, 사정상 다시 해미성읍으로 돌아왔다, 메뉴는 안겹치게 소곱창을 했는데 장사가 잘 안되어서 돼지곱창메뉴를 같이 하게 되었다. 그게 계속 마음에 쓰였다. 그랬더니 백종원씨가 그 가게랑 형제가게로 같이 하면 되지요~ 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 두집을 같이 앞에 두고 솔루션을 진행하려고 불러들였는데 그 두 집이 서로 손을 붙잡고 먼저 가게를 인수했던 집이 미안하다고 울고 인수받았던 집도 그간 힘들었다고 울며 서로 미안하다 괜찮다 손을 맞붙잡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년 뒤에 그 가게를 다시 찾아가봤더니 아직까지도 줄서서 먹는 집으로 두 집은 번성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해미성읍편은 골목식당 프로그램취지를 가장 잘 살린 편으로 유명하게 전해지곤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위 이야기만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설명하기에는 녹록치 않습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고, 돈으로 환산되지 못하는 것들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치부되기 일쑤입니다. 그 대표적 예가 사람을 키우는 것입니다. 사람을 키우는 것은 당장 돈으로 변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 예가 가정주부와 어린이집 교사입니다. 가정주부는 경력단절이라고 불리우며, 어린아기때부터 다니는 어린이집은 "최저시급과 최저대우"를 받는 직종이어서 지원해서는 안될 이들이 지원하여 아이들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직종입니다. 세상과 우리는 사람을 부리는 것에 관심있지 키워내고 사랑하는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계산법이 있는듯합니다. 내가 남의 것을 빼앗아 플러스를 시켰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마이너스가 되어 있는 계산법이 있고, 마이너스 나더라도 남에게 베풀었더니 곱절이 되는 계산법이 있다는 겁니다.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은 광고카피로 쓰일만큼 유명한 말이 되었지요.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실 때에 양심과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양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보다 더 강력한 욕심과 이기심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면서 죄에게 붙잡힌 인생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누기보다 내가 먼저 가져야 할 것에 대해서 반응하는듯 합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신자로서 궁금증이나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지요. 과연 예수님은 어떻게 하라고 하실까? 우리를 어떻게 설득시켜주실까? 라고 말이죠.

우리는 계속해서 부활절을 준비하는 사순절 기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수행과 고행보다도 "예수를 닮은 작은 예수"로 살아가기를 결단하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들을 생각하며 "더 쟁취하려 하기보다 하나님이 이미 나에게 주신 것에 감사할 것"으로 품꾼비유와 탕자비유 속의 아버지와 형과의 대화를 살펴보았습니다. 아니꼽고 배알이 꼴려하는 나의 심령을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넓은 아량과 명예로 승리하는 신자가 되길 결단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계산법을 까르라고 말이죠.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나와 같이 살라"고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그렇게 살기를 거부하는 제자들과의 갈등 내지 가르침이 등장합니다. 섬기는 삶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이겠습니다. 이 말씀으로 오늘 다시 한번 섬기는 작은 예수로 살아가기로 결단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2. 본론
1) 성경속의 문제 - 우리일상에서의 문제
kbs 사극 이방원을 보고 있습니다. 이방원이 형제를 죽이고 왕좌에 오른 부정적인 자로써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방원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를 통해서는 참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런 대사가 있었습니다. "화가위국, 집안이 변하여 나라가되었으니 오손도손 정겹던 가족들이 하나둘씩 적으로 변해가는구나." 저는 이 대사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참 잘 말해주는구나 싶었습니다. 가족도 이러하니 남인들 어떠하겠습니까? 말해 입만 아프겠지요. 오늘 본문에서도 같은 상황이 펼쳐집니다. 20-21절입니다.

20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21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세베대의 아들이라면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예수님이 초기에 부른 1그룹 제자 4명이 있는데 먼저가 베드로와 안드레, 그 다음이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제자로 임명할때 예수님이 천둥의 아들들이라고 불러주시기도 했고, 예수님이 몇몇사건은 12제자가 아니라 소수의 제자만 불러서 보여주셨는데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나 변화산 사건에서 이들이 있었습니다. 즉 이들은 자신들이 예수님께 선택된 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근거해서 "예루살렘에 가서 나라를 세우면 생길 자리"를 요구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선택이 특권으로 변질되어있었던 겁니다. 이 부분에서 예수님은 이 두제자가 착각하고 있는 부분을 명확하게 짚어주시고자 하십니다. 22절입니다.

2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이 구하고 있는 자리가 어떤 성격의 자리인지 도저히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표현으로 "잔을 마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자리는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섬김"의 자리이기 때문이지요.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나라를 전혀 오해하여 군림의 계급구조와 서열이 있는 나라로 여겼고, 그래서 예수님의 가장 최측근으로 군림할 수 있는 오른편 왼편자리를 요구했던 겁니다. 예수님이 세우실 나라는 세상국가가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나라,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선택해주심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뻔뻔하게 "특권을 더 요구하는" 그들과 맞지 않은 것이죠.

이 사건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로마를 무찌르고 메시야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눈 기대감 그러니까 세상계산법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거의 다 다다르실 때였습니다. 그러니 야고보와 요한은 마음이 급해 자리를 요구했던 것이고, 나머지 10명의 제자들도 누가 더 큰 자인지에 대해서 싸우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행태에 대해 예수님은 적나라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5절입니다.

"25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즉 제자들의 행태는 누군가를 마음대로 조종하고 부리려는, 그러니까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 수직적 상승계층에 오르려는 행태라는 겁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인사하는 "에덴을 만듭시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여러분이 "군림의 질서"라는 세상의 계산법이 있는 한 결코 여러분을 통해서 천국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교회의 부흥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은혜가 흘러갈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180도 정 반대에 서계시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에는 "위계질서"라는 명목하에 계급화한 결과 때문입니다. 교회는 더 섬길수록 더 중책을 맡기는 질서여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과 같지 않습니까? 우리교회에서 식사를 하고나면 설거지를 하지요. 제가 식기세척기를 다룰 줄 아니까 제가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성도님들이 하나같이 말씀하십니다. "왜 목사님이…" 여러분이 제 생각을 해주시는 것 잘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 중 제일 높으신 예수님이 종이 되려고 오셨는데, 목사가 높으면 얼마나 높다고 성도 위에 군림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이 제일 아래에 계시기 때문에 섬김의 왕으로 계시는 것이고, 그 다음이 섬김의 교역자가 있고, 그 다음이 섬김의 중직자, 섬김의 새신자, 섬김의 비신자가 있는 겁니다. 우리는 섬김의 질서에 대해서 고심해야 하게습니다. 우리는 군림의 나라가 아닙니다. 사람을 키워내고 사랑하는 나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성경속에서의 예수님의 행동
예수님께서 이 섬김의 질서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해주시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6-27절을 살펴보겠습니다. 26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께서도 계급을 두고 설명해주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그 계급이 위쪽이 아니라 아래쪽입니다. 바로 "종"이라는 자리였습니다. 종이라는 명사와 가장 어울리는 동사가 무엇입니까? "섬기다"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적극적 부정으로 말씀하시죠. 오히려 서로를 높여줄 수 있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대표적인 모델링으로 예수님 자신의 행동을 말씀하고자 하십니다. 28절로 이어집니다.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윗계급자로써 무언가 받기 위해서 있는 분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다른 이들을 위해서 "대속물"이 되기 위해서,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 대신 책임져주기 위해서, 사람을 키워내고 살려내기 위해서 이 땅에 희생하고 섬기러 온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많이 듣는 것이 십자가로 나아가세요, 십자가를 기억하세요라는 표현일 겁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모형을 생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이 하신 행동을 기억하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서 희생하신 사실과 그 이유가 되는 나를 향한 사랑"을 기억하라는 표현입니다. 그게 대속물이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제가 이번주도 뒷자리에 앉아서 기도를 하는데, 지난 주처럼 사랑이 넘치길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더 보여주실 것이 없다"는 마음을 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제가 요근래에 살아왔던 환경, 시간, 결정들을 되돌아보게 해주셨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이뤄지지 않았을 환경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더 악화되었을 시간을 선한 추억과 기억의 시간으로 인도해주셨고, 포기하거나 실패했을 결정의 순간들 속에 역사해주셔서 좋은 결정들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날 사랑하고 계셨던 것을 내가 몰랐던 겁니다." 십자가로 가서 예수님이 날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랑을 기억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던 겁니다.

내 머리로 어렴풋이 아는 예수님이 아니라 진중하게 다가가 바라본 십자가의 예수님은 나의 엉망진창의 환경과 뒤죽박죽되어버린 나의 과거의 시간 속에서도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사랑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어 나의 결정과 선택을 돕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만한 미래를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내 엉켜버린 인생을 바로잡기 위해 섬기고 계십니다. 그분을 보려면 내 상상의 예수님이 아니라 "대속물이 되어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와 같이 섬겨 다른 인생을 바로잡아 주는 자"가 되라고 불러주신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26-27절을 다시 볼까요?

"26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 현세에서 섬기고 종이 된 자들이 내세에서 큰 자가 될 것이라고 으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해주고 계신 겁니다. 예수님이 믿었던 하나님의 계산법, 그 원리를 믿고 순종하고 따라 작은 예수가 된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이었습니다. 대속물되신 예수처럼 위가 아니라 섬기러 내려가려는 모든 이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제가 이번에 어린이집 운영위원이 되었습니다.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섬길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해 수락했습니다. 이 세상이 왜 이렇게도 교회를 욕하는지 잘 들어보면, "세상과 다른 무언가를 보여달라"는 아우성같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답이 없으니, 너희가 그렇게 믿고 진리라고 말하고 소망이 있다고 말하는 그 길을 보여달라고 말이죠. 저는 그것이 섬김의 길에 답이 있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답이 있다 믿습니다. 사람을 키워내고 살려내는 그곳에 말이죠.그래서 지역사회를 섬기기 위해서 이 운영위원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섬김의 자리는 어디이십니까? 우리 교회의 자리는 어디여야 할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섬기는 종의 자리라고 못박아 두셨습니다. 사람을 키워내라고, 그래서 선기라고, 사랑하라고. 그러면 하나님이 너희를 크고 으뜸된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먼저 내려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라 내려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커피 한잔으로 말 한마디로 미소와 인사 하나로부터 시작해 섬기러 내려가는 한주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선하게 높여주실 것입니다.


3) 우리 일상에서의 행동
바보의사하면 여러분 잘 아시는 장기려 박사님이 계실 겁니다. 부산경남쪽에 근거지를 둔 고신교단이 있습니다. 우리교단과 교리적으로 가까운 교단인데, 교단소속으로 "복음병원"이 있습니다. 그 병원 설립자분이 바로 장기려 박사님입니다. 가난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해 병이 난 환자에게 준 처방전 "이 환자에게 닭 두 마리 값을 내주시오"였습니다. 입원비가 밀린 가난한 농부가 돈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자 손에 차비를 쥐어주고 뒷문을 열어 도망치도록 도운 의사였습니다. 그러면서 "의사 한번 못보고 죽어 가는 가난한 사람들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늘 서있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가장 똑똑한 바보의사로 불리웠습니다.

우리의 계산법, 서있는 위치와 어떤지 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왜 이렇게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이렇게 우리는 눈에 보이는 윗자리 높은 자리 알아주는 자리로 가려고 애쓰는 것일까요? 왜 예수님처럼 살지 못하고 이 인생살이, 정말 눈 한번 뜨고 감으면 죽는 인생에서 무언가 쥐어보려고 애쓰는 것일까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오은영 박사님. 요즘에 티비에 많이 나오시는 것 같습니다. 그 분이 한 인터뷰에서 이런 내용을 봤습니다. "삶을 유지하는 힘은 너무 비장해지지 않는 것부터"라는 표현이 너마 무음에 들었습니다. 오은영 박사님이 2008년 암판정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당시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을 두고 너무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이 조직검사결과 대장암 초기였다고 하네요. 그 이후에는 바쁜 워킹맘의 일상을 내려놓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만을 위한 도전을 시작합니다. 유튜브 영상도 삑어보고, 강아지 100마리 키우기도 해보고, 발레, 피겨스케이팅, 보컬 등 레슨도 받아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 하더군요. "그냥 해보시라. 너무 비장하게 하지 말라. 순간의 행복,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 삶을 유지하는 힘이 됩니다. 쌍코피 나는 심정으로 해야만 뭘 이루는 건 아니다. 편안하게 해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이죠.

자신감과 자존감은 다릅니다. 자존감은 말 그대로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만들어주셔서 있는 것이고, 예수님이 날 구해주셔서 내가 이렇게 멀쩡한 정신과 양심, 의로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고, 성령님이 그나마 내 정신줄 붙잡을 수 있도록 붙들고 계시기에 내가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존감에서 존자가 높일 존입니다. 나를 인정해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신감은 다릅니다. 신자가 믿을 신입니다. 나를 믿는 것이 되어버리면 안됩니다. 내가 존재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나"에게로 돌려 자신감이 되면, 그것이 우상숭배가 되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내가 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신이 되어버리면, 내가 비장해집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누군가를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무언가를 이뤄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이름 석자 남기고 가야겠습니다. 말 그대로 신이 되어 나만의 왕국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착각하지마" 23절입니다. 23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그렇게 높아지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결코 우리가 스스로 이뤄낼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우리 힘을 빼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작은 예수가 되려면, 내 힘을 빼고, 내 성공을 빼고, 내 주도권을 빼야겠습니다. 그리고 따라갑시다.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주셨음을 기억하며 다른 이도 하나님이 만드셨음을 기억합시다. 예수님의 구해주심을 기억하며 다른이들도 구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봅시다. 성령님의 함께하심을 기억하며 지쳐 낙망하는 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우리가 됩시다. 그분을 따라 이미 받은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다른 이웃을 높입시다. 자존감이 떨어질대로 떨어진 그들에게 나아가서 사랑과 은혜를 베푸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3.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부활절이 다가옵니다. 매년 부활절 행사를 하겠지요. 그러나 변하지 않는 내모습, 예수님을 닮아가지 못하는 내모습으로 또 한번의 부활절을 맞이 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이번 한주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로써 섬김의 자리로 내려와 예수가 부활하여 작은 예수들이 세상에서 빛을 비추는 이번 한주가 되길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LVeiKXriBI&t=517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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