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성실하신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다윗이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되기 위한 훈련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어찌보면 이 훈련은 사울의 핍박으로부터 시작했을 겁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다윗이 광야에서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가?”라는 질문에 고민하는 순간부터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훈련을 이 인생 가운데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천국으로 그냥 인도하지 않으시고, 광야길을 걷게 하시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우리네 인생이 광야이며 훈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광야와 훈련의 공통점은 도착지점에서 안식하게 된다는 겁니다. 광야를 지나 본향에 도달하게 되고, 훈련 후에 숙련된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이 이 훈련의 첫코스로 가드 왕 아기스를 만나게 됩니다.
10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11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블레셋에 속한 큰도시가 5개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가드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간 곳이 블레셋이라는 것이 의아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윗의 전략적인 태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대적인 블레셋에 옴으로써 사울이 쉽게 추적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지요. 사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인도하고자 하셨던 곳은 광야였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영토 내에 있는 광야에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것”을 기억합니다. 바울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사역지였던 소아시아를 떠나 마게도냐로 갔던 것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심령에 물질적인 푸른 초장과 물가로만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영혼과 마음의 단련을 위한 훈련의 장소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이 장소에서 진정한 하나님이 주시는 영혼의 푸른초장과 물가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는 인생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다윗이 가고자 했던 아기스 왕에게로 그는 가지 못하게 되는데, 아기스 왕 신하들의 반대로 인함입니다. 그들은 다윗의 인기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사울과 비교하며 말해줍니다. 더 나아가 그 땅의 왕이라고까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그 땅의 왕이 블레셋에 온 것이 순수하겠냐, 반드시 우리를 치러 왔을 것이다라고 평가하는 것이지요. 게다가 다윗이 얻은 사울은 천천인데 다윗은 만만이라는 평가는 누구와 싸워서 얻은 것입니까? 또 다윗은 누구의 칼을 들고 왔습니까? 블레셋과 싸워서 얻은 칭호이며,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이겨서 얻은 칼 아니었습니까? 그러니 신하들이 다윗을 반대하는 것은 당연지사였지요. 이런 가드 신하들의 의견을 듣게 된 다윗은 무언가 다른 생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12-13절입니다.
12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13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우선 다윗의 심령에 들었던 마음이 무엇입니까? “두려움”입니다. 지금 다윗의 심령의 상태를 엿볼 수 있는 구절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영이 충만하여, 골리앗을 물리쳤고, 그 이후로도 전쟁에서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사울의 악령을 무찔렀습니다. 그런 그가 두려워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호와의 영을 거두어가심을 말합니다. 물론 사울의 유기상태와는 본질적인 의미가 다르겠습니다. 사울은 회개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보호를 거두어가심으로 악령으로 시달리게 하셨다면, 다윗에게는 믿음을 더 증진시키고 확신케 하기 위한 시험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전자를 두고 하나님이 그럼 악하시냐라고 물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악함이 누구로부터 시작했습니까? 사울 자신의 죄악 아닙니까? 하나님은 그 죄와 선을 사용하셔서 그를 회개케 하시어 선함을 이루고자 하심인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악하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없습니다. 사울에게나 다윗에게나 모두 하나님은 방법과 의미는 다르지만 모두 “선하게 하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에게도 여호와의 영이 거두어졌다기 보다는 고난으로 인도하시는 것 같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사단에게 시험을 당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처럼 말이죠. 그렇게 믿음의 증진을 위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시험을 하듯이 다윗도 두려울 수 밖에 없고 고민이 되고 어려움에 처하는 상황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서 그는 골리앗에게 외쳤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미친척을 하며 침을 흘리는 것이지요. 이에 아기스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14-15절입니다.
14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15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과 고난은 우리를 더 바닥을 치게 만드시곤 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우리가 더 뛰어오르게, 더 성숙하게, 더 하나님을 신뢰하며 평온케 하시기 위함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은 아기스에게 “미친사람”이라고 불리웁니다. 신하들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강력하고 위세가 등등했던 다윗이었음에도, 이렇게 비난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내가 의도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비난을 받거나 어려움에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차라리 원인이라도 알면 마음이 편하겠는데, 나와는 상관 없이 일어나는 일 때문에 아플때가 있지요. 그리고서 우리는 신앙대답으로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라고 막연하게 답을 내리곤 합니다. 맞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 다음의 “믿음의 해석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왜 하나님이 이런 고난을 주시는가? 왜 나를 망하게 하시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잘못이 없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런 질문의 연속이 이어졌던 것이 바로 욥기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답은 “우리의 이해로는 소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이뤄가시는지를 바라보며 기다려야 합니다. 경험하면서 이해하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 지금 다윗이 그러합니다. 저와 여러분 삶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과 시험이 있다면, 섣부르게 이해하려하기 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하나하나 배워나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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