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성실하신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만큼은 요나단과 다윗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다윗이 기름부음 받은 자로써 하나님 나라 질서에서 더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이 관계를 이끌어가는 "신앙 안에서의 신뢰"로 보자면 요나단이 다윗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 이스라엘"이라는 중심을 명확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 사울이 벌벌 떨 때에도 블레셋과 싸우러 나가면서도 "하나님이 끝내실 것"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서 다윗을 죽이려 할 때에도 요나단은 다윗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까지 합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방향, 덕목"에 대해서 정말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섬김과 희생으로 다윗이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오늘 이 두 사람은 마지막 대화로 서로 떨어지게 됩니다. 12-13절입니다.
12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증언하시거니와 내가 내일이나 모레 이맘때에 내 아버지를 살펴서 너 다윗에게 대한 의향이 선하면 내가 사람을 보내어 네게 알리지 않겠느냐13그러나 만일 내 아버지께서 너를 해치려 하는데도 내가 이 일을 네게 알려 주어 너를 보내어 평안히 가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나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와 함께 하신 것 같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니
초하루, 그러니까 한 달이 시작되는 날에 사울 앞에서 각 신하들이 모습을 보여야 하는 정기월례회를 중요한 기점으로 잡고 있습니다. 그 때 다윗이 보이지 않으면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 다음날, 그 다음다음 날에도 다윗이 보이지 않으면 사울이 안그래도 다윗을 주시하고 있는데 분명히 그에 대해서 물을 것이 자명합니다. 그런데 그 묻는 의도가 과연 선한지 악한지 요나단이 판단하고 다윗에게 알려주기로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비참한 이스라엘의 상황입니까? 왕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써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를 하나님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그에 따라서 통치해야 하는 사람이, 자신의 아들과 신하로부터 오히려 판단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나 역행하는 순간입니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선악과를 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단으로부터 오히려 역행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
요나단은 다윗과 대화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나타나기를 맹세합니다. 그의 신앙, 양심, 도덕에서는 사울이 다윗을 해쳐서는 안되며 자신은 왕의 아들이지만, 다윗을 살리는데 힘써야 할 것을 다윗 앞에서 고백합니다. 만약 자신이 하는 말이 거짓이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리고 요나단은 더 나아가 하나님의 축복의 다스림까지도 고백합니다. 14-16절입니다.
14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15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16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17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았을 때에 받게 될 심판을 먼저 이야기 했다면, 그 후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동했을 때에 받게 될 인자와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다윗을 살리길 원하시듯이, 자신도 다윗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 하나님의 인자를 닮아 자신의 집도 인자하게 대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결코 자신의 집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다윗과 대적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언약합니다. 그리고 17절에 유명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하나님의 십계명, 예수님이 선정하신 가장 큰 계명을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요나단의 고백은 이것의 실천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서두에서 말씀드린 요나단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윗을 이끌어가는 인도자처럼 보인다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서 다른 어떤 이보다 경제적으로 하위에 있을 수 있고, 또 사회적 지위로 낮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 조건들에 의해서 하등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섬길 수 있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무언가를 가진 자가 그렇지 않은 자를 위해 희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질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 사랑, 희생, 다스림, 통치, 믿음, 심판 등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가지고 있고 믿고 있는 우리가, 다른 이를 섬김으로써 우리는 그들을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요나단은 구체적으로 다윗이 피할 길을 가질 수 있도록 제안합니다. 18-23절입니다.
18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일은 초하루인즉 네 자리가 비므로 네가 없음을 자세히 물으실 것이라19너는 사흘 동안 있다가 빨리 내려가서 그 일이 있던 날에 숨었던 곳에 이르러 에셀 바위 곁에 있으라20내가 과녁을 쏘려 함 같이 화살 셋을 그 바위 곁에 쏘고21아이를 보내어 가서 화살을 찾으라 하며 내가 짐짓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화살이 네 이쪽에 있으니 가져오라 하거든 너는 돌아올지니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평안 무사할 것이요22만일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화살이 네 앞쪽에 있다 하거든 네 길을 가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셨음이니라 23너와 내가 말한 일에 대하여는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영원토록 계시느니라 하니라
사람들이 자리에 없는 다윗을 찾기 시작할 때까지 바위와 돌무더기로 이뤄진 에셀 바위에 숨어 있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화살을 쏨으로써 메시지를 보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요나단은 다윗과 사이에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계신다"고 언급합니다. 사실 이 때 유대교에서 "하나님을 언급"한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요나단의 행적들을 계속해서 살펴보면,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말하는 것들을 우리는 목격하게 됩니다. 사회와 시대상이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매우 조심스러워하더라도, 그가 이렇게 말하며 결정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니 자연스레 사랑하는 존재에 대해서 언급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오늘도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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