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교제라는 여행
본문 : 빌레몬서 6절
1. 서론
1) 예화
얼마 전에 우리나라 유명가수 한 사람이 카카오톡과 같이 다른 사람과 소식을 나누는 인스타그램이라는 곳에서 탈퇴한 것이 기사화되었습니다. 이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런 걸로 뉴스에까지 나오나 싶으시죠. 이 가수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5200만명으로 게시물 하나 올리면 수억원의 광고비를 줄 정도라고 합니다. 또 얼마 전에는 불교계에서 큰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도둑들이 일본 사찰에서 고려시대 불상을 하나 훔쳐왔다가 경찰에 압수가 되었고, 그 불상을 조사해보니 이것이 고려시대 부석사라는 사찰소유라는 기록이 나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러사유로 대법원은 이 불상이 일본사찰의 소유로 보아야 한다고하여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들고 일어날만큼, 불상을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이 비춰졌습니다.
2) 주제
여러분, 제가 소개해드린 두 뉴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연결"입니다. 문화적으로 가수와 팬을 연결시켜주는 어플계정 하나의 가치가 어마어마합니다. 종교적으로 보아도 신과 신도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불상에 대해 불교는 굉장히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에서는 "연결"이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말할지 궁금해집니다. 기독교도 분명 연결에 대해서 매우 중요하게 여길텐데, 사실 기독교에서는 확연하게 눈에 띄는 연결점을 찾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이슬람은 메카가 있는 방향으로 기도를 하거나 메카로 성지순례를 함으로써 연결됨을 가지지만, 기독교는 오히려 성지순례라는 말도 써서는 안되고 성경지리답사라고 부르라고까지 합니다. 천주교는 성당에 있는 성상에 인사를 함으로써 신과의 연결점을 가지지만, 특히 우리 장로교회는 십자가조차 예배당에 두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메카도, 성상도, 신앙의 구체적인 중심방향도 없어보이니 답답한 것이 사실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기독교는 "신자간의 연결"이 중심입니다. 왜냐하면 그 신자 안에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성도들이 예루살렘으로 예배드리러 갔다면, 예수님은 둘셋이 내 이름으로 모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곁에 있는 성도에게 가는 것이 성전에 가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성당에 오자마자 마리아상에 고개를 숙이지만, 우리는 성도에게 고개를 숙입니다. 이슬람은 메카를 향해 기도하지만, 우리는 지체들을 생각하며 기도를 합니다.
3) 본론잇기
우리가 빌레몬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신자간의 연결을 "교제"라고 표현합니다. 이 단어를 통해 그는 우리신앙의 방향을 어떻게 설명하며 빌레몬에게 말하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본론
1) 교제라는 출발점
빌레몬서라는 글에 대해서 생각해볼까요. 이 성경책의 장르가 무엇이라고 알고 계시죠? 네, 편지입니다. 그 당시에 유일한 연락방법이기도 했죠. 자, 그렇다면 빌레몬의 입장에서 이 편지를 받아볼까요? 빌레몬이 골로새 교회 구성원을 집에서 잘 돌보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예전에 도망간 오네시모에 대해 억울함과 분노, 분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잘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냥 없던 일로 치며 지금 신앙생활에 열중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오네시모가 나타났습니다. 두 개의 편지를 들고 왔는데 자그마치 바울이라는 초대교회의 대부로부터 편지를 들고 나타났는데, 한개는 자신이 속한 골로새 교회 전체를 위한 편지였고 또 다른 한개는 빌레몬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쓴 편지였습니다. 현대에는 핸드폰으로 문자로 주고받다가도 전화로 해서 이 글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되겠지만, 고대에서 편지를 받는 입장은 그게 아닙니다. 이 편지를 읽고 이 편지의 진위여부 또 보낸사람의 생각은 그 편지를 가지고 온 사람에게 물어서 아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편지에 대해 말해 줄 유일한 사람이 배신하고 도망간 오네시모라는 것이죠. 게다가 그 편지 내용을 보니 중재안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배려같은 것은 없었던 폭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의미심장한 말로 편지를 시작합니다. 특히 6절이 주목할만합니다. "6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오늘 우리가 살펴볼 중요한 단어 3가지가 등장합니다. 첫째, 믿음의 교제가 나옵니다. 우리가 서두에서 살펴본 연결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교제라는 단어로 쓰였습니다. 네, 빌레몬서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꼽으라면 "교제"입니다. 연결이라는 단어로 서두를 시작했는데, 우리는 신앙생활에서의 연결을 "교제"라고 말하는 것이죠. 바울이라고 왜 이 편지를 빌레몬이 받았을 때 힘들어할 것이라고 몰랐겠습니까? 그럼에도 바울은 "믿음의 교제", 즉 신앙안에서의 연결이라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말로 이 편지를 시작한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울은 5절에서 빌레몬의 신앙에 대해서 다른 이들로부터 평가를 들어왔으며, 7절에서 보니 빌레몬을 통해서 많은 성도들이 기쁨과 위로를 받을 정도로 빌레몬이 교회성도들과 신앙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음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잘하고 있는 빌레몬일찌라도 지금 안주해있어서는 안될 것이 "매듭짓지 못한 것에 대한 매듭"이 있기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에 대해 바울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 믿음의 교제라는 출발점이 있어야만 "그리스도께 이르"는 도착지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신앙은 보이는 메카도 성당 앞에 있는 신상도 아니라 "내 곁에 있는 신자와 하나님이 구원을 예정하어 성령이 역사하고 계시는 내 주위의 이웃", 사람입니다. 사람을 향해 믿음의 교제를 시작해야 하며 또 넓혀가야 합니다. 카톡방에 많은 분들이 믿음교제의 시작을 알려주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입니다. 그렇다면 두번째 단어가 궁금해집니다.
2) 예수라는 도착점
믿음의 결단을 출발점으로 보았다면 도착지점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 이른다"라고 말했다고 볼 수 있겠죠. 네, 우리가 살펴볼 두번째 단어입니다. 믿음교제를 시작하면 그것은 우리를 예수에게까지 안내해준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기독교는 빌레몬서뿐만 아니라 어디서든지 믿음의 교제를 넓히기 위해서 신자들에게 굉장한 헌신도를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이렇게 말하셨죠.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며,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1-44) 또는 용서에 대해서 "일곱 번만 할 것이 아니라 일곱번을 일흔번까지도"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18:22) 사실 바울보다 더 했던 것이 예수님이셨네요. 이것이 예수님이 신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입니다. 믿음의 교제를 시작할 때 어떤 수준까지 교제를 해야 하는지 한 비유에서 좀 더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교제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런 삼각구도로 설명하셨습니다. 주인에게 두 종이 있었는데 한 종이 돈을 갚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갚지 못했다가는 아내와 자식, 모든 소유를 빼앗길 지경이었습니다. 주인은 그 종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탕감해주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여기서 "만 달란트"라는 단위를 쓰셨습니다. 보통 달란트는 국가예산이나 기업예산에서나 쓰이는 단위이지 결코 개인이 쓸 수 있는 단위가 아님에도 사용하신 이유는 이 종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었는지를 강조하기 위한 단어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서 또 하나의 관계를 언급하시는데, 탕감받은 종이 돈을 빌려준 친구가 있었습니다. 백 데나리온이었는데 지금으로치자면 천만원 정도라고 볼 수 있는데, 빚독촉을 하다가 결국 그 친구를 고소하여 감옥에 가두게 하였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도저히 이해불가능할 정도의 용서를 해주었는가 반면에 이 종은 자신의 동료이자 친구에게 일상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돈의 정도에 대해서 기다려주지도 않고 자비를 베풀지도 않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종에 대한 주인의 평가가 바로 "예수님의 기준", 그러니까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는 수준"인 것이죠. 주인의 평가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시죠.
"32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34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3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리고 바울이 빌레몬에게 너무나도 과도한 것같은 헌신을 요구할 수 있었던 근거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탕감의 댓가지불을 치르셨다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바울이 빌레몬에게 너무나도 과도한 것 같은 요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용서"라는 비할 수 없는 선조치가 있었고,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당연히 나의 믿음의 교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에게 하신만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꼴밖에 되지가 않으니, 이것에 우리의 신앙생활, 직분, 헌신의 정도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 되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3) 선하신 하나님
우리가 두 단어를 살펴봤습니다. 출발점과 도착지점이었습니다. 믿음의 교제를 위한 출발을 여러분은 누군가를 교회로 초대하며 시작하셨습니다. 또는 누군가를 용서하기 시작합니다. 또는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출발한 영적여행의 도착은 예수의 수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끝없는 사랑과 용서가 내 안에 자리잡게 됩니다. 자, 그렇다면 이 여행을 마쳤을 때 우리가 얻게 되는 결과물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마지막으로 살펴볼 세번째 단어가 그 답입니다. "6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네, 우리가 마지막으로 살펴볼 표현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한다", 세번째 단어 "선을 알다"입니다. 특히 바울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 누가, 에바브로 등과 같은 바울팀뿐만 아니라 예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와 바울팀이라는 교회 지체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놀라운 "선함"은, 믿음의 교제를 시작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빌레몬이 아무리 중직자고 교회에 헌신을 많이해도, 누군가를 품고 용서하고 돌보는 사역을 시작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있는 선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은 선함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죠. 영어로 Good이라고 부릅니다. 좋음을 뜻하죠. 뭐가 좋은 것일까요? 한국에서는 좋은 것이 일본에서는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인 좋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절대적으로 좋은 것을 말합니다. 그럴려면 한국과 일본에서도 모두 인정하는 좋은 것이어야 합니다. 햇빛도 마냥 좋지 않기에 썬크림을 바릅니다. 공기도 마신다고 좋은게 아니기에 공기청정기를 돌리죠. 물이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니니 정수기를 끼웁니다. 좋음은 어디선가는 나쁨이 되지 않아야 좋음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바울이 말하는 좋음은 "우리 가운데 있는 좋음"입니다. 이 수준까지 올라오라는 예수에게도, 그것을 소개하는 바울에게도, 그리고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있는 빌레몬에게도 그리고 이 제안으로 가장 많은 수혜를 입을 오네시모에게도 모두에게도 좋은 선함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선을 알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교제를 시작하면 점점 예수를 닮아가면서 "선한 방법, 선한 나의 상태, 선한 초청자의 상태"에 대해서 하나하나 분별하게 되고 깨닫게 되고 알게 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점심을 간소하게 먹은지 반년정도 지났습니다. 김밥과 라면이 많이 물리실 겁니다. 우리가 주보에 그 시간을 "교제"라고 부릅니다. 그 시간은 밥을 먹는 시간이 아니라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밥이 조촐할찌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선함과 예수를 닮아가는 서로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채워지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배부르게 먹지 못하고 맛있는 음식이 아닐찌라도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3.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부모가 되면 알게 되는 감정의 폭과 이해의 경지와 지식의 깊이가 있는듯 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지금 지금 영적부모가 되기 위해 나서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길에는 예수를 닮아가며 모든 선함을 깨닫게 되는 놀라운 영적인 축복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번 한주도 그 여행을 잘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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