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는 권위자입니다.
본문 : 눅 19장 15-19절
1. 서론
1) 권위
여러분, 권위라는 단어에 대해서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권위의식. 부정적인 느낌이 많이 들지요. 사전에도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타인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좋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두번째 정의로는 "일정한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신"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2번째 정의가 더 와닿는듯 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실생활에는 첫번째나 두번째나 거의 동일하게 우리에게 작동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화성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으십니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도 말이죠. 과학자들의 말을 믿는 것이죠. 여러분이 심장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믿으십니까? 우리 배를 가르지 않는 이상 심장을 어떻게 확인합니까? 네. 의사들의 말을 믿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렇게 일정한 분야에서 믿음이 가는 사람들의 말을 믿으며 권위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 그들의 지휘와 지도를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왕정시대에나 어울릴 법한 권위라는 단어를 우리는 실생활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2) 주제
성경은 당연히 권위에 대해서 소개함과 동시에 우리에게는 더 적극적으로 "권위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시편 82편은 재판권한을 가진 자들을 향해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6)라고 말하며, 예수님은 이 구절을 인용하시며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요10:34)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권한을 나누어준 자들을 향해서 "신"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부활한 모든 자들을 향해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기는 제사장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할 것"(계20:6)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다스리라"(창1:26)의 완성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성경은 여러분이 권위자,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자 또는 인정받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신이 있는자"라고 말하며 또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요즘 묵상하는 에스더서에서 아하수에로왕은 멋진 연회와 금은보화, 왕비까지 내세워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 하지만 인간이 세우는 권위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시는 권위는 가장 미천한 배경을 가진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높이시고 권위자로 세우시어 유대인들을 함께 구원해내십니다. 인간이 권위를 가지려고 하면 할 수록 꼬여져버리고 엉망진창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하시고자 하실 때 인간은 자연스레 권위를 가지게 되고 높아지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왕족에서 노예층으로 왔지만, 하나님이 모세를 국가의 대표자로 세우셔서 구출해내셨습니다. 다윗도 잘나가는 군대장관이자 왕의 사위였지만, 광야 도망자 신세로 쫓겨났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은 그를 새로운 이스라엘의 출발점이자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에 우리는 망한 환경에서도 저절로 권위를 가지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믿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3) 본론잇기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 달란트 비유와 비슷한 누가복음의 므나비유를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은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서 정산을 해야 하는 우리 입장에 집중했다면, 누가복음에서는 마지막 날을 향해서 살아가는 오늘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집중해줍니다. 한번 살펴보지요.
2. 본론
1) 높아지고 싶은 사람들
우선 예수님은 제자들을 지적하시며 잘못된 권위자가 되려 하는 것을 막고자 하십니다. 본문장과 같은 장 11절에 보니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위 10절에 보면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인데, 제자들은 잃은 자에 대한 관심은 없고 어떻게든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면 한 자리를 차지할 생각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인기가 너무나 좋아 수만명이 뒤따랐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와 비슷한 므나 비유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게끔 하십니다.
첫번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이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11절에 보니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NIV는 at once, 단번에 즉각적으로.. 라고 표현해줍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로마군을 내쫓고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그래서 예수님 곁에서서 한 자리씩 차지하려는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너희들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며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틀렸다는 것이죠. 너희 생각에 나는 결코 들러리가 될 생각이 없다는 말씀이기도 하십니다.
두번째, 14절에 보니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우리의 왕됨을 원하지 아니"한다며 비유가 시작됩니다. 장사를 하라고 한 귀인을 반대하며 그가 우리의 왕이 되지 않길 바라는 적극적인 표시까지 하는 자들이 있음을 예수는 말합니다. 즉 예수가 통치하고자 하는 방식에 반대한다는 것이지요. 특히 10므나를 가지고 장사를 해보라는 것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들은 지금 당장 나라를 예수가 세워서 무엇인가를 다스리는 권위있는 자로 세워달라는 속내를 가지고 있었고, 예수는 그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누군가 아래에 있지 않을 권위자, 누군가에게 판단받지 않을 권위지가 되고 싶다는 것인데, 예수는 너희는 인생을 살고 하나님 앞에서 판단받아야 할 자들임을 이 비유에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마지막 세번째, 이렇게 오해하거나 예수의 방식을 반대하는 자로써 예수는 못된 종 하나를 등장시키십니다. 이 사람은 이 돈을 수건에 쌓아두고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왕이 되서 돌아온 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1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그런데 이 종의 말에 모순이 있는 것이 돈을 정말 잃을까 두려웠다면 땅에 뭍어두었어야 합니다. 또는 주인이 정말 투자목적으로 돈을 맡긴 것인데 그것을 불릴 자신이 없었다면 은행에 맡겨두었으면 이자라도 거두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종은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돈을 건성으로 싸두어 방구석에 놓고 거들떠 보지도 않았으면서, 지금 오히려 주인을 향해 비난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이런 종을 등장시키면서 "장사하지 않는 자들"을 비판하시는 것이죠.
이 비유를 종합해보자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자 하셨던 겁니다. "너희가 원하는 세상은 오지 않는다. 나를 통해 높은 자리에 올라서 그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성공한 인생에 오르길 원하지만 나는 그것을 만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너희는 이 인생에서 똑바로 살고서 나중에 판단받아야 할 존재들이다. 특히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다가는 못된 종과 같이 "있는 것도 빼앗"기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가지게 됩니다. 비유에서 귀인은 10명의 종들에게 돈을 나누어주며 "장사"를 하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장사를 잘하는 것인지, 어떻게 성공해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공인지가 궁금해집니다. 과연 하나님이 보시기에 성공한 인생은 무엇일까요? 우선 우리가 생각한 성공은 아니라는 판단아래 다음 본문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2) 장사한 자들
10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네, 너무나도 명확합니다. 지난 주에 살핀 아버지의 우리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것이었고, 아버지는 형에게 "잃어버린 동생"을 함께 맞이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최고의 권위자는 "잃은 자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내 주변에 잃은 자를 향해 나아가는 작은 연민과 작은 충성이,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갔을 때 큰 것을 다스리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임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설명해주고 계시는 겁니다. 그 맥락에서 이 비유를 풀어야 합니다. 16-17절입니다. "16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17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 한 므나는 당시 100일치 일당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입니까? 예수가 나중에 "열 도시를 다스릴 권한"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열도시의 왕이라면 한 사람의 평생 연봉과 견줄 것이 못되지요. 그런데 작은 것을 잘 운용하는 것을 보니 큰 것도 잘 운용하겠다는 영적원리가 있음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설명하시는 겁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는, 지금 당장 하나님이 응답해주셔서 내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셔서 높여달라고 할게 아니라는 겁니다. 잃은 자를 향한 작은 헌신과 섬김으로 나아갈 때, 아 이 신자는 나와 같은 섬김으로 나의 나라를 다스리겠구나. 나의 성읍들을 받아라는 영적 원리가 있음을 밝히신 겁니다.
2) 잘하였다 착한 종 : 이런 점에서 볼 때 왕이 장사를 하라고 했을 때 장사를 잘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작은 것에 충성되어 열 도시를 다스리는 왕이 된다는 것은, 작은 것을 잘 다스렸기 때문에 큰 다스림도 잘 할 수 있을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 생애에서 다스릴 것을 잘 다스릴 때, 우리는 앞으로 도시들을 다스리는 자가 될 것임을 말하는 것이죠. 다른 번역들을 보니 "마을, 도시" 정도로 번역합니다. 주인에게 돈을 받아 그 돈을 잘 운용하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다스릴 영역들을 잘 다스릴 때 우리가 왕처럼 다스릴 자로 세워주신 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생애에서 다스리는 연습을 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 참정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정치의 롤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미국 조차도 간접선거이지만, 우리는 직접선거입니다. 여러분이 정치에 참여하는 참정권, 즉 다스리는 작은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나라를 다스리는 연습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성경에 부합하는 더 적극적인 정치제도로써 우리나라상황에 지금과 같은 직접선거가 더 알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대해서, 특히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평생 투표를 하신다면 아마도 총선과 대선만 따졌을 때 최대 20회 씩 40회를, 거기에 구의원, 시의원, 교육감 등 다른 투표들까지 하면 적어도 50회 많게는 100회까지도 우리는 나라를 다스리는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하십니까? 유튜브입니까? 지역출신입니까? 적어도 우리는 성경과 걸맞는 정책을 펼치는 자를 뽑는 "권위있는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성경은 잃은 영혼을 향해 가라고 말해줍니다. 우리의 정치, 우리의 소비, 우리의 시간, 우리의 에너지, 우리의 감정은 무엇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까? 보이는 환경입니까? 만족되어지는 감정입니까? 보이지 않지만 너무나도 강력한 명예와 인정입니까? 우리의 판단은 두가지로 나뉘어집니다. 나를 위한 것인가 타인을 위한 것인가? 여기서 예수는 잃어버린 자를 향해 오셨기에, 하나님은 예수를 이름 위에 가장 뛰어난 이름으로 높이셨다는 영적원리를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3) 희생의 권위
이번 현충일을 맞이해서 아이들과 함께 안중근 기념관을 다녀왔습니다. 남산 자락에 위치해있는데 잘 해놓았더군요. 그곳에서 느낀 것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번째는 안중근 의사의 가문 대부분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가장과 부모가 무엇을 향해 나아가느냐에 따라 그 자녀와 자손 후손이 어떤 가치를 향해 나아갈지에 대해서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 기념관을 나오면서 보게 된 명패때문이었습니다. 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한 도움의 손길들이 있었는데, 일본인 3명의 이름이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자국의 총독,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자국 대통령을 암살한 사람을 기리는 기념관을 건립하는데 100만원이상을 헌납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질문이 들게 됩니다. 왜 자녀들은 안중근의사가 젊은 나이에 외지 뤼순감옥에서 사형받아 시체조차도 찾지 못하는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가? 또 왜 이 일본인 3명은 어떻게 수많은 인식의 벽을 뛰어넘어 외국땅에 지어질 기념관에 동참하게 되었을까?
다른 답은 없었습니다. 희생이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고, 쉽게 할 수 없는 용기인데, 하게 된다면 굉장한 "권위"를 받게 되는구나. 누군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섬기고 희생한다는 놀라운 행동은 타인으로 하여금 놀라운 권위를 가지게 만들고 또 그 삶을 따라 살게끔 한다는 놀라운 삶의 원리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만난 적도 또 예수와 말을 섞은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난 이유가 타인을 위해서라고 말하며 사형대로 스스로 올라갔습니다. 어찌보면 너무나도 허망한 죽음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와 같이 눈에 보이는 희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의 희생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는 우리가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끝나지 않은 마음의 허기와 공허, 반복되는 악한 생각과 부정적 감정, 타인을 향한 시기와 질투, 그로 말미암은 형법적 죄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죄와 마침내 모든 이가 다다르게 되는 육체적 죽음과 영혼의 심판".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더군요.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하여 아버지의 존재를 믿으려 하지 않을 수 없고, 소경이 하늘을 보지 못했다 하여 하늘에 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하여 하나님이 없다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관심가지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해결하고자 예수를 보내셨고, 하여 예수를 믿는 모든 자들이 자유와 승리를 얻게 하셨습니다. 이 희생은 지금도 믿는 모든 이들에게 권위를 가져, 비신자가 신자가 되게 하고, 동네 불량배가 목사가 되게 하고, 안티기독교 기자가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해 성경을 읽다 기독교인이 됩니다. 섬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희생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 사랑하고자 우리 안에 계신 그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3. 결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죠. 오늘 므나 비유에서 예수님은 듣는 이들에게 "장사하여 이윤을 남기는 종"을 등장시켜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가, 나의 도시를 다스려라"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우리네 인생에서 잃은 자를 향해 섬길 때에, 예수는 저 천국에서 우리가 다른 도시를 섬김으로 다스릴 자로 판단하실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신자는 죽어서 영혼을 남깁니다. 나의 영혼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영혼을 남깁니다. 이번 한주도 나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일상에서 잃은 영혼을 사랑하고 섬기며. 그 영혼이 죽지 않도록, 그 영혼이 사랑받으며 살아가도록, 그래서 언젠가 하나님께로 나아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영혼이 되는데 다리역할을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주제설교 > 절기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수감사절 초청주일(2)_몬6_교제라는 여행 (1) | 2023.10.29 |
---|---|
추수감사절 초청주일(1) 몬_매듭짓는 영성 (1) | 2023.10.21 |
23년 부부주일_예수의 아내, 교회 (1) | 2023.05.21 |
23년 청년 교사주일 (1) | 2023.05.14 |
사순절(5)_기록된 미래_빌4:6-7 (1) | 2023.03.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