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 사람에게로
본문. 몬 16-19절
1.서론
1) 예화
오늘은 적응이라는 단어로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적응하면 시차적응이 먼저 생각나더군요. 손흥민 선수가 런던에서 서울로 경기하러 올 때마다 그렇게 고생한다고 하네요. 9시간의 시차와 7시간의 비행시간으로 인한 시차만 16시간을 극복해야 한다고 합니다. 손흥민선수처럼 런던에서 한국으로 올 때 시차적응하는데 일주일정도가 걸린다고 하네요.
또 한가지 예화를 드려보죠. 지난주 적응실패에 관한 보도가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DNA가 서로에게 적응하지 못하고 거부반응을 일으킨 사건이였습니다. 미국 메릴렌드 의대연구소팀은 돼지심장을 인간에게 이식했지만, 환자몸에서 거부반응을 일으켜 결국 60일만에 사망한 사고였습니다. 포유류 중 사람과 장기구조가 가장 비슷하다고 알려진 돼지지만, 인간의 DNA가 돼지심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서로 충돌하여 거부반응을 일킴으로써, 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겨 환자가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돼지장기이식수술이 두번째인 수술팀은 두번째 수술을 위해 면역거부를 일으킬 DNA를 자르고 붙이는 연구를 해왔다고 하더군요.
2) 주제
적응이라는 것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 또는 다른 무엇에게 잘 섞이거나 융화되거나 동화되는 것, 또는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적응이 잘 되면 서로 어울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고, 되지 않으면 서로 부딪혀 깨지지요. 적응이라는 말 자체가 찾아가서 맞장구치다는 의미입니다. 손바닥이 마주쳐서 박수소리가 나는 것이죠. 성경에서도 이런의미의 독특한 표현이 있지요. 바로 영접이라는 단어입니다. 맞이해서 대접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영접하라는 표현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죠. 예수를 맞이해 대접하라는 말이겠죠. 성경에 의하면 예수는 우리에게 다가온 신입니다. 나에게 찾아와준 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서 우리에게 "당신도 적응하러 나오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죠. 예수는 나를 받아들이고, 나도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 영접입니다. 교회조직과 예배당 공간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게로 적응해야 합니다.
3) 본론잇기
오늘로 빌레몬서를 마칠텐데 하이라이트이자 결론부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적응의 영성을 위해서 두가지 중요한 단어이자 영적원리로 그에게 권면합니다. 첫번째는 먼저 소개해드린 영접이라는 단어이고, 두번째는 영접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핵심요소인 속량입니다. 이 단어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함께 보도록 하시죠.
2. 본론
1) 같은 선상에 있는 사람들. 영접이 가능한 이유.
먼저 16a을 보시죠. "16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바울은 직접적으로 직위를 가지고 편지를 마무리짓고자 합니다.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죠. 먼저 등장하는 직위는 종입니다. 가장 낮은 위치의 자리를 말하겠죠. 그 다음에 등장하는 직위라고 말할 수 있는 단어는 형제입니다. 형제처럼 맞이하라는 이 말이 어느 수준까지를 이야기하는 건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친형제인지, 아니면 교회에서 부르는 형제자매를 말하는 건지, 교회에 같이 다니기는 하겠지만 과거일로 인해서 서로 어색한 사이를 유지해도 되는 것인지. 사실 종과 형제 두 단어로만은 바울의 의중을 잘 모르겠습니다. 뒷구절을 마저 보시죠. "16b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7절을 보면 동역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같은 일을 하는 사이, 동업자처럼 밀접한 관계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바울과 동역자인 오네시모도 그렇게 같은 관계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선상에 한 사람이 더 있습니다. 16절b에 "주 안에서 상관" 네. 예수님도 계시네요. 예수, 바울, 빌레몬, 오네시모가 같은 선상에 있는 형제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되 손님으로, 예전 관계가 있었던 자로써, 또는 옛묵은 상처가 있는 관계지만 어쩔 수 없이 같은 교회를 다녀야 하면서 인사만 하는 정도로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죠. 바울이 말하는 영접은 "서로에게 적응하며 같은 선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영접에 대해서 살펴보죠. 여러분이 잘 아는 선한사마리아인 비유가 어울릴듯 합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두개의 문장입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눅10:29)라고 묻자, 예수님이 유명한 사마리안 비유를 주셨죠. 길거리에 강도를 만나 쓰러져있는 사람을 향해서 유대인들의 리더격인 제사장과 레위인 모두 도망을 갑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하대했던 사마리아인이 나타나 그를 구해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도로 질문을 합니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 바리새인은 자기를 중심으로 두고 이웃이 누구인지를 살펴보았다면, 사마리아인은 찾아가서 이웃을 만들어냈음을 말합니다. 아무리 제사장, 레위지파, 바리새인이라 할찌라도 내 중심에서 이웃이 될만한 사람들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가서 그 사람과 같은 위치로 나아가 함께 하며 같은 선상에서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죠.
여기서 좀 더 생각해봅시다. 빌레몬이라는 장로, 강도만난 자를 지나친 제사장 목사, 다음으로 지나갔던 출생부터 기독교집안이라 말할 수 있는 레위인 모두가 이웃이 되러 나가지 않고 내 중심에서 경계를 짓는다면 그들에게는 "영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영생을 준 자라면, 내가 성도라면, 아무리 내가 자격이 없고 학력이 모자르고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마리아인이라 할찌라도 "찾아가서 서로 적응하고자 하는 행함"이 보여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에서 예수님의 결론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 "너도 이와 같이 누군가를 영접하러 같은 선상에 서기 위해 내려가라"였습니다.성경이 말하는 "누군가를 맞이하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의 세계, 환경, 수준까지 함께 하러 간다는 의미입니다. 강도만난 자의 곁으로, 오네시모의 곁으로, 신이지만 인간의 세계로 말이죠.
우리 한국교회사 일화 중에서만이 찾을 수 있는 "신자가 서로 동화되고 융화되기 위한 돌림자 개명"일화 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년 전 강화도에 복음이 전해집니다. 그러자 곳곳에서 부흥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했죠. 그 중에 홍의교회와 교동교회 초기 신자들은 이름을 바꾸면서 돌림자를 만들기도 했답니다. 홍의교회는 ‘한 일(一)’자를 마지막 글자로 삼아 ‘박능일’ ‘종순일’ ‘권신일’ 등으로 새 이름을 지었고, 교동교회 신자들은 ‘믿을 신(信)’자를 돌림자로 삼았다고 하고요. 여기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돌림자를 쓰거나, 양반과 종놈이 같은 돌림자를 쓰는 관계가 있었답니다.
현 한국사회에서 교회 안에서도 정치성향으로, 경제적 소득에 따라서, 각종 사회이슈에 대한 견해나 연령별로 인해서 나뉘어지는 것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더 나아가 교회의 큰 결정을 앞두고서 한 마음을 이루지 못하고 나뉘어지는 것들은 우리의 가슴을 더 아프게 만듭니다. 이미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값을 치루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이웃이 되고자 나선다면 누구든 서로 같이 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든 밖에서든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로 함께 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2) 속량
그런데 이 비유에서 중요한 영적원리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라는 발언을 굳이 넣으시면서 이 비유를 마치십니다. 비용을 대신 갚는 다는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말이죠. 제가 오늘 설교에서 중요한 단어 두가지 영접과 속량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결론은 영접하려면 비용이 듭니다. 그 비용은 돈이 될 수도 있고, 에너지가 될 수도 있고, 시간, 감정, 의지 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누군가를 영접하러 같은 선상으로 간다는 것은 "댓가지불"이 필요하다고 성경은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와 같이 바울도 그 정신을 이어갑니다. "18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19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여기서 쓰이는 단어들을 보십시오. 빚진 것, 계산, 갚다 등과 같이 경제적인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네. 제가 속량이라는 단어를 말씀드렸는데, 사실 이 단어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 속량에 개념을 풀어서 쓰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속량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치르기 위해서 댓가를 지불함으로써 한 대상을 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우리문화와는 많이 다른 전통들이 있습니다. 종으로 팔려간 형제를 값을 주고 데려오거나, 형제가 상속받은 땅을 저당잡혀 빼앗겼을 때 값을 대신 치뤄주거나, 형수의 대를 이어주기 위해 형제가 자녀를 낳기 위한 씨를 주는 등의 문화지요. 이것들이 사실 "속량"을 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문화에 두신 장치들입니다. 어떤 것을 이어나가기 위한 힘을 잃었을 때 곁에 있던 형제가 그것을 위한 댓가를 대신 지불해줌으로써 삶을 이어나가게끔 하는 것.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속량의 삶이었고, 예수야 말고 십자가에서 형제의 영혼의 삯을 지불함으로써 형제들이 죄에서 자유해질 수 있게끔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직접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기도 하셨습니다. "45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 네, 예수라는 신은 우리에게 벌을 주러 오는 신이기 전에, 우리가 삶의 원동력을 잃었을 때 자신의 것으로 댓가를 지불하여 우리가 다시 살 수 있도록 희생한 형제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를 영접하기 위해서 무엇을 지불하면 됩니까? 정말 예수가 치른 값에 비하면 비할 수 없는 것을 지불하기만 하면 됩니다. 마음으로부터 진실된 믿음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 믿는다는 행위의 비중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한 병든자가 누군가가 준 약을 통해 낫게 되었다. 그 때 환자가 한 일이라곤 그 약을 삼킨 것이다." 네. 우리가 한 일이라곤 그 약을 삼킨 것. 믿고 그것을 먹은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양쪽에서 서로 댓가지불을 함으로써 서로 맞춰나가며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빌레몬은 믿음으로 예수의 속량을 경험한 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 할 일은 다른 누군가에게 속량을 소개하기 위해 내가 가진 것 일부를 댓가를 지불하며 이웃이 되러 나아가는 것입니다.
3) 적용
사람은 모두가 자신이 가진 것을 통해 무언가와 맞바꾸기 마련입니다. 내 시간과 에너지, 의지를 통해서 가족의 안락한 처소를 마련하기도 하고, 생활비를 마련하기도 하며, 대인관계, 직업전문성, 취미생활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지요. 성경에서는 그 중에 이것만큼은 절대 놓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44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13) 우리가 반드시 놓쳐서는 안되는 천국이라는 보화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향해 믿음의 교제를 하기로 결단하고, 섬기고 사랑하여, 그와 영적세계로 함께 들어가 형제자매가 되는 것. 그것이 천국이며, 그 천국을 반드시 소유하러 우리는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믿음이 생기면 보화가 보이고, 우리는 저절로 그 보화를 향해 댓가를 지불하게 되는 겁니다.
제가 일전에 말씀드렸었던 제 마음을 힘들게 하던 초청자가 있었습니다. 조금 껄끄러워져서 교류가 거의 끊기다시피 했습니다. 한동네에 살기 때문에 좀 어색해져서 제가 오히려 눈의 안띄려고 피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억울했습니다. 나는 오히려 선의를 베풀며 다가섰는데, 자신의 감정에만 몰입하여 거리를 만드는 것이 너무나도 괴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한번 더 나아가보고자 했습니다. 그 때 저의 마음은 "복음과 이웃이라는 보화를 얻기 위해 자존심을 댓가로 지불했습니다."
가서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교회 현수막을 보았는지 물어보며, 초대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음악회에 관심을 보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음악회에 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에 방문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한번 더 함께 걸어나가는 동행자요 이웃으로 회복할 수 있었음에 감사드리게 되었습니다. 다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웃의 영혼이 도둑같은 악한세력으로부터 자유해지어 사랑과 화평, 마음의 평화로 나아오길. 그것을 위해서 지금 내가 내려놓은 자존심이 필요하시다면 또 드리겠다고. 그렇게 천국이 우리에게 임하는 줄 믿습니다.
3. 결론
주객전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인과 객(손님)이 바뀌었다는 말이죠.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은 것이 뒤바뀌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나 자신이 주인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객은 오히려 나였습니다. 주인은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사랑을 지고가는 십자가요, 나는 그 십자가를 지고 갈뿐인 객이요, 청지기요, 종이요, 대리인입니다. 나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며, 이번 한주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내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요 손님은 잠깐 이 인생을 맡은 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진짜 주객을 올바로 하여 전도의 현장, 영접의 현장, 속량의 현장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17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18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19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몬16-19)
29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36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25-37)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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